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8일, 경남 창원에서 열리는 람사르 협약 당사국 총회를 기념해 국토해양부가 주최하고, (사)녹색습지교육원이 주관한 '범선 타고 느끼는 아름다운 연안습지' 행사가 지난 16일부터 20일까지 4박 5일간 열렸다. 12:1의 경쟁률을 뚫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20여명의 범선 표류기(?)를 싣는다. [편집자말] |
"범선 생태여행 취재 한 번 해 볼래요?"
짙어가는 가을, 새로운 떠남의 목적지를 고민하던 중 얼떨결에 받은 제안으로 여행은 시작되었지.
10월 말 한국에서 열리는 람사르 총회 홍보를 위해 국토해양부가 주최하고, ㈔녹색습지교육원이 주관하는 연안습지 탐방 프로그램이었어. 무엇보다 차도, 비행기도, 걸어서도 아닌 돛으로 가는 배(범선)를 타고 여행한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지.
어릴 적부터 항해에 대한 낭만을 품고 있었어. 배를 타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 파도를 가르고 노를 저으며 땀방울을 흘리는 것, 망망대해 위에서 새카만 밤 하늘 별을 바라보는 것, 기타 등등.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지.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새벽 5시 20분 용산 발 첫 기차를 타야했어. 잠들지 않기 위해 밤새도록 색연필을 깎으며 정신을 추슬렀지. 비몽사몽으로 여수에 도착하여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누었어. 전국에서 12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온 이들이었지.
직접 신청서를 작성하고 홀홀단신으로 참가한 초등학생부터 지긋한 연배의 할아버지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어. 주최 측 이야기를 들어보니 참가자 선정의 제1요건은 바로 다양성이라 하더군.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앞으로 4박 5일을 관통하는 주제와도 닿아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어.
4박 5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이야기
선착장에 조심스럽게 닿아있던 배는 생각보다 아담한 모습이었어. 바다 빛깔 푸른 배에는 네 개의 돛대가 하늘을 찌를 듯 뻗어 있었지. 이리저리 둘러보며 배를 구경하는 사이 뭍의 아파트촌은 점점 멀어지고, 눈앞에 사방 점점이 늘어선 섬 사이를 여유롭게 떠가고 있었어.
남해는 진정으로 '다도해'라는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어. 이름 모를 수많은 섬들이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었고, 그 위로 자란 나무들은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예쁘게 섬을 치장하고 있었어. 잔잔한 바다 위로 부서지는 햇빛은 은빛 물결을 반짝이고 괭이 아니면 재갈매기가 날개를 펴고 유유히 비행하고 있었지.
배 위의 생활은 단조로웠어. 예상 외로 부과되는 뱃일(?)은 거의 없었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거나 낚싯대를 드리우고,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등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었어.
언제 목적지에 도착한다든가 조밀하게 분 단위로 짜인 일정도 없었어. 그저 바람이 배를 이끄는 대로, 마음이 우리를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것일 뿐이었어. 서편으로 기우는 햇빛 아래 선두의 삼각돛이 드리운 그늘에 누워 요람처럼 상냥한 움직임을 느끼며 잠들었지.
생활 역시 자연에 가까워졌는지 몰라. 4박5일 내내 겉옷 한 번 갈아입지 않고 입은 채로 잠들고 깨는 일을 반복했어. 누우면 어깨가 딱 닿고 머리부터 발끝 길이를 잰 것처럼 들어맞는 침대에서는 그저 일자로 누워 틀어박힌 듯 잠들었지. 건강하고 맛있는 세 끼니 식사는 희한하게 생존을 위한 섭취에 가까웠어.
당신에게 습지는? 어머니의 품이지요
이 여정의 본 목적은 바로 이번 10월 28일부터 경남 창원에서 열리는 제10차 람사르협약 당사국총회를 위한 것이었어. 지구의 습지지역 보전을 위한 국제협약인 람사르협약은 환경올림픽이라고 불리기도 한대.
