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뭔지는 잘 모르제만
텔레비전에서 본께 시인은 외롭고,
시는 할수락 무장무장 심들다고 하든디
그라고 잽혀 가기도 한담서
으째서 닌 해필 그 일을 할라고 허냐
-그러나 어머니, 어머니
그래, 돈이 뭔 필요 있겄냐
그라고 인명은 재천이라 했응께
한 번 시작헌 일
목심 걸 듯 야물딱지게 해부러라
-그러나 어머니, 내 어머니
-42쪽, '시인의 어머니' 모두
인사동 골목에서 남도음식점 <시인>을 꾸리며 여러 문학예술인들 속내를 가늠하고 있는 시인 김여옥. 그가 펼치고 있는 시세계를 한 두릅에 꿰기란 그리 쉽지 않다. "눈이 좋은 사람이 / 도수 높은 안경을 끼면 / 어지러워 보이고 / 눈이 나쁜 사람이 / 도수 낮은 안경을 끼면 / 물맹"(안경알에 비친 세상 2)이 되는 것처럼 헛갈린다.
이는 그가 자식처럼 쑥쑥 낳아놓은 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느끼면 시 속내가 환하게 드러나게 마련인데, 굳이 도수도 맞지 않은 안경을 쓰고 바라보기 때문이다. 근데, 도수 맞는 안경을 끼고 있는 그대로 열심히 바라보아도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왜일까? 그의 시세계는 자궁(생명), 비극적 가족사, 주어진 현실, 민족의 뿌리 등이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푸른빛으로 살고 싶"어 "바다 멀리 보는 눈 / 망원경 하나 / 아주 비싼 망원경 하나" 사서 "햇빛 좋은 창가에 앉아 있었"(비싼 망원경 하나)다는 시인. 그 비싼 망원경으로 들여다 본 시세계는 그가 태어난 고향 해남에서 출발해 오라비 죽음과 어쩌지 못하는 세상살이를 거쳐 마침내 우리 민족의 자궁까지 더듬는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가 알쏭달쏭 헛갈리게 여겨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여옥 시의 씨앗은 자궁, 즉 생명에 있다. 고향 해남에 얽힌 가족사와 구수한 해남 사투리가 그를 낳아준 어머니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이나, 동국이나 신인, 삼위산, 돈황읍, 반고 한인 등이 나오는 것도 시작도 끝도 없는 생명 찾기이다. 스스로에게 주어진 현실을 비춰보기 위함이다.
가장 큰 것은 바깥이 없고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다
"밥을 구한다는 핑계로 첫 시집 낸 지 14년이 지났습니다. 진작에 발표한 작품들도 아직 묶지 못한 터에 재출간의 용기를 낸 것은, 애정 어린 독자들의 재촉과 다감한 벗들의 마음씀이 있었음을 밝힙니다. 개정판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집에 약간의 천을 덧댔습니다. 다만 남루는 여전합니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1994년 펴낸 김여옥(45) 시인의 첫 시집 <제자리 되찾기>(천산) 전면 개정판 <너에게 사로잡히다>(도서출판 화남)가 15년 만에 새롭게 묶여 나왔다. 여기서 시집 제목에 나오는 '너'는 고향 해남이기도 하고, 어릴 때 죽은 오라비, 그 해수산 울음소리이기도 하고, 반고 한인이 처음 나라를 연 돈황읍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에는 제1부 '구멍에 대하여', 제2부 '꽃잎이 되고 싶은 새', 제3부 '안경알에 비친 세상', 제4부 '동국의 봄'에 모두 61편의 시가 자수정처럼 박혀 있다. '불임의 끝' '구멍에 대하여' '뜨거운 여자' '야행성 여자' '사진 한 장' ''그대 울음소리1,2' '가장 가벼운 새' '겨울옷 벗기' '그림자 놀이' '간질의 서울' 등이 그것.
