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사랑)의 세례를 받다
11월 1일 숙명여대 '씨어터 S'에서 <뮤지컬햄릿>을 봤다. 이제까지 수많은 <햄릿>이 연극이나 영화, 뮤지컬로 상연됐지만 원작 <햄릿>의 난해함 때문에 쉽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뮤지컬 원작자인 야넥 레데츠키도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드라마를 음악을 통해 만든다는 도전은 정말 누구에게든 쉽지 않은 작업이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번 공연의 정식 명칭은 <뮤지컬 햄릿 월드버전>으로 1999년 체코 프라하에서 최초로 상연했다. 당시 평단은 "유럽의 선율 속에 가장 잘 표현해 낸 작품"이라는 찬사와 함께 연일 만원 세례를 이루었다. (1천만 관객 동원) 2003년 브로드웨이를 평정하고 2008년부터 아시아 원정에 나섰는데, 그 첫 번째 무대가 바로 한국 공연이다. 2010~2012년에는 도쿄, 북경 등 릴레이 공연을 가질 예정이다.
<뮤지컬 햄릿 월드버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에로스'다. '난해'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있는 원작에 비해 훨씬 대중적이고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주제의 전환이다. 에로스를 살리기 위해 뮤지컬 작가는 찬탈자 클로디어스 왕의 거트루드 왕비에 대한 사랑을 부각시켰고, 햄릿과 오필리아의 연인 관계를 무척 강조했다.
아버지 왕의 스토리를 첨가한 것도 극의 개연성을 높였다. 즉 거트루드 왕비는 왕과의 부부관계에 심각한 애정결핍을 느끼고 있었으며,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클로디어스 왕(왕족의 신분이었을 때)에게 호감이 느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아버지 왕에 의해 목격되고 클로디어스는 추방을 명령받는다.
나라를 떠나지 않을 경우 '육체의 죽음'을 감당해야 하며, 나라를 떠났을 경우는 '사랑의 죽음'을 맞아야 하는 고뇌에 빠진 클로디어스가 왕을 살해한 것은 '심정적'으로는 정당방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것이 에로스의 첫 번째 세례다.
두 번째 에로스의 세례를 받은 것은 오필리아다. 원작에서는 광기에 빠진 햄릿에 의해 조롱당하고 이용만 당하던 오필리아가 뮤지컬에서는 햄릿의 당당한 애인으로 탄생했다. 사실 원작에서도 오필리아가 함의하는 문제는 중요하지만 주로 오필리아의 '불행'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뮤지컬 햄릿에서도 오필리아가 행복해지지는 않지만, 오필리아는 햄릿의 애인으로서 잠시나마 햄릿의 사랑을 얻고, 죽은 뒤에 햄릿의 추모를 받아볼 수 있었다.
햄릿의 고뇌 제대로 표현 안 된 점 아쉬워...
이를 통해 볼 때 원작 햄릿이 강렬하게 내뿜던 사색적인 메시지는 사랑이라는 달콤한 유액에 녹아버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뮤지컬 햄릿은 인생의 고뇌와 난해를 에로스와 로망으로 변환했기 때문에 햄릿의 절대적 비중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클로디어스와 오필리아의 캐릭터가 강화된 지점은 햄릿의 캐릭터가 약화된 지점과 정확히 일치한다.
<원작 햄릿>은 아버지 유령이 자신을 시해한 범인을 지목했음에도 햄릿은 막연하게 '더러운 짓'을 한 데 대해서 좀 더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확실한 증거가 나왔음에도 어머니에 대한 가해 욕구에 사로잡힌다. 햄릿이 아버지를 시해한 클로디어스를 더 미워했는지 클로디어스를 너무나 빨리 받아들인 어머니 거트루드를 더 미워했는지 알 수 없다. 햄릿은 난세를 당해 자신의 운명을 뿌옇게 만든 '불확정성'과 미처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행동 불능성 사이에서 우울과 자책, 그리고 광기가 더해간다.
뮤지컬 햄릿에서는 이런 햄릿의 특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않았다. 뮤지컬에서는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 회피하거나 과감하게 복수를 하기보다는 난해 그 자체를 견디면서 스스로 망가져가는 현대적인 인물이자 예술정신의 담지자인 캐릭터를 볼 수 없다.
뮤지컬 햄릿에서의 햄릿은 반항적인 행위를 일삼고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광기는 햄릿의 고뇌와는 연결되지 않는다. 다소 감정적이고, 격정적인 캐릭터만으로는 햄릿의 진수를 보여주지 못한다. 가수 이지훈과 영화배우 박건형 등 엔터테인먼트적인 인물들이 햄릿 역을 맡았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역설적이게도 <뮤지컬 햄릿>은 '햄릿'을 포기함으로써 실현 가능했다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햄릿'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뮤지컬 햄릿과 원작 햄릿을 함께 보아야 한다. 원작 햄릿을 보지 않고 뮤지컬 햄릿만을 본다면 작품 햄릿은 물론 햄릿 캐릭터의 상당 부분을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 다행히 올 8월 아침이슬 출판사에서 햄릿 전집 중 1차분이 번역되었다. 시인이자 무대 연출가이기도 한 김정환 씨가 번역에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