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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흐르다 장수대 입구쪽에서 만난 계곡물이 파랗다 못해 에메랄드빛 보석 처럼 보인다
▲ 보석 흐르다 장수대 입구쪽에서 만난 계곡물이 파랗다 못해 에메랄드빛 보석 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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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10월 12일)를 잘 맞췄다. 그리고 장소(장수대에서 십이선녀탕까지)도 잘 선택했다.  설악산 단풍이 절정인 지금, 설악산을 오르는 그 어떤 길에서든 가장 아름다운 '설악 단풍'을 만날 수 있을 때다.

이미 낙엽으로 져버린 대청봉 주변을 뺀 나머지 설악이 지금 단풍의 초절정 시기를 지나는 중이다. 설악산을 오르는 여러 길 중에서 장수대능선에서 십이선녀탕을 선택한 건 '당일치기'가 가능해서이고, 아이들과 함께 등산하기에 적합한 그리 길지 않은 길이기 때문이다.  총길이가 약 11㎞로 6~7시간이 걸리는 설악산 코스 중 짧은 편에 속한다.

집에서 출발한 시각이 새벽 5시, 새벽길을  2시간 30분 달려 등산로 입구쪽 장수대야영장에 도착했다. 뿌연 아침 기운이 서린 야영장 주변이 을씨년스럽다. 두 해 전 홍수가 났을 때 큰 피해를 입은 곳이라는데 이젠 거의 복구가 끝난 듯 보였다.

단풍 산이 좋아서 숲이 좋아 설악산의 가을은 풍요롭다
▲ 단풍 산이 좋아서 숲이 좋아 설악산의 가을은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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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때 피해를 입은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여전히 시들한 모습이다. 야영장 주변뿐만 아니라 수해를 입은 계곡을 따라 거의 모든 소나무들이 병에 걸린 듯 시들해 보인다. 부디 복구작업이 또다시 같은 피해를 입히는 불상사를 피해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야영장을 벗어난다.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니 첫 걸음부터 뭔가 다르다. 산은 각자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갖는 법이다. 설악산은 그 아름다움의 층이 매우 다양하다는 걸 느낀다. 숲을 이루는 나무의 종류에서 벌써 차이가 난다. 그러니 단풍이 곱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붉고 노란 단풍이 절정인 설악산에 들어서며 감탄으로 첫 걸음을 뗀다. 차고 맑은 날씨가 단풍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청명한 가을이다. 하늘은 또 어떤가, 산 봉우리에 깃털구름이 몇 개 걸쳐져 있을 뿐, 파랗고 깨끗한 하늘이다.

설악산 대승령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면 파란하늘을 인 산봉우리마다 이렇게 가을이 들어 앉았다
▲ 설악산 대승령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면 파란하늘을 인 산봉우리마다 이렇게 가을이 들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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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고 깨끗한 하늘, 차고 맑은 공기  그리고 그것들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 붉고 노란 단풍의 행렬을 따라 걷는다. '단풍나들이'에 더 없이 적합한 날이다. 단풍 속으로 한발한발 들어가는 일이 '행복' 그 자체인 길.

줄곧 오르막이지만 그리 고통스럽지 않은 정도의 오르막이다. 쉬엄쉬엄 걸어도 좋다. 오르는 길은 겨우 3㎞ 남짓이다. 겨우라니? 설악의 품이 얼마나 넓은가. 하룻밤을 묵고 걸어야 할 곳이 허다하고, 심지어는 이틀밤을 소요하고도 더 걸어야 하는 게 설악의 품이고 보면, 3㎞의 길을 걷는 것만으로 설악산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면 그건 '거저'나 다름없다.

노란단풍 빨간단풍도 곱지만 노란단풍의 화려함도 만만치 않다
▲ 노란단풍 빨간단풍도 곱지만 노란단풍의 화려함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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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대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내설악에 속하는 코스다. 바위산인 설악산 치고 흙산의 면모도 함께 느껴지는 비교적 부드러운 길이다. 오르막도 그리 힘겹지 않은 까닭이다. 완만한 오르막이 있고 길 양편으로 잘 익은 단풍나무들이 펼쳐지는 장수대 길에 비경이 하나 숨어 있다. 바로 대승폭포다.

사실은 '십이선녀탕'에 마음이 가 있어 대승폭포는 대충 훑어만 보고 가리라했다. 대승폭포에 관한 내용을 설명을 읽고 전망대 위에 서 본다. 올 가을 비가 적었던 탓인지 수량은 아주 미미했다. 그러나 88미터나 된다는 폭포의 길이에 그만 압도 되고 말았다. 저 벼랑을 타고 버섯을 따러 밧줄을 타고 내렸갔다는 대승이라는 총각은 겁도 없었나 보다.

대승폭포 무려 길이가 88미터나 된다는 대승폭포는 대승이라는 효자총각의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 대승폭포 무려 길이가 88미터나 된다는 대승폭포는 대승이라는 효자총각의 이야기가 전해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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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이야기라지만 상상만으로 오금이 다 저려온다. 마침, 적은 수량을 상쇄할 듯 폭포 위쪽으로 단풍이 그렇게 고울 수 없다. 대승폭포를 보고 나서 설악의 작은 봉우리 중 하나인 '대승령'(1210m)으로 향한다. 장수대에서 대승령까지 2.7㎞의 오르막을 걸었다. 문제는 십이선녀탕으로 가는 하산길이 8.6㎞ 남았다는 사실.

