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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된 연탄 질통이 연탄 앞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연탄 배달을 같이 했던 역전의 용사 중 하나다.
▲ 연탄 질통 35년 된 연탄 질통이 연탄 앞에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연탄 배달을 같이 했던 역전의 용사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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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연탄 가격 만만찮다. 기름값이 올라가니 연탄값도 올랐던 게다. 요즘 연탄 한 장의 평균 시중 소비자 가격이 450원에서 오락가락한다. 1000장을 사게 되면 45만원이다. 평범한 일반 가정집에서 겨우내 1000장 조금 넘게 때기에 만만찮은 가격일 밖에.
 
쌀 1가마에 1500원, 연탄 한 장에 10원 할 때부터 우리 가게가 연탄을 팔기 시작했던 겨. 새끼줄에 연탄을 끼어 한 장씩 사가는 것도 그나마 돈 있는 집이나 하던 시절이었지. 아, 그 시절이야 일반 가정집에선 산에 가 나무해서 불 때던 시절이었응께.
 
무슨 이야기냐고. 자그마치 42년 전 이야기다. 42년 전 연탄 한 장에 10원 하던 시절부터 연탄 장사를 했던 곽종만(69·해성상회 대표)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안성에서는 최초로 연탄장수를 시작했다고. 할아버지의 증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애마(짐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는 곽종만 할아버지. 지금 타고 있는 짐자전거는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 30년 된 자전거 그의 애마(짐 자전거)를 타고 환하게 웃는 곽종만 할아버지. 지금 타고 있는 짐자전거는 나오지도 않는다고 한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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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친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그마치 60년 넘게 쌀가게를 하셨던 거 아녀. 선친 밑에서 한참 일 배우다가 군대 갔다 와서 선친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 자리에서 쌀가게와 연탄 가게를 시작(42년 전)했던 겨. 그 후 선친이 돌아가셨지만, 이걸 가업으로 알고 이날까지 하고 있는 거란 말여.
 

그는 아직도 연탄 장사하면서 잘나가던 시절에 대한 추억이 많다. 75년도부터 연탄장사가 전성기에 들었다는 것. 한참 우리나라에 산업이 일어나고 경제가 도약할 무렵이었다. 그에 의하면 2002년도까지 연탄 장사가 그럭저럭 괜찮았다가 그후부터 재미가 없어졌다고 한다. 연탄 판매 전성기와 하락기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경제발전사가 한 눈에 들어올 정도다. 서민 애환의 척도라 해야 할 것이다.
 
처음 우리가 연탄장사 시작할 때에야 손수레가 전부였지. 손수레로 공장에 가서 연탄을 직접 떼어 와서 각 가정에 배달했던 겨. 그래 봐도 그 때 당시 아마 배달료는 50원이 다였을 겨. 아, 그러다가도 겨울 눈길에 오르막길을 오르다가 손수레가 미끄러져 연탄들이 통째로 바닥에 나뒹구는 날에는 밑지는 날이었응께. 한 번 엎어지면 보통 손수레에 실린 연탄 200장이 완전 박살 나버렸는디 겨울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던 거 아녀. 그 때만 생각하면 아찔 혀.

 
지금도 할아버지는 나무로 칸칸이 문을 닫던 그 시절 문을 그대로 쓰고 있다.
▲ 나무문 지금도 할아버지는 나무로 칸칸이 문을 닫던 그 시절 문을 그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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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장수 초장기 시절, 겪었던 일화라고 내놓은 이야기에도 할아버지의 아픔이 묻어 있었다. 지금이야 지나간 경험이라고 술술 털어 놓지만, 그 당시에야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 추운 겨울에 맘고생 몸고생은 또 얼마나 했을까.
 
평범한 가정에서 '그 시절 연탄 때던 추억'을 쌓아 갈 때 그렇게 연탄 팔던 기억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네 아버지들은 그 시절에 정말 그랬다. 뚝심 하나로 자식 벌어 먹여 살려보겠다고 살았던 장한 아버지들이었다. 덕분에 그는 4남매를 훌륭히 키워 시집, 장가를 다 보내었으니 말이다.
 
아직도 해성상회엔 그 시절에 함께 했던 장비들이 있다. 그 시절 기동력을 발휘하기 위해 샀던 30년 된 짐 자전거, 그 시절 연탄을 지고 날랐던 35년 된 연탄 질통, 그 시절 공장에서 직접 연탄을 떼어 실어 날랐던 35년 된 연탄 손수레, 창업 초기부터 달았던 해성상회 간판 등 모두 박물관에 가 있으면 좋을 법한 연탄 장비들이 지금도 있다.
 
요즘 가게의 '셔터'에 해당하는 문도 나무로 한 칸씩 막아서 쇠파이프 자물쇠를 채우는 것을 고집하고 있다. 연탄에 관한 한 '작은 연탄 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듯싶을 정도다.
 

할아버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자신의 각오를 또박또박 이야기 한다.
 
내 평생 죽을 때까지 이 일 하다가 갈겨. 선친의 가업인 이 터전을 지키며 연탄을 팔다가 가는 게 내 천직이라고 생각혀.
 
그렇다. 해성(바다 해海, 이룰 성成), 그것은 그의 부친이 만들었고, 그가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세상이었던 게다.
 
그 시절 함께 했던 손수레에 연탄을 싣고 있다. 요즘은 기력이 달려서 될 수 있는 대로 할아버지가 직접 배달 하지 않고, 원하는 소비자가 직접 가져가는 일이 많다고 한다.
▲ 35년 된 손수레 그 시절 함께 했던 손수레에 연탄을 싣고 있다. 요즘은 기력이 달려서 될 수 있는 대로 할아버지가 직접 배달 하지 않고, 원하는 소비자가 직접 가져가는 일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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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인터뷰는 지난 12일 안성시 창전동에 있는 해성상회(031- 675-2692)에서 했다.



태그:#연탄, #연탄가게, #해성상회, #곽종만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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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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