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눈부시게 쬐인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뒤뜰에 봄을 재촉하는 기운이 솟아난다. 뒤뜰 큰나무가지에 깍깍거리는 까치들이 땅에 뿌린 씨앗을 먹을까 하얀 비닐로 커텐을 치듯이 막을 쳐놓았다. 식구가 없어 초라한 장독 서너개만 덜렁 놓인 것이 어쩐지 내 마음을 시리게 한다."(강봉규 회원)지난 봄, '고향의 빛 사진연구회(회장 라규채)' 회원들은 때때로 배고픈 곰들이 먹을거리를 찾아 가끔 내려오기도 하는 지리산 깊은 산중의 문수리와 심원마을을 찾았다.
그 곳에서 밭뙤기를 일구고 한봉을 치며, 산에서 나는 나물과 약초를 채취하며 소박하게 살아가는 마을사람들의 일상생활을 렌즈에 담아 지난 10일부터 오는 20일까지 예술의 마을 담양 '명지원'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사진 연구회 회원들이 찾은 지리산 문수골은 행정상 전남 구례군 토지면에 속하며, 빨치산과 국군의 격전지로 민족사적 아픔과 상처를 갖고 있는 곳이다.
상죽(웃대내)과 중대(영암촌), 불당과 밤재의 작은 네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 문수리는 불교에서 지혜를 주관하는 문수보살이 이 곳에서 수년간 수도하다 성불하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임진왜란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문수리는 노고단~왕시루봉~형제봉을 삼각점으로 생성되었고 명당으로 꼽히는 토지면 오미리를 이웃하고 있다.
이 일대는 과거 해방과 분단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기간, 여순 사건이 일어나는 1948년 10월부터 1955년 5월까지 근 7년 동안 빨치산과 경찰 토벌대의 피비린내 나는 격전지였다. 주민들은 오랜 삶의 터전인 이 곳을 버리고 하나둘 떠나야만 했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문수리는 노인들만이 사는 한적한 마을이다. 주민들은 밤, 한봉, 고로쇠 수액 채취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도 요즘은 여의치 않다. 동네 곳곳에 멋지게 들어선 집들은 외지인들의 별장이다. 여름에나 가끔 주인들이 왔다 갈 뿐 평상시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산골마을 문수리는 봄이면 마을 곳곳에 핀 산수유 꽃을 찍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모여든다. 여름엔 문수골 계곡을 찾아든 피서 인파로 북적이고, 가을엔 밤과 감을 수확하는 손길로 바쁘다. 겨울에는 가끔씩 배고픈 곰들이 마을로 찾아든다.
지리산 뱀사골 달궁마을 넘어 해발 900m 되는 곳에 있는 심원마을은 조선 고종시대 약초와 한봉을 위해 한두 호씩 모인 것이 지금에 이르렀는데 주변 수킬로미터 이내에 마을이 없어 '심원'이라 불리웠다고 한다.
이곳은 지난 1988년 성삼재 관광도로가 개통되면서 '하늘아래 첫 동네'로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고, 현재는 원주민들이 떠난 땅에 타지 사람들이 들어와 관광객들을 상대로 식당(민박) 영업을 하고 있다. 약초와 한봉으로 연명하던 주민들도 민박촌 형성에 합류하면서 현재 열다섯 가구가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다.
2006년 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 남부사무소는 "자연환경을 복원하기 위해 마을을 철거하고, 오는 2011년까지 주민 이주 작업을 완료한다"는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밀려드는 관광객과 그들을 상대로 한 식당(민박) 영업이 계곡 오염의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에 박준영 전라남도지사는 마을 철거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전통가옥 조성'을 대체 방안 일부로 내세웠지만 새하얀 펜션 건물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심원마을의 보존은 아직 미지수로 남아있다.
백두대간의 준령을 타고 남으로 내려오다 잠시 멈춰선 지리산. 지리산이 어머니 가슴팍 같은 산처럼 느껴진다는 '고향의 빛 사진연구회' 회원인 정노삼순씨는 심원·문수골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지리산은 가난과 기울어 가는 가세의 한을 가슴에 묻고 내색하지 않으며 가정을 묵묵히 꾸려가는 우리네 어머니처럼 민족의 아픔 상처를 안으로 삭이며 우리들을 포근히 안아주는 산이다. 지리산 자락 하늘 닿는 곳에 자리한 심원·문수골은 아픈 역사의 모진 세파를 살아오면서도 옛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채 가계를 꾸려가지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든 우리 어머니의 모습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