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축제처럼 관공서나 기획사, 지역의 유력자 몇 명이 주도하고 만드는 축제가 아니다. 단순히 준비된 행사들을 눈요기하고 즐기는 관광축제도 아니다. 힘있고 '빽' 있는 유명인사들 소개와 축사로 시간 까먹고 시민들 짜증나게 만드는 그런 축제도 아니다.
이 축제는 마을주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합해 만들어 간다. 지역민들이 행사에 필요한 모든 재원과 살림을 십시일반해서 꾸려간다. 각 마을에서 선출된 행사 실행위원들이 매주 한 곳에 모여 회의와 민주적인 합의를 거쳐 이 축제를 기획하고 연출해간다.
행사 진행도 서툴다. 공연장은 시골장터처럼 왁자지껄하고 투박하다. 하지만 웃음이 있고 따뜻하고 푸근한 정이 넘쳐난다. 시래기 된장국처럼 가슴을 시원하고 얼큰하게 만들어 준다. 이것이 곤명면 마을주민들이 어떤 때는 행사 진행자로, 관객으로, 때로는 공연자로 서로 만나고 어울려 즐기는 '밝은땅 다솔축제' 모습이다.
관계자는 주민 100%, 이런 축제도 있네
주민들이 축제의 연출자가 되고 주민들이 관객이 되고 주민들이 무대의 주인이 되는, 주민들이 기획하고 진행하고 참여하며 신명을 푸는 축제, '주민을 위한 주민에 의한 주민의' 축제가 '밝은땅 다솔축제'다.
지난해 10월 경남 사천시 곤명면 25개 마을주민들이 힘을 합쳐서 가을철 수확의 기쁨과 즐거움을 나누고 사라져 가는 이웃간의 따뜻하고 소박한 정을 되살리자는 취지로, '곤명사람들아 함 놀아보자'라는 주제로 '밝은땅 다솔축제'를 만들었다. 딸기, 고추, 부추, 단감 등 농사를 짓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놀이축제까지 농사 짓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8일 곤명운동장에서 2주년을 맞은 '밝은땅 다솔축제'는, 25개 마을 동네이장들로 구성된 준비위원회와 곤명면을 동부·서부·중부 각 세 곳으로 나눠 선발한 18명의 젊은 실행위원들, 행사 개최를 위해 필요한 재원 마련에 금전과 현물로 동참한 마을주민 200여명으로 구성된 추진위원들 그리고 당일 행사에 참석한 1000여명의 곤명면 마을사람이 모두 힘을 합해 만들어 냈다.
'밝은땅 다솔축제'는 각 마을에서 선발된 30대~50대의 젊은 실행위원들(위원장 오태환)이 실질적으로 추진했다. 실행위원들이 25개 마을 구석구석을 돌며 행사재원을 마련했다. 시골 할머니들은 주머니에 소중히 보관했던 천원짜리 만원짜리 쌈짓돈도 꺼내고, 키우던 돼지도 내놓고, 심지어 따놓은 과일과 떡도 내주었다. 액수에 관계없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현금이나 선물 등으로 행사재원 마련에 동참한 사람들은 모두 추진위원이 되었으며, 작년과 올해에 곤명면 1500여가구 3300여명 인구에 200여명이 추진위원으로 등록하였다.
18명의 실행위원들은 매주 월요일 8시 원전마을에 위치한 이득상(52) 상임위원장의 사무실에 모여 축제준비에 관한 회의를 열었다. 농번기로 바쁜 철이지만 1~2명 빼고 다 모였다. 곤명면 작팔리에 위치한 마당극 전문극단 '큰들'에서도 주민으로서 2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저녁에 모이는 까닭에 주로 밥과 차를 먹고 마시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의견을 나누었지만 토론은 자유롭고 거침없었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면 미참석자에게도 회의 결과를 통지하고 의견을 듣는 절차를 거쳤다.
실행위원들은 회의가 끝나면 약주도 하면서 농사 정보도 교류하고 일상적인 잡담도 나누었다. 평소에 얼굴 정도만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매주 한 번씩 이런 만남을 통해 서로를 알게 되고 친해졌다.
"너거 정치적인 욕망 있는 거 아이가" 오해도 받아
처음 이 축제를 시작했을 때 민간 주도의 자발적 행사에 익숙하지 않은 동네의 높으신 어른들, 지도자급 사람들이 이를 삐딱하게 생각해 뒷짐지고서 '너희들이 어떻게 하나', '너희들끼리 잘되겠나' 하는 마음으로 행사에 동참하는 것을 꺼렸다.