김여옥 시인은 가장 큰 것은 바깥이 없다는 지대무외(至大無外)와 가장 작은 것은 안이 없다는 지소무내(至小無內)를 들먹이며 "안과 밖의 경계가 없듯,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없듯" 스스로 삶도 그러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날은 저물어오고 갈 길은 멀"어 궁하면 통한다는 "궁즉통"을 생각해야 할 정도다.
그룽그룽 울며 오래비 죽음 미리 알린 해수산
대차 참말로 묘하긴 묘하시
날만 궂을락하믄 저 눔의 산이란 거이
그룽그룽 울어싼단 말이여
뭔 조화 속인지 당최 모르것당게
장돋아지 꼴가릴 털어내믄서도이
오마닌 쎄를 끌끌 차셨지라우
난 읽던 책을 토방에 내려놓곤야
살살 장짓문을 닫었지라우
43쪽, '해수산 울음소리' 몇 토막
이 시에서 나오는 해수산은 작가 황석영이 쓴 <삼포 가는 길>에 나오는 그 소설 속 삼포처럼 실제로 있는 산 이름이 아니다. 이 시집 해설을 쓴 공광규 시인에 따르면 해수산은 화산반도에 있는 선은산이다. 이 산은 마을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마치 해소병을 앓는 사람처럼 그룽그룽 울어댄다는, 시인의 상상력이 만든 산이다.
시인의 어머니는 해수산이 그룽그룽 우는 소리를 들으며, 그 산을 스치는 "푸런 도깨비불 한나", 그 푸른 불이 선은산 안쪽에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불길한 느낌을 받는다. 마을 어른들도 "얼곤메, 이담시도 가찹게 떨쳐진 걸 본께 / 오늘 낼 새 누가 죽을랑갑네. 으짜까잉!"이라며 불안에 떤다.
아니나 다를까. 그 도깨비불이 해수산 가까이 떨어진 그즈음, 간신 간신 버티던 시인의 오라비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어머니가 "댕기다 댕기다 물기 모도 마른 눈 / 바짝 마른 눈 떴을 때"에도 해수산 울음소리가 들린다. 해수산 울음과 오라비 죽음. 이는 어린 그에게 자연과 인간이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을 각인시킨다.
이러한 사람과 자연이 하나됨은 이 시집 곳곳에 묻어있다. "떠오르는 햇덩이를 못내 바라보다가 / 태반 속에서 느껴지는 미동"(불임의 끝)이라거나 "고향 안개밭은 / 눈물천지로 날 기다리고 있었다"(고향 안개밭), "달의 사망진단서를 / 끊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달의 사망진단서), "'저눔의 초목, 즘생들은 / 사람숭낼 다 낸당께'"(꽃잎이 되고 싶은 새) 등이 그러하다.