습지란 간단하게 물이 있는 땅이라고 할 수 있어. 산골짜기 물댄 논부터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에 광활하게 분포한 갯벌까지, 습지의 유형은 다양했어. 그 가운데에서도 이번 범선 탐방에서는 연안습지, 즉 갯벌을 바다에서 바라보는 시각적 전환을 꾀하고 있었어.
한국은 세계 5대 갯벌을 보유국가라고 해. 그런데 돌아보면 그동안 다양한 방조제와 간척사업이 진행되었어. 쓸모없는 땅(개발을 원하는 사람들이 볼 때)을 일구어 농사를 짓고 공장을 세운다는 발상은 갯벌에 대한 보전가치보다는 이용가치를 중시하는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최근 들어 습지 자체가 가진 환경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커지면서 환경선진국이라고 일컫는 나라에서는 보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해. 그리고 이러한 습지보전을 위한 국제적 협약이 바로 람사르 협약이야.
그렇지만 도시 소시민의 한 사람인 내게는 여전히 깊게 와 닿지 않는 부분이었어. 그래서 궁금한 마음으로 여정 가운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지. '당신에게 습지란 무엇입니까?' 하고 말야.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그는 남해의 바닷바람에 이런 이야기를 실어 전해 주었어.
"제게 습지는 어머니의 품입니다. 인간 역시 물, 양수에서 태어납니다. 종의 발전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물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땅이 바로 습지가 아닙니까?"배에서 내려 몇 군데의 섬을 무심코 거닐 때였어. 드러난 갯벌 한가운데에서 허리를 구부린 채로 물것을 잡고 있는 섬 주민을 볼 수 있었지. 그리고 사방에 앉아 열심히 먹이를 먹고 있는 새들이 있었어. 바다에서 난 것들을 모아들여 자기 새끼들을 길러내는 어머니의 생명력은 이렇게 갯벌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어.
생태와 삶, 선상에서 화두를 풀다
하루하루 선상생활이 이어질수록 희한하게 멀미는 더해지고 견디는 일이 쉽지 않았어. 밝은 얼굴로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 사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충돌이 생기기 쉬운 환경이었어.
그럼에도 마지막 날 밤 선상에 펼쳐놓은 석별의 정은 떠남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서로를 다독이고 새로운 인연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지.
남도의 고요한 모래섬, 갑판 위에 누워 바라보았던 마지막 밤의 새카만 하늘과 별빛 그리고 반달은 오래 기억에 남을 거야. 배가 기울 때마다 일주운동하듯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던 그 애들은 내가 여정의 화두를 풀어가는 것을 가만히 들어주었어.
'생태란 무엇일까? 그리고 삶에 대해 편해지는 것은 무엇일까?'너무 복잡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저 남해 연안을 느릿느릿 떠가는 돛단 배 위에 몸을 누이고 종이 울리면 밥을 먹고 남은 음식을 바다에 뿌리고 다음 종소리를 기다리며 요람처럼 흔들거리는 배 위에서 습기 머금은 바람 내리쬐는 태양을 느끼며 '있는' 것, 책을 넘기거나 사진을 찍거나 기도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멍하게 있는 것. 생태, 그리고 삶에 대해 편해지는 것은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어.
20일, 마지막 날 아침 일행들과 헤어져 모래섬 사도에서 내려, 4일간 삶의 장이 되어주었던 범선에게 인사를 건네는 기분은 시원섭섭하기도 했어. 배에서 내린 지 오래이건만 내 몸은 여전히 혼자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며 땅 멀미를 하고 있어. 바다의 유유자적함에서 도시의 속도전에 다시 익숙해지려면 아마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덧붙이는 글 | 범선 탐험대의 4박 5일간의 주요 일정.
2008년 10월 16일 목요일
여수 출항 → 청산도 입항
2008년 10월 17일 금요일
청산도 출항 → 서거차도 입항
2008년 10월 18일 토요일
서거차도 입항 → 조도 방문 → 완도 입항
2008년 10월 19일 일요일
완도 출항 → 사도 입항
2008년 10월 20일 월요일
사도 출항 → 여수 입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