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저물어가는 가을, 못난 얼굴을 한 촌부가 못난이 과일 앞에서 얼굴을 보며 웃고 있습니다. 신경림 시인의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는 시구를 떠올리며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니 정말 흥겨움이 더해옵니다. 억척스럽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세월 앞에 못난 대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오는 동병상련(同病相憐)같은 정이 핏속을 흘러내리고 있음에서입니다.

 

 

모과는 중부이남에서만 자라난다는 속성을 무시하고 귀촌할 때 모과나무 몇 그루를 심었으나 해마다 얼어 죽기를 거듭, 어느 해부터 두 그루가 끈덕지게 살아남아 늦가을이면 서로 못난 얼굴을 마주하며 웃음으로 가을을 보내곤 합니다.

 

모과는 나무에 달리는 참외, 즉 목과(木瓜)로 그 이름이 전해오다가 세월이 지나며 'ㄱ'이 탈락되어 모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노란 열매 빛깔은 참외 색깔을 쏙 빼닮았습니다. 못생긴 것을 감안하면 개똥참외와 너무나 닮은꼴입니다. 모과는 천년을 장수하는 나무로 키가 20m, 둘레가 1m 이상 되는 고목도 많습니다. 증명이나 하듯 모과나무는 젊은 사람이 심으면 일찍 죽는다는 맹랑한 속설이 전해오기도 합니다.

 

 

지리산 화엄사 구층암에 가면 모과나무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습니다. 천년도 더 되었을 고사목 모과 기둥 두 개가 구층암 산방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주름과 옹이 매듭을 자연 그대로 살려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고사목에선 사뭇 경건해지기까지 합니다. 고사목 옆에는 어느 스님이 심었다는 살아있는 모과나무가 또 있어 놀라움을 더해줍니다. 죽은 자와 산자가 한데 어울려 있는 산방 기둥을 보는 순간 나도 모과를 하나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솟아올랐습니다.

 

 

모과는 한여름에 분홍색 꽃이 피고 가을이 깊어가며 녹색바탕에서 노란색으로 익어갑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과일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더니 색이 변하며 울퉁불퉁 멋대로 입니다. 못난 바탕에 맛은 시고 떫은데다 껍질이 단단해 날로 먹을 수 없기에 천덕꾸러기 과일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러나 못생겼으면서도 나름 특이한 향내를 뿜어내는 별난 속성 때문에 우리들을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못생겨서 놀라고, 썩어가며 그윽한 향내를 뿜어내 놀라고, 그 떫고 신맛에 또 한 번 놀라버립니다.

 

 

더구나 알카리성 식품에 당분, 칼슘, 철분, 비타민C까지 함유하고 있어 소화촉진, 신진대사, 기관지염, 설사환자의 효험이 크다 전해오고 있습니다. 요즘처럼 환절기엔 다이어트 식품으로 목감기를 다스리는데 그만이라니 기침으로 이 가을이 힘들다면 한 번 시음해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옛날엔 모과는 사랑의 메신저 노릇도 했습니다. 뜻 깊은 만남을 위해 여인들이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모과를 던져줌으로 사랑의 징표로 삼았다합니다. 썩어도 뿜어내는 향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대신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며칠 전 치과에 가 어금니를 두 개나 빼고 돌아왔습니다. 나이 들며 찌그러지고 오그라들고 주름살투성이의 못난 얼굴이 이빨을 빼고 나니 더욱 볼품이 사납습니다. 내 얼굴이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더란 말인가. 참 못생겼다는 생각에 우울해하며 서성거리는데 노랗게 물든 모과들이 '툭 툭' 무너져 내립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비 그치면 한파가 몰려온다는 예보에 헌 창호지를 뜯어내 한지로 문짝을 바르고, 닥종이로 방벽과 천정 도배를 새로 올렸습니다. 서둘러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과들을 주워 다 방 한쪽 구석에 놓아봅니다.

 

 

무질서하게 티가 섞인 닥 종이의 투박스러움, 희디흰 창살 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살, 노랗게 물든 모과향이 한데 어울려 고즈넉하기 그지없습니다. 울퉁불퉁한 모과들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질박한 삶을 확인하고, 못난 내 얼굴을 만져보며 서늘한 겨울을 맞이합니다.

 

못생긴 것일수록 진한 향을 품어내는 모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다가서는 이 겨울이 즐겁습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카페 '북한강 이야기' 윤희경 수필방과 농촌공사 '웰촌 전원이야기' 북집 '네오넷코리아' 정보화마을 '인빌뉴스'에도 함께합니다.

쪽빛강물이 흐르는 북한강 상류를 방문하시면 고향과 농촌을 사랑하는 많은 임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태그:#모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