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이보다 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게 라면 부산물을 가공해 만든 '라면땅'과 '뽀빠이', '손오공', '자야'였다. 밋밋한 건빵 맛만 보았던 아이들에게 바삭바삭한 라면 부스러기에 설탕을 가미한 이런 과자들은 대히트를 쳤다. '뽀빠이'는 포장지 사건으로 유명해졌다. 비닐 포장지의 바탕색이 붉은색이고 뽀빠이 그림 팔뚝에 그려진 닻이 낫과 망치 모양이었다. 바탕색이 '빨갱이'를 연상시키고 닻 모양은 옛 소련 국기와 닮았다는 루머가 나돌았다. 결국 회사 측은 색깔과 도안을 바꿀 수밖에 없었는데 냉전시대의 웃지 못할 사건이었다. - 책 속에서
공책 한 권, 라면 한 봉지 달랑 10원이라 10원 하나로 살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았던 시절인 1960년대, 요즘은 천덕꾸러기가 된 10원을 '달랑 10원'이 아니라 군것질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대접받는 돈이라고 저자는 이 글 '추억의 군것질거리'에서 적고 있다.
저자의 글을 읽는 동안 10원 하나로 사먹던 내 어린 시절의 군것질거리들이 떠올랐다. 한나절 내내 입속에서 굴려도 줄어들지 않던 하얀 '독(돌)사탕'도, 딱딱하고 커다란 고구마과자도 떠올랐다.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추수밭 펴냄)은 지난 20세기 우리 사회를 이끌었던 것들, 25가지 키워드로 본 우리 문화, 우리 풍속, 우리 생활사다.
25가지 키워드에 들어있는 것들은 군것질거리, 골목길놀이, 쥐꼬리와 채변봉투가 있던 학교생활, 단발과 파마와 장발, 통금단속, 양장과 미니스커트와 청바지, 냉장고와 전기밥솥, 전화와 공중전화, 다방과 통기타와 마담, 그리고 기생, 텔레비전과 라디오, 목욕탕과 사진관과 이발소 풍경, 소풍과 운동회, 장터와 명절 등 30대 후반이나 40대 이상이라면 특히 많이 공감할 것들이다.
우리나라 첫 고무신은 순종임금이 신었다고무신은 1908년부터 일본에서 수입되었다. 최초의 우리나라 고무신 메이커는 '대륙고무'다. 한말 법무대신을 지낸 이하영(李夏榮)이 1919년 설립했다. 대륙고무의 첫 제품은 1922년 순종이 신었다. 그 밖에도 김성수(金性洙)는 중앙상공주식회사(1921)를 창업했고, 전주에는 만월표 고무신 공장(1932)이 세워졌다. 남자의 고무신은 짚신의 형상을 딴 것이라고 한다. 인천에서 개발된, 바닥은 고무이고 윗부분은 베로 덮인 '경제화'를 모델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자 고무신은 일본의 고무신 모양을 땄다고 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전총 꽃신을 닮았다. 고무신은 일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지만 한국형으로 개발돼 한국에서 더 큰 인기를 얻은 신발이다. - 책 속에서고무신은 처음부터 서민들을 위한 신발이었거니 당연하게 생각하던 터라 '순종 임금이 우리나라 첫 생산 고무신을 신었다?'란 사실은 작은 충격이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고무신의 위상(?)과 우리 생활 속 절실한 비중에 대해 읽다보면 쉽게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지금이야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간혹 신지만 고무신이 첫 생산되던 1920년대, '고무신을 살돈이 없는 아이들이 고무신을 훔쳤다가 몹시 맞았다'는 기사까지 종종 실렸으며, 게다가 1920년대 중반에는 '고무신 전문 절도단'까지 기승을 부렸다니 말이다.
"이른 새벽 통근차 고동 소리에 고무공장 큰아기 벤또밥 싼다. 하루 종일 쭈그리고 신발 붙일 제 얼굴 예쁜 색시라야 예쁘게 붙인다나. 감독 앞에 해죽해죽 아양이 밑천 고무공장 큰아기 세루치마는 감독나리 사다준 선물이라나"- 노래 <고무공장 큰아기>게다가 이와 같은 <고무공장 큰아기>라는 노래까지 직공들 사이에 유행할 정도로 고무신과 고무신 공장은 많은 사람들의 화제 속에 있었다. 당시의 모 신문은 '앉은 채로 12시간, 고무신 직공의 노동'이란 르뽀를 내보내기도 했지만 열악한 환경임에도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고무신 공장은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어린사절의 추억 두곰두곰 "이 책 읽으며 웃을 사람 참 많겠다!"