'실행위원들 너거 정치적인 욕망있는 거 아이가'라는 말을 들을 때도, '이거 깜짝 축제지 오래 가겠나'라는 말을 들을 때도, '극단 큰들 꾐에 빠져 거기만 좋은 것 시키는 것 아이가'라는 말을 들을 때도 인내를 갖고 지속적으로 축제의 의미와 목적을 설명하고 이해시켰다.
동네 원로들과 함께 가자는 생각으로 이분들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만남과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이분들이 실행위원들의 뜻을 이해해주고 여러 가지 행사 추진에 필요한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었다. 마을 사람이면 누구든 함께 보듬고 가겠다는 실행위원들의 따뜻한 생각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한 것이다.
엄마 아빠는 풍물, 아이들은 댄스 축제 당일에는 준비위원회 임원들과 마을 젊은이들은 바빠진다. 행사 당일 조기축구회를 중심으로 차를 가진 마을의 젊은이들이 '쌩~' 하니 먼지를 일으키며 '할머니, 아저씨, 형님' 하며 동네 곳곳을 돌며 주민들을 행사장으로 인도했다.
올해는 관광버스회사를 경영하는 곤명 출신 사업자와 서포면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분이 지원해 준 버스 2대도 함께 운행했다. 버스는 골짜기 동네인 삼정, 옥동, 마곡, 송림, 구물과 추동, 신산, 조장, 오사, 원전, 초량 마을을 순회하며 사람들을 태우고 날랐다. 마을 부녀회는 음식을 준비하고, 실행위원장도 주차를 담당하고, 출향 인사들 안내는 상임위원장이 담당했다.
마을주민들은 행사준비 뿐만 아니라 당일 공연에도 직접 참여했다. 축제 사회자는 곤명면 송림마을 이장인 강위관(47)씨가 맡았다. 행사 진행이라고는 전혀 경험이 없는 순수 아마추어다.
작년에 처음 사회를 맡았을 때 무대로 뛰어나와 "안녕하십니까"까지는 잘 하다가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되니까 긴장해서 말도 더듬고 진행순서도 뒤바꾸고 발음도 꼬이고…. 보다 못한 주민들이 힘내라고 쳐주는 박수를 받기도 했다. 올해는 행사 당일 저녁에 집에서 키우던 엄마소가 새끼 숫소를 낳아서 그런지 작년보다는 헐씬 나은 진행을 선보였다.
부부로 구성된 곤명풍물패의 '덩덩~쿵' 신나는 사물놀이도 무대에 올랐다. 곤명면 농가주부모임에서 취미교실로 시작된 풍물패는 남성과 여성, 30대에서 60대까지 25명의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원들은 면사무소 2층에서 모여 1주일에 2번 2시간씩 풍물을 연습했다. 곤명풍물패는 정월대보름날 곤명면 지신밟기 행사와 사천시 타악축제에도 출전하고, 인근면에서 초청받기도 하는 등 나름 이지역에서는 유명하다.
풍물패에서 꽹과리를 치는 이현순(43)씨는 "처음에는 어렵고 힘들더라. 가방끈도 짧고. 집에 가면 무릅치면서 장단 맞추고, 일하면서 비닐하우스에서도 두드리고 치고. 이제는 아들 딸도 함께 배운다"며 곤명풍물패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풍물패로 삼정리에 사는 강보석(46)씨는 "4년 전 각시따라 풍물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온 가족 4명이 다 풍물을 친다. 집에서 아이들, 부부와 대화가 된다. 단절이 안 된다. 아이들 마누라와 다툼이 없다. 뭔가로 싸울 것 같으면 화제를 풍물로 돌리면 조용히 넘어간다.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연습하고 긴장하는데 이렇게 공연을 끝내고 나면 풍물 치는 수준이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 같다"며 1000여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을 하니 참으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완사초등학교 학생들도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3학년에서 6학년 10명으로 구성된 완사초등학교 댄스팀(일명 '지니어스', 지도교사 최미연)은 경남 어린이 학·예술 무용대회에서 최우수상 수상, 전국댄스스포츠 선수권대회 포메이션부 최우수상을 수상한 실력있는 어린이 댄스팀이다. 공연이 끝난 후 아이들은 5월부터 갈고 닦은 자신들의 실력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님 앞에 보여주니 "감격스럽고 자신들이 자랑스럽다"며 좋아했다.
댄스팀으로 무대에 섰던 완사초등학교 6학년 조소영 학생은 "춤을 추면서 척추도 바르게 되고 뱃살도 빠졌어요. 허벅지 살은 늘고요. 장딴지에 알이 배었어요"라며 해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아이들도 "아저씨 기사에 제 이름 안 적어주면 미워할 거야"라며 재롱을 떨었다.
