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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소박한 건물 두 채가 맞절하듯 서 있습니다. 쓰레기를 말끔하게 치운 후의 모습입니다. 방치된 채 아예 쓰레기장이 돼 버린 듯했습니다.
▲ 신동엽 생가 전경 아담한 마당을 사이에 두고 소박한 건물 두 채가 맞절하듯 서 있습니다. 쓰레기를 말끔하게 치운 후의 모습입니다. 방치된 채 아예 쓰레기장이 돼 버린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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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하면 으레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 백제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곳은 우리 현대문학 사상 천재 시인으로 추앙 받는 신동엽이 나고 자란 고장입니다. 그의 생가 앞으로 난 길의 이름이 일찌감치 '신동엽길'로 지정되었을 만큼 부여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백제'를 보기 위해 부여를 찾은 이들에게는 고작 생각나면 들르는 '양념' 코스에 불과하지만, 그의 삶과 문학에 관심과 애정을 지닌 사람이라면 한나절 답사 주제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생가로부터 시작해 그의 어릴 적 뛰놀던 자취를 따라 읍내를 거닐고, 금강 변에 외로이 선 그의 시비를 돌아보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생가에 가자면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세워져 있지 않지만, 읍내 어디서든지 누구에게 물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고 친절하게 안내해 줍니다. 요즘 들어서는 부여 관광 지도에도 백제의 문화유적과 함께 표기돼 있어 찾아가기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당시에는 초가였는데 관리하기 까다로워 지붕에 기와를 올렸다고 합니다. 푸른색의 새뜻한 지붕이다 보니 예스러운 맛은 없지만, 손바닥만 한 마당에 아담한 두 채의 건물이 서로 맞절하듯 서 있어 시인의 소탈한 모습이 느껴집니다.

채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아버지가 오랫동안 이곳에 살며 관리해 온 까닭에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태만 그대로일 뿐 생가 안팎이 무척 지저분합니다. 불과 이태 전에 찾아왔을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습니다.

벽에 걸려 있던 시가 적힌 액자는 온데간데없고, 방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힌 채 문종이가 갈기갈기 찢겨나갔으며, 마루와 잔디 덮인 마당에는 담배꽁초와 라면 봉지, 과자 부스러기 등이 잔뜩 널브러져 있습니다. 누가 이곳을 찾았는지, 어떤 소감을 남겼는지 들춰보며 공감하곤 했던 방명록도 사라진지 이미 오랩니다.

방치된 신동엽 시인 생가

망가지고 찢긴 문틀 위로 인병선 시인이 지은 시 '생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작품입니다.
▲ 신동엽 생가 망가지고 찢긴 문틀 위로 인병선 시인이 지은 시 '생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글씨는 신영복 선생의 작품입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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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불 피운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낮에는 인근 주민들의 열린(?) 쉼터로, 밤에는 비행 청소년들끼리 어울리는 놀이터로 활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부여군청에서 걸어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인데다, 생가 담 너머가 온통 주택가인데도 이렇듯 방치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저 궁금할 따름입니다.

망가진 방문 틀 위로 튼실한 편액 하나가 남아있어 그나마 위로가 됩니다. 부인인 인병선 시인이 짓고, 신영복 선생이 쓴 '생가(生家)'라는 짧은 시 한 편이 담겨 있습니다. 쓰레기장이 돼버린 생가에서, 신동엽이 남긴 정신이 그저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라는 그 뭉클한 시구가 무색합니다.

부여읍의 끄트머리, 금강가 야트막한 언덕에는 그의 시비가 슬픈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인 1970년에 지인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본디 읍내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부소산 중턱에 세우고자 했지만, 당시 시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후미진 이곳까지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엄혹한 시대의 지식인이라면 불온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어서도 '빨갱이'로 낙인찍힌 그의 시에는 늘 '불온'이라는 딱지가 붙었고, 한동안 학교에서도 서점에서도 쉬이 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땐 이미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유신체제에 맞선 저항시인'으로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시비가 선 자리가 햇볕을 등진 음지인데다 주변이 워낙 어수선해 시의 향기를 느끼기란 어렵습니다. 그렇잖아도 작은 시비를 위협이라도 하듯 육중한 반공기념탑이 바로 곁에 서 있어 거슬리고, 울타리 너머 개를 키우는 축사가 있어 개 컹컹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머리가 쭈뼛 설만큼 섬뜩해 흡사 두 번 다시는 이곳을 찾지 말라는 협박 같습니다.

시비를 두른 울타리에 그의 시들을 코팅 종이에 출력해 걸어두었는데, 울타리를 따라 한 바퀴 돌면 어느새 문학소년이 되고 맙니다.
▲ 신동엽 시비 전경 시비를 두른 울타리에 그의 시들을 코팅 종이에 출력해 걸어두었는데, 울타리를 따라 한 바퀴 돌면 어느새 문학소년이 되고 맙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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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애써 이곳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입니다. 시비를 두르고 있는 울타리에 누가 만들었는지 신동엽의 시들이 금줄 마냥 걸려 있습니다. 비에 새겨진 그의 시 <산에 언덕에>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던지 시비 주변을 온통 시집으로 가꿔 놓았습니다.

입구에 그의 대표작인 <껍데기는 가라>를 시작으로 울타리를 따라 안팎으로 한 바퀴를 돌며 시들을 낭송하다 보면 어느새 문학소년이 되고 맙니다. 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시의 운율에 맞춰지고, 주옥같은 그의 시어가 입을 통해 가슴으로 뭉클하게 전해집니다.

그렇듯 시비 주변엔 역사의 아픔을 시를 통해 희망으로 승화시키고, 그렇게 건져 올린 희망은 다시 역사에 대한 믿음으로 환원시키는 그의 문학적 열정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시를 적어 걸어두는 등 그를 잊지 못하는 후학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 없었다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주변 환경에 휩쓸려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방치된 채 쓸쓸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그의 생가와 시비를 찾아가 다시 소중히 가꿔야 합니다.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는 찬사가 무색하게, 시나브로 잊혀져가는 그의 정신을 다시 타오르게 해야 할 때입니다.

스러진 백제의 혼이 금강을 따라 이 땅에서 거름이 되어, 정신이 되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음을 노래한 불세출의 시인 신동엽이, 정작 그가 나고 자란 땅에서 잊혀져가고 있다면 너무나 서글픈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제 홈페이지(http://by0211.x-y.net)에도 실었습니다. 지난 9일 방문했습니다. 그날 주변 쓰레기를 일행과 함께 치웠는데, 그 양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태그:#신동엽, #신동엽 생각, #부여, #껍데기는 가라, #인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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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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