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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이 마릉 천남성 씨앗을 살피는 중...
▲ 천남성 잎이 마릉 천남성 씨앗을 살피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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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사는 양승엽(77)씨를 보성고교에서 만난 건 지난 6일 오전이었다. 세상 물욕을 초월한 듯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해 보이는 그에게선 어쩐지 쌉쌀한 구절초 향내가 난다.

남한산성 정기 어린 보성교교에서 33년간 생물학 강의를 하다가 15년 전에 퇴직한 그는 재직 시절부터 심혈을 기울여 가꿔온 학교 뒷산 야생화 밭을 못 잊어 퇴직 후에도 매일 출근하여 야생화를 가꾸고 있다.

매주 한 번씩 재학생들 특활시간이면 학업에 지친 제자들을 뒷산 솔밭으로 데려가 피톤치드로 산림욕을 시키고 야생화 밭에서 강의를 한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야생화처럼 강인하고 지고지순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다독이며 가르친다.

그는 일찍이 서울농대를 나와 지방학교에 근무하다가 보성고교로 오게 되었는데, 보성고교 동문제자들은 해마다 스승의 날이면 퇴직한 교사들까지 모두 초빙하여 세계 곳곳마다 해외여행을 시켜줄 만큼 모범되고 아름다운 제자들이라고 소문이 나있다.

그토록 사제지정이 두터운 학교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건 인지상정이겠지만, 그보다도 핏줄처럼 매일 손질하고 물을 주며 가꿔온 수많은 야생화들은 모두가 그의 사랑과 온정으로 긴 세월을 함께해온 제2의 가족들이라 더 애착이 간다. 

때때로 그 어느 곳에 여행을 가더라도 색다른 희귀종을 만나면 기어이 돈을 주고 사거나 얻어서 보물단지처럼 갈무리해오곤 하여 번식시킨 것들이니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은 주변에 심은 나무들이 너무 울창하게 커서 야생화 밭에 그늘을 드리우므로 야생화들이 잘 자라지 못하는 점이라고 한다.

- 평소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하시는 일은 없나요?
"이 나이에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소일삼아서 강동구 어린이들에게 일주일에 3회씩 '자연사랑 숲생태해설'을 해주는데 귀여운 아이들을 만나면 내가 더 젊어지는 것 같아서 행복해요."

유치원생 숲생태 자연사랑 지도중 모기약을 발라주는 양승엽 씨
 유치원생 숲생태 자연사랑 지도중 모기약을 발라주는 양승엽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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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꼬마들에게 무궁화 설명중
▲ 무궁화 이야기 유치원 꼬마들에게 무궁화 설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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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생화를 키우며 특별히 느끼신 점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누구나 꽃을 좋아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화원이나 화단에 화려하게 핀 꽃들은 만인이 다 좋아하여 공들여 키우지만, 야생화들은 누가 돌보아주지 않아도 강인하게 어떤 환경에서나 잘 자라요. 특히 우리 토종 야생화들은 애환이 많은 우리 민족을 닮은 듯 은은한 향기가 독특하여 보면 볼수록 앙증맞고 신비해서 더 좋아해요."

- 이 많은 야생화들 중에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시나요?
"그야 계절별로 피는 꽃들이 다르고 또 모든 꽃들이 제 나름대로 특징이나 매력이 있으니까 특별히 어떤 꽃이 좋다고는 할 수가 없지요.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있나요? 비록 식물들이지만 다 내 손끝에서 교감을 나누며 수십 년을 함께 해왔는데 편애를 하면 안 되지요. 하하하."
"어휴, 역시 선생님은 다르시군요. 마치 그 옛날 황희 정승이 왕십리에서 두 마리의 소로 밭을 가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느냐?'고 물었던 우문현답 같네요. 호호호."

호미로 잡초를 뽑아주고 있다.
▲ 풀 뽑는 양승엽씨 호미로 잡초를 뽑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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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맘에 드는 꽃 앞에서 포즈를 좀 취해달라고 했더니 청초해 보이는 투구꽃을 쓰다듬어 주고, 소박한 시골아가씨 같은 구절초 향기를 맡더니 곧 그 옆에 잎이 다 말라버린 천남성 열매를 쓰다듬다가 호미로 잡초를 뽑는다.

저만큼 솔밭그늘에 서양등골나물이 부러운 듯 기웃거리고, 해밝은 밭둑에는 쑥부쟁이, 개미취, 산국, 자리공들이 시샘을 하듯 부신 눈을 지릅뜨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실버넷뉴스에도 올랐습니다.



태그:#야생화,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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