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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건강검진에서 부정맥(심방세동) 판정을 받았습니다. 맥박이 규칙적으로 뛰지 않고 들쑥날쑥하다보니 혈관에 혈전이 생겨 뇌경색이 올 수도 있다고 하네요. 해서 의사가 처방해주는 약을 먹고 두 주일에 한 번꼴로 심전도검사를 받고 있는데 한 번은 두 명의 간호사가 좁은 심전도검사실로 들어왔습니다.

 

보아하니 고참 간호사가 신참 간호사에게 심전도검사 하는 방법을 전수해주고 있는 듯했습니다. 물론 그 실습 대상은 바로 저였지요.


신참 간호사는 네 번의 시행착오 끝에 고참 간호사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았습니다. 저야 편안한 침대에 누워 있었으니 크게 불편할 것도 없었는데 간호사는 미안했는지 세 번째 검사를 하면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편안하게 누워 계세요."

그 말에 저는 "예"하고 짧게 응수를 했지만 기실 제 마음 속 대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편하게 누워 있을 테니 편하게 실습하세요.'


자신의 몸이 누군가의 실습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손길이 민첩한 고참 간호사도 그런 솜씨를 익히기까지는 신참 간호사처럼 누군가의 몸을 실습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 자신이 실습대상이 된 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여 짜증을 내거나 아예 검사받기를 거부한다면 의료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래 전에 모 대학병원에서 십이지궤양치료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수면 내시경도 없던 때라 엄지손가락보다 훨씬 굵어 보이는 고무호스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일이 여간 고역스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인턴으로 보이는 신참 의사들이 돌아가며 내시경을 들여다보는 바람에 검사 시간이 평소보다 훨씬 더 길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는 마치 창에 찔린 짐승처럼 신음하며 고통을 참아야만 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화가 치밀었습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화를 낸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의료행위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기 때문이지요.  


엊그제 학교에서 한 아이와 말다툼이 있었습니다. 아니, 말다툼이 벌어질 뻔 했습니다. 다행히 한 순간 제 마음에 평화 같은 것이 찾아와 아이를 다독여 돌려보낼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기 직전에 두 간호사가 머리에 떠올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날 제 몸을 실습대상으로 삼았던 두 간호사에게 관대(?) 했던 것은 신참 간호사의 서툰 솜씨가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환자에게 이로운 훌륭한 간호사가 되기 위한 배움과 연습의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도 배움과 연습의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신참 간호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니, 그 이상일 것입니다. 신참 간호사는 솜씨가 서툴 뿐이지만 아이들은 전인적으로 부족한, 지금 성장 과정에 있는 미성숙한 인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들에게 관대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한 생명이 자란다는 것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과정에 동참한다는 것은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다만,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얼마간 입장료를 지불해야하듯 한 아이가 성장하는데 작은 보탬이라도 되기 위해서는 얼마간 고통을 감내해야만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값진 고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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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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