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사진은? 5 : 브레송 님이 쓰던 라이카를 쓴다고 브레송 님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김기찬 님이 쓰던 작은 사진기를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해서 김기찬 님처럼 골목길 모습을 살가이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내가 찍으려고 하는 모습처럼 내가 살아가고 있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진기를 쓴다 한들 언제나 똑같은 사진만 나옵니다. 사진에 담기는 모습은 자기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네 사진 역사와 문화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분들이 쓰던 사진기와 같거나 비슷한 기계를 장만해서 들고 다니는 사람은 많지만, 이분들처럼 우리 마음에 깊이 아로새길 만한 작품까지 남기는 분들은 드뭅니다. 기계를 배우는 마음은 있고, 기계를 찾아보는 눈길은 있지만, 정작 기계를 다루는 자기 마음을 살피는 넋이 없고, 기계 하나 찾는 까닭을 들여다보는 얼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다가 그만둔 이들이 내놓는 물건은 동대문과 남대문 사진관에 꾸준하게 나옵니다.
[148] 사진은? 6 : 사진은? 자기 옷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자기 신발이 아닙니다. 사진이라면? 자기 가방이 아닙니다.
옷에 마음쓰는 사람은 남과 비슷한 차림새로 대충대충 겉멋을 부릴 뿐입니다. 신발에 마음쓰는 사람은 남들이 밟아 본 여행지나 그럭저럭 돌아다니며 자랑을 할 뿐입니다. 가방에 마음쓰는 사람은 남들이 보는 책이나 몇 권 이래저래 가방에 쑤셔박은 채 제대로 살피지도 않는, 그러니까 괜히 어깨만 빠지도록 가방을 꾸역꾸역 채우는 바보일 뿐입니다.
[149] 사진은? 7 : 사진은 자기 삶입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자기가 내는 목소리입니다. 자기 손에 박힌 굳은살이요, 자기 발에 붙은 꾸덕살입니다. 얼마나 자기 삶을 다부지게 가꾸려고 했는지, 얼마나 자기 삶을 즐기며 보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부대끼면서 이웃 삶을 헤아리고 살피고 껴안고 함께하려고 했는지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자기 손을 거쳐 간 책만큼, 자기 발이 거쳐 간 땅만큼 사진에 담깁니다. 거짓이나 꾸밈이라고는 조금도 발을 붙일 수 없는 자리가 사진밭입니다. 자기 삶을 헛산 사람은, 또 헛살고 있는 사람은, 헛살면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헛사는데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뭐, 돈이 넘치고 남아돌아서 사진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만.
[150] 필름을 스캐너로 긁기 1 : 저는 필름 현상ㆍ인화를 손수 하지 않고 사진관에 맡깁니다. 이 일을 할 짬이 없어서 맡깁니다. 그리고, 누가 현상ㆍ인화를 하더라도, 저나 다른 이가 보기에 괜찮게 느껴질 만큼 사진을 찍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찍는 사람이 거의 없는 헌책방 사진을 사진관 사람들도 느끼면서, 이런 사진도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 있고, 헌책방 사진은 어떻게 다루어야 좋은지를 사진관 사람들도 느끼게 하고 싶기도 합니다.
필름을 사진관에 맡겨서 뽑은 뒤, 디지털파일로 바꾸는 일은 제가 손수 합니다. 스캐너에 하나씩 얹어서 긁습니다. 스캐너로 긁은 뒤에는 포토샵으로 건드리는 일 없이 그대로 갈무리합니다. 스캐너 긁기는 필름 현상 못지않게, 또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제가 손수 다 합니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들기는 하지만, 이처럼 하나하나 디지털파일로 긁는 동안, 제가 찍은 사진을 구석구석 다시 볼 수 있거든요. 크게도 보고 작게도 보며, 어느 대목에서 빛을 잘(또는 못) 맞추었는지 어느 대목에서 흔들렸는지(또는 안 흔들렸는지) 어느 대목에서 군더더기가 깃들었는지(또는 티끌 하나 없이 담아냈는지) 살핍니다. 그래서 스캐너 긁기를 하는 동안 ‘아!’ 하면서 안타까운 한숨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이야!’ 하면서 눈물겹게 반가운 외마디가 터져나오기도 합니다.
[151] 필름을 스캐너로 긁기 2 : 스캐너로 사진을 긁으면서 좋은 노래를 듣습니다. ‘좋은’ 노래가 뭐냐고 묻는다면 제 귀에 즐거운 노래입니다. 제 귀에 따사로이 다가오는 노래입니다. 제 마음을 살포시 풀어내고 부드러이 매만지는 노래입니다. 조금 앞서 틀어 놓은 노래테이프 소리도 좋은 노래입니다. 춥기는 하지만, 열어 놓은 창문으로 새어들어오는 새소리도 좋은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그동안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스캐너로 긁는 사이, 사진 하나마다 제 마음이 차곡차곡 담깁니다.
[152] 한 장에 하나 : 사진 한 장에는 하나만 담을 수 있습니다. 섣불리 두 가지나 세 가지를 담으려 하면 이도 저도 아닌 흐지부지 사진만 찍습니다. 사진 한 장에 하나를 담을 때 뜻밖에 다른 한 가지나 두 가지가 더 담길 때가 있지만, 말 그대로 뜻밖에, 운좋게일 뿐입니다.