25개 키워드속 숨어있는 사실들 |
▲호떡·풀빵·떡볶기는 언제부터?▲1970년대의 마호밥통▲교련과 국민교육헌장에 얽힌 이야기들▲한국 최초의 여기자는 <조선일보>의 최은희가 아닌 <매일신보>이각경 부인기자▲자야와 백석의 사랑▲첫 조선인 미용실을 연 미용사 오엽주▲파마는 언제부터?▲최초의 여의사는 박에스더 ▲서양식 교복을 제일 처음 입은 학교는 1896년 배재학당 ▲2007년은 브래지어 100주년▲1949년 양복 한벌 12만원, 대통령 월급은 15만원▲한국 최초의 양복점은 한흥 양복점(1903)▲판탈롱은 명동 엘리제 양장점 양금철이 처음 입었다?▲외국인 장방족 입국불허소동▲가장 화려했던 고팅과 나체팅과 희한한 미팅들, 보드카와 옥킹조카▲금지곡이 금지된 이유들▲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첫다방은 까까듀(1927)▲선술집과 목로주점의 유래▲국내에 맥주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5년 일본의 기린맥주▲20세기 최고의 애주가는 수주 변영로, 그 웃지못할 에피소드들▲우리손으로 만든 최초의 담배는 승리(1945)▲한해 20억갑이 팔린 담배 '솔'▲담배는 왜 어른 앞에서 못 피울까?▲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도 노름에 빠졌다?▲조선의 왕등과 내시, 종친들도 노름을 즐겼다?▲성종 21년(1490)궁궐에서 도박을 하다 불까지 냈다?▲우리나라 최초의 라면과 지난 역사▲미원과 미풍의 조미료 전쟁▲우리나라 치약과 칫솔 유래▲관리인이 지켰던 1954년의 첫 공중전화▲한국인 운영 최초의 이발소는 동호이발소(1901)▲남대문시장·동대문시장의 역사▲'밥통도 못만드는 밥통들'이 6개월동안 뭉쳐 만든 국네 첫 전기밥솥? |
나의 유년기도 얼마간은 고무신과 함께 한다. 그때 우리들이 자주 신었던 것은 '진짜표'와 '말표'.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발에서 그다지 어긋나지 않는 치수의 고무신을 사다주셨는데 손가락 한 마디나 남아도는 크기의 고무신을 헐떡거리며 신는 애들도 몇은 있었다.
발길이만큼 새끼줄을 끊어와 고무신을 사가는 사람들도 장날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이런 고무신을 내가 마지막으로 신었던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직전, 210문으로 기억한다.
4일과 9일에 열렸던 원평장(오일장)날 2살 터울의 동생과 나란히 사준 그 고무신은, 하지만 새 고무신의 뽀득한 느낌이 사라지기도 전 어이없게 도난당하고 말았다.
청소를 하면서도 잘 있나 확인하던 새 고무신은 학교가 파하고 친구들이 반쯤 빠져나간 그즈음, 크기도 턱없이 크고 뒤꿈치가 찢어져버린 것으로 둔갑해 있었다. 내 번호에 신지도 못할 만큼 찢어진 제 고무신을 놓고 새 고무신을 가져간 친구는 누구였을까? 지난 날 가끔 그 친구가 궁금해지곤 하던 터였다.
낡았지만 버리기 아까워 집에서 신기로 했던 고무신을 여름 내내 신으며 고무신 도둑을 참 많이 미워했었다. 개학을 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새 고무신을 사줄 기미조차 없는 부모님은 추석을 앞둔 어느 장날 발등에 두 줄이 그려진 운동화를 사다 주셨다. 220문짜리 분홍색 운동화, 220문짜리 하늘색 동생 운동화. 이것이 운동화와의 첫 만남이다.
외에도 고무신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떨어지면 송곳으로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어 신던 고무신, 뒤꿈치를 발랑 까서 요즘의 슬리퍼처럼 신고 다니다 쉬이 닳는다며 어른들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냇가에서 놀다 올챙이나 송사리를 잡아 오기에 좋고 비오는 날 흙탕물을 채워 넣고 풀떡거리기에 좋은 것 또한 이 고무신이었다.
이런 추억이 몹시도 그립던 어느 날 마침 시골 장을 지나다가 고무신 한 켤레를 사서 연필이며 작은 메모지 등, 자질구레한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통으로 쓰고 있다. 첫애가 첫걸음을 뗀 후 걸음마를 배울 때 사주기도 했다(요즘에는 하얀색을 비롯하여 여러 색깔의 유아용 고무신이 많이 나온다. 내 경험으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들에게 고무신은 썩 좋다).
책으로 세우는 우리의 20세기 생활사 박물관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를 통해 내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고무신만이 아니다. 저자가 들려주는 한 꼭지 한 꼭지의 이야기들은 녹록하지만 내 어린 시절에 함께 했던 소중한 것들이라 이 책을 읽는 동안 참 많은 것들이 떠오르거나 그립거나 했다. 이 책은 모두 4부. 앞서 '25개 키워드'라고 했지만 사실 주인공은 이보다 훨씬 많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것들을 관련지어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고무신과 관련지어 만나는 이야기들은 국내 첫 양화점과 당시의 신발가격, '베구두', 혹은 '베신'이라고 불렀던 국내 첫 운동화(1921), 부산의 신발 공장들의 흥망성쇠, 서양식 버선인 양말의 역사, 광주 지역의 유지 12명이 독립자금을 마련코자 설립한 국내 최초의 양말 공장과 무등 양말(1935) 등.
학교 앞이나 골목 등에서 흔히 보던 당시의 흑백 사진들 역시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는다. 아마 나처럼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저자의 이야기 따라 지나가버린 시절 속의 물건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만나는 동안 그것들을 많이 그리워하리라. 그리고 배시시, 혹은 빙그레 웃기도 하리라.
내고무신을 바꿔치기해간 그 친구가 만약 이 책을 읽는다면 그때를 떠올리며 배시시 웃었으면 좋겠다. 그때야 눈앞이 노래져 몇 날 며칠을 신발을 찾아 헤맸지만 흐르는 세월 속에 '오죽했으면 그랬을까'의 연민으로 바뀐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에.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세월은 추하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추억으로 바꿔준다. 과거는 잊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지난 삶을 밝은 추억으로 곱게 되새겨서 교훈으로 삼을 수 있는 귀중한 유산이다. 불행히도 과거의 생활 모습은 기억으로 밖에 남아있지 않다. 최근에 민간 차원의 생활사 박물관들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 생활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물품을 보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이유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몇 십 년 전, 또 그보다 이전의 삶을 되돌아보고자 했다. 미래를 비추는 한줄기 빛을 쫓으며 암울함을 견뎠던 그 시절로 되돌아 가 보았다." - 저자의 말 중에서 덧붙이는 글 |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손성진 씀/추수밭 펴냄/2008.10/1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