또 가을밤의 정취를 더해준 지리산팝스오케스트라의 멋지고 황홀한 연주, 진주MBC 라디오 즐거운 오후2시 '도전 딩동댕'을 진행하고 서경케이블 방송에서 노래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지역가수 한빈씨의 즐겁고 신나는 트로트 메들리 열창, '큰들'의 농민마당극 <밥상을 엎어라>와 흥겨운 민요 등 다양하고 푸짐한 볼거리와 즐거움이 제공되었다. 지역민들과 전문공연인들의 잘 조화된 어울림이 축제마당을 한층 신명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공연이 모두 끝나고 주민들과 공연자들이 함께 어울려 뛰고 춤추며 신나게 어울려 놀았던 마지막 대동놀이 한마당 순서가 백미였다. 대동놀이가 끝나고 미리 준비된 삶은 돼지고기와 두부, 김치로 배고픔을 채우고 컬컬한 막걸리 한사발을 '쭉~' 들이킬 수 있었으니 볼거리와 놀거리, 먹을거리까지 삼박자를 고루 갖춘 곤명사람들의 '밝은땅 다솔축제'는 그야말로 최고의 축제였다.
가슴 찡한 공연 한자락, "밥상을 엎어라"
멀리 지리산 밑 하동 청학동에서 지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구경왔다는 문도점(38·여)씨는 "마당극 <밥상을 엎어라>가 정말 재미났다. 마당극 배우들이 연예인들보다 연기가 좋았다. 현실을 잘 반영하고, 관중과 함께해서 좋았다. 극중에서 우식이가 빚에 딱지 붙여지는 장면 보고 눈물이 났다. 농촌 현실이 그렇다. 눈물이 나고 슬펐다. 기쁜 것은 잠깐이고 그게 감동 깊었다. 농민들 아픔을 헤아렸다. 농민들은 바닥을 기고 있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임금도 낮고. 이거 보고 속이 시원했지만 뒤로는 슬펐다"며 충혈된 눈에 눈물을 글성거렸다.
작년에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700~800명이었으나 올해는 900~1000명으로 더 늘었다. 올해가 작년보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였고 내용도 다양하고 재미났다. 지루함도 흐트러짐도 없었다. 자리를 뜨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트로트도 농민들과 흥겹게 잘 어울렸다. 행사도 별다른 문제 없이 술술 잘 진행되었다. 주민들과 전문공연가들이 적절히 조화되어 풍요로운 축제가 되었다. 뒷풀이로 술과 돼지고기를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정답고 좋았다.
이상득(52)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장은 행사가 끝난 후 "날씨가 요 며칠 추워서 걱정했는데 다행이 오늘 날씨가 풀려서 좋았다. 오늘은 대성황이다. 계획대로 잘 진행된 것 같다. 이제는 홀가분하다"며 행사 결과에 만족하면서도 "농민들이 어렵다. 올해 풍년으로 생산량은 늘어났는데 벼, 과일, 채소 등이 제값을 못받는 상태다. 생산부대경비는 더 올랐다. 비료, 기름, 농자재가 대폭 인상되었다. 소작물은 폭락했다. 농민들 마음, 근심, 고민이 많다"며 이번 축제를 통해 이런 마음의 상처가 아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곤명면에 자리잡은 공연단체로서, 주민의 일원으로서 자신들의 마을에서 개최되는 문화행사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단원 2명을 축제실행위원으로 파견해 마을주민들이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만들어 가는데 도움을 주었던 극단 큰들의 전민규(44) 대표는 이번 축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행사가 쉽게 술술 진행되는 것은 처음 봤다. 일하는 사람도 즐기면서 일하고, 즐기면서 공연하는 곳은 없다. 진행자도 공연하는 것 보고 웃고. 이게 공동체의 힘이다. 국회의원이 와도 인사만 하고 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하는 것으로 끝내고. 이런 것 처음 봤다. 이런 축제라야 기분이 '업'된다. 보통은 행사가 끝나고 다들 지치고 잠수 타는데 이 축제는 인근 동네에 좋은 영향까지 줬다. 축제문화에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추진 하니까 새로운 문화가 나오는 것이다."
주민들이 축제의 연출자가 되고 주민들이 관객이 되고 주민들이 무대의 주인이 되는, 주민들이 기획하고 진행하고 참여하며 신명을 푸는 축제, '주민을 위한 주민에 의한 주민의' 축제인 '밝은땅 다솔축제'가 새로운 축제의 대안으로 자리 잡는다면…. 희망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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