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3년 링컨대통령의 노예해방선언 이후 137년 만에 미국에서 흑인대통령이 탄생하였다. 비록 오바마가 노예로 미 대륙에 끌려온 흑인 노예의 후손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흑인의 사회적 위치는 노예로 시작한 것이었으니 실로 역사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노예의 신분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일하는 조선족과 동남아 이주노동자의 인권은 노예와 다를 바 없기도 하다는 대한민국에서 과연 언제쯤 이들 출신 대통령이 과연 나올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그 의미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 흑인뿐만 아니라 이들의 선조라 할 수 있는 아프리카 대륙 흑인들까지 감격스러운 순간이겠지만, 비록 이 세상에는 없지만 그 어떤 누구보다도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과 말콤 엑스(Malcolm X)다.
흑인과 백인이 같은 버스를 탈 수 있고(1956년), 고등학교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고(1957년), 흑인들이 선거를 하려면 문자해독시험을 치르거나(1965년), 흑인들만 선거세금을 내지 않고서도(1966년) 투표에 참여할 수 있기까지는 이들의 투쟁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괴한의 총탄으로 세상을 떠난 방식은 같았지만, 살면서는 흑인인권운동의 방식으로 대립했던 두 사람이기도 했다. 백인과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 양보함으로써 흑백통합을 통해 문제 해결을 주장했던 킹 목사와는 달리, 같이 버스에 타고, 학교 다니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화해의 조건이라면서, 흑인 스스로의 자부심을 갖고, 독립할 수 있는 기반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며, 흑인은 흑인끼리 분리되어 자치구로 살아도 된다는 서로의 입장 차로 반목했던 두 사람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증오와 폭력을 영원한 망각의 강에다 버리고, 비폭력으로 살아 남아서 합법적인 투쟁으로 더 많은 진보를 이루자고 했고, 말콤 엑스는 자신은 언젠가 백인이나 백인이 사주한 흑인의 손에 죽을 것이라며 그 누구와도 타협을 거부하고 직선적이고 호전적으로 투쟁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결과적으로 누구의 노선이 더 옳았는지를 떠나서, 두 사람이 흑인인권운동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시작은 흑인인권운동(Black Civil Right’s Movement)이었지만, 오늘날 미국에서 여러 인종이 제 목소리를 내며 살아나갈 수 있기까지에는 이들의 처절한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백인들조차도 흑인대통령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대 흑인인권운동을 통해 백인들의 지지와 존경을 이끌어낸 마틴 루터 킹의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미국 내의 인권상황은 유엔에 고발해야 할 지경인데도, 왜 남의 나라 인권을 논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고 있냐는 말콤엑스의 독설은 그가 살해된 지 50여 년이 지나도 유효한 듯 하다.
민주화와 인권문제 해결에 목숨을 바쳤던 위대한 흑인인권지도자 두 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서, 결혼과 생계를 위해 이주한 다문화가정이 사회의 소외계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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