[153] 헌책방에서 다양한 사진이 나와요? : 나를 취재하는 기자가 묻는다. “헌책방에서 다양한 사진이 나와요?”
싱긋 웃는다. 그리고는 한 마디. “헌책방에 다양한 책이 있고, 다양한 사람이 찾아오잖아요.”
[154] 사진을 왜 찍나? : 저는 좋아서 사진을 찍습니다. 좋아서 책을 읽고 좋아서 술을 마십니다. 좋으니까 자전거를 타고 좋으니까 뭇사람과 어울리곤 합니다. 좋으니까 사람 소리 드문 산골에 홀로 앉아서 때때로 무서움도 타면서 지냅니다. 사진이요? 이런저런 다른 까닭을 들 수 있을까요? 그저 한 마디, 좋아서 찍을밖에요.
헌책방을 좋아하니까 제 사진감은 헌책방이고, 꼭 그만큼만 찍어요. 저는 주머니가 가난하기 때문에 찍고 싶은 만큼 찍을 수 없고, 제가 참말 찍고픈 파노라마사진기로 헌책방 담기도 못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제가 여러 해 동안 적금 부어서 어렵사리 마련한 사진기만으로도 제가 담고픈 헌책방 모습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답니다.
필름을 마음껏 쓰고 싶으나 필름 살 돈 없으니 한 장 한 장 아껴 찍어요. 글쎄, 헌책방에서 가만히 책을 구경하면서 때때로 이 모습 저 모습을 찍노라면, 마음이 참 가볍습니다. 홀가분해요. 세상 부러울 일 없고 아쉬움 하나 없어요. 그동안 찍은 몇 만 장이나 되는 사진은 책으로 묶자고 찍은 사진이 아니에요.
전시회 하고 싶어 찍은 사진도 아니에요. 따로 기록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제가 좋아하는 헌책방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제가 좋아하는 눈길과 마음길을 담아서 간직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뭐, 이렇게 해 온 일도 기록이라면 기록이겠지만, 저는 기록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기자들과 만났을 때 저한테 이것저것 물어 보면, ‘헌책방 자취를 남긴다(기록)’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냥 책이 좋아서 읽었고, 헌책방이 좋아서 다녔고, 사진도 좋아서 찍었고, 헌책방이 좋아서 찍었고’라고만 말하고 싶으나, 이렇게만 말하면 기자들도 쓸거리가 없잖아요? 재미없어할 테고요.
그래서 그냥 ‘헌책방을 기록한다’고도 말했는데요, 생각해 봐요,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대상을 기록할 수 있을까요? 굳이 기록하려는 생각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이라야 기록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 마음이 따사로이 가 닿는 곳, 제 마음을 포근하게 쉴 수 있는 곳이 헌책방이니까 헌책방을 찾을 뿐이에요. 헌책방에서 사는 책이면 헌책일 텐데, 이 헌책은 새책방에서 사고팔리는 책도 있고, 판이 끊어진 책도 있어요. 그러니까 그냥 책을 살 뿐이지만, 헌책방에서 샀기 때문에 ‘헌책’일 뿐이에요.
저는 딱히 헌책방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을 좋아할 뿐이지만, 헌책방을 좀더 자주 갔을 뿐이에요. 뭐, 이것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여느 새책방에서는 살가움이나 따뜻함을 느끼기 힘들었으니 잘 안 찾아간 셈입니다. 그러니 뭐, 좋으니까 헌책방을 찾아가며 책을 보았고, 이 좋은 헌책방이니까 사진으로도 담았어요. 그러고 보니, 한 마디로 간추릴 수 있겠네요. 저는 늘 제가 바라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 하고픈 대로 살려고 해요. 누구한테나 한 번 있는 삶이잖아요. 한 번 있는 삶에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미련하게 살기 싫고 안타까움이 깃들려 하면 그때그때 털어 버리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로 사는데, 책이든 헌책방이든, 또 우리 말 이야기 글쓰기이든, 사진 찍기이든, 모두 제가 좋아하는 대로 찾는 일감이자 놀이감입니다. 한편, 제 삶은 제가 좋아하는 대로 꾸려 왔고 앞으로도 꾸릴 생각이니까, 한결같이 이대로 살아갈 테고요. 저는 제 삶을 좋아하니까요. 제 삶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로 이끌고 싶으니까요. 이런 제 삶대로 책을 보고 헌책방을 즐기고 우리 말 이야기를 글로 쓰고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고 싶으니까요.
그러면서 자전거로만 길을 나서고. 간추린다는 한 마디가 길어졌는데, 제 사진은 제 삶이에요. 제 삶이 제가 좋아하는 일로 가득차 있다면 그런 모습대로 보일 테고, 제 삶이 제가 안 좋아하는 일로 가득차 있다면 그런 모습대로 보이겠지요. 사진은 제 삶이 그대로 담깁니다. 사진 찍는 눈높이나 눈길이나 깊이 또한 제 삶 그대로라서, 제가 살아가는 눈높이와 눈길과 깊이대로 헌책방 사진을 찍습니다. 제가 쓰는 글도 마찬가지이고, 제가 알아보는 책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틈틈이 뇌까리는 헌책방 이야기도 제 삶 눈높이와 눈길과 깊이대로 뇌까릴 뿐입니다. 좋아하는 제 삶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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