그러나 내리막길이니 그리 겁낼 필요는 없다. 사실 더 겁나는 건 십이선녀탕 주변길이 까마득한 벼랑길이라는 점, 그리고 그 길이 이맘때면 늘상 사람들로 인해 정체를 빚는다는 점이다. 단풍도 절정이고 설악산을 찾는 이들도 절정인 때인 걸 감안하더라도 사람들이 많긴 많았다. 줄 서서 산을 내려가느라 그 아름다운 풍경들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거 같아서 지금도 아쉬움이 크다.

다행히 아무리 많은 인파가 몰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설악산의 단풍은 더 없이 곱다. 노란단풍은 더 이상 노란색일 수 없을 정도로 샛노랗게. 빨간단풍은 더 이상 붉을 수 없을 만큼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파란하늘 아래 펼쳐진 단풍 숲을 보면 그곳이 어디든 눈이 다 부셨다.

푸른 하늘과 어울린 붉고 노란 단풍든 숲을 떠올리면 지금도 나는 두 발이 둥둥 떠서 단풍나무 사이를 구름처럼 떠다니는 느낌에 빠진다.

산길을 걷는 내내 바로 곁에서 노란잎을 흔들어 대던 생강나무 노란단풍은 '소풍나온 유치원 꼬마들'을 보는 듯했다. 아슬아슬한 계곡쪽엔 피나무 노란단풍은 유난히 거무스레한 나무 등걸로 인해 더욱 눈에 띄었는데 바람이 불 때마다 햇살받은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이 서린 선녀탕이 열두 개라고 했다. 그저 자연의 신비라고밖에 할 수 없는 모양으로 계곡의 암반이 마치 '목욕탕'처럼 둥글게 파여져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 절묘한 솜씨로 바위를 팠다고 해도 저렇게 자연스럽고도 다양한 모양을 결코 만들진 못하리.

십이선녀탕 열두개의 탕이 계곡을 따라 쭉, 이어지는 신기한 자연다큐.
▲ 십이선녀탕 열두개의 탕이 계곡을 따라 쭉, 이어지는 신기한 자연다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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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걔, 나는 진짜 목욕물이 들어 있는지 알았네."


첫번째 선녀탕을 보며 아들녀석이 너스레를 떤다.

"계곡물에서 김나는 거 본 적 있어?"

피식, 웃음으로 말없음을 대신 하는 녀석도 십이선녀탕이 들어선 설악산 계곡이 신기한가 보다. 갑작스럽게 차가운 날씨에 감히 목욕할 용기는 없지만 선녀탕의 신기한 모양새는 옛날 이야기 속 선녀들의 목욕장면을 아니 떠올려 볼 수 없게 한다.

'아마, 선녀들이 여름에만 목욕하러 내려오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선녀탕의 전설을 마무리(?) 짓는다. 우리뿐만 아니라 선녀탕을 들여다 보는 이들이 한 마디씩 보태는데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참 재밌다. 그중 압권은 한 여자분의 한마디.

'이럴 줄 알았으면 소복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선녀들의 날개 옷이 언제 소복으로 바뀌었나? 머리 속으로 빠르게 선녀의 하얀 날개옷을 벗기고 소복을 입혀본다. 그렇게 되면 선녀탕의 전설이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아닌 '전설의 고향' 풍의 납량특집이 되어버릴 텐데?

아, 설악 설악산 계곡에 가득 내린 가을이 눈부시다
▲ 아, 설악 설악산 계곡에 가득 내린 가을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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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선녀탕을 지나며 당신은 나무꾼이 되어보고, 나는 선녀가 되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순전히 상상으로 그치겠지만 이 독특한 길을 가는 재밌는 방법이 될 듯싶다. 결코 짧지 않은 8㎞ 남짓의 십이선녀탕 가는 길(남교리 방향)은 이렇듯 이야기가 있는 길이고, 눈을 들어 바라보면 그곳이 어디든 화려한 단풍행렬이 눈길을 사로잡는 길이기도 하다.

선녀탕이 있는 계곡 쪽으로는 접근이 불가하게 되어 있는데 내려가는 이들이 누군가 싶었다. 줄 지어 가는 등산객들 틈으로 대충 감상하기엔 너무 감질맛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선녀탕을 좀 더 오래 들여다보며 아름다운 선녀가 있고, 순박한 나무꾼이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출입금지 선을 넘어 계곡으로 내려가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조물주의 신비한 손길이 느껴지는 계곡의 암반은 십이선녀탕을 지나오는 동안 어디 하나 빈틈이 없어 보인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길에 오로지 홈이 파인 열두 개의 목욕탕만이 보일 뿐이다.

대청봉 단풍이 졌다고 한다. 그러나 대청봉 주변을 제외한 설악산 전체가 목하 '만산의 홍엽'이다. 10월의 중순, 장수대에서 십이선녀탕을 오르는 길 역시 온 산이 붉고 노란 단풍으로 한바탕 난장을 벌이는 중이다. 단풍길을 걷다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이 서린 옛이야기 한편 보탠다면 이 가을이 더욱 풍요로울 것임은 두말할 나위 없겠다.


#설악산#장수대#십이선녀탕#단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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