동국의 겨울을 나기 위해 돈황읍으로 간다
이 나라의 겨울은 길다
발가벗고 우는 숲들은
계엄령 아래 갇혀 있다
뼈만 남은 자작나무들은 떠나려고만 한다
동국의 눈 내리는 제 숲을 버리고
다만 고비사막이라도 좋았다
돈황 황사의 오르가슴이라도 좋았다
-79쪽, '동국의 봄' 몇 토막
어린 시절, 고향 해남에서 해수산 그룽그룽 우는 소리와 함께 오래비를 잃은 뒤 사람과 자연이 하나라고 느끼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 그는 어머니로부터 "시가 뭔지는 잘 모르제만 / 텔레비전에서 본께 시인은 외롭고, / 시는 할수락 무장무장 심들다고 하든디 / 그라고 잽혀 가기도 한담서"라는 말을 듣는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 충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러나 어머니, 어머니" 하며 열심히 글을 썼던 모양이다. 까닭에 '자식 이기지 못하는' 어머니는 "그래, 돈이 뭔 필요 있겄냐", "한 번 시작헌 일 / 목심 걸 듯 야물딱지게 해부러라"며 등을 토닥인다. 그렇게 고향 해남을 떠나 도시로 나온 시인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만만치 않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은 군부 독재정권이 내민 계엄령 아래 갇혀 있다. 사람만 계엄령 아래 짓빏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긴 겨울(독재) 속에 갇힌 숲들조차도 발가벗고 울고 있다. "뼈만 남은 자작나무들"도 어디론가 달아나려고만 한다. 여기서 "뼈만 남은 자작나무"는 군부독재정권의 군홧발에 참혹하게 짓밟힌 모든 민중을 뜻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때부터 동국(우리나라)의 뿌리를 찾기 시작한다. 돈황읍으로 가서 다시 한번 "말의 물꼬를 터야" 하고, "살 한 점씩 발라내어 / 동이의 제방을 튼실히 쌓아", "잃어버렸던 옷가지를 찾아 걸치고 다시" 와야 하기 때문이다. "계엄령이 내려지는 동국의 숲일지라도 / 진정한 이 나라의 봄"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살 비린내 나는 피톨 같은 언어
서울 와서 처음 가본 서울대병원은
그 이름만큼 담도 높았다
15년 전 오늘 죽은 내 오라비
한이나 남지 말라고 데려간 지방 병원
한낱 인턴들의 실습용 몰못이었을 뿐
내 자식 늬들 손에 죽게 할 수 없다고,
반송장된 오라비를 떠메고
울엄니 오는 길엔
풀잎마저 몸져 누워버렸다
-84쪽, '우리나라 좋은 나라' 몇 토막
김여옥 첫 시집 개정판 <너에게 사로잡히다>는 자궁 속 생명 찾기이자 역사 속에 묻혀버린 우리 민족의 고향 찾기이다. 그 생명 찾기는 "파면 팔수록 자꾸만 벌어지는 구멍"이며, 고향 찾기는 단군 제1기 시조 반고 한인이 처음 나라를 연 땅 돈황읍 "구멍 뚫린 천창(天窓)으로"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는 해비이다.
문학평론가 이경철은 이번 시집에 대해 "살 비린내 나는 피톨 같은 언어, 청자같이 단아한 고전적 풍격의 여심, 분청사기 같은 맨살의 그리움이 흐르고 있는 천생 '인사동 시집'"이라며 "아득히 먼 곳의 그리움이 정박해 있는가 하면 삭일 수 없는 그리움의 피톨들이 오늘 밤에도 잉잉대며 불어오고 있다"고 평했다.
시인 김여옥은 1963년 땅끝 해남에서 태어나 1991년 <문예사조> 1월호에 연작시 '제자리 되찾기' 외 5편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제자리 되찾기>가 있으며, <자유문학> 편집장 및 발행인, <월간문학> 편집국장 등을 맡았다. 지금 서울 인사동에서 남도식 주점 <시인>을 꾸리고 있다.
한편, 김여옥 시인은 20일(목) 오후6시 인사동 사거리 한국관광명품점 골목(인사 8길)에 있는 <시인>(전화 735-8525)에서 첫 시집 개정판 <너에게 사로잡히다> 출판기념회를 갖는다. 초청인은 작가 김영현, 문학평론가 이경철, 시인 홍일선 박희호 이승철 방남수 공광규.
다음은 지난 8일(토) <김남주문학축전> 때 해남 땅끝마을에서 만난 김여옥 시인과의 일문일답이다.
-언제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나?
"어릴 때 문예반에 들어가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실, 중1 때까지만 하더라도 시인이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소설가가 되려고 했다. 왜냐하면 시인은 너무 멀리 있는 사람, 현실과는 동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고향을 떠나 한동안 일기만 빠뜨리지 않고 계속 쓰다가 어느 날 문득 나 스스로 정체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그동안 써 두었던 일기를 토대로 본격적으로 시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시에 보면 어릴 때 오빠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빠는 어떤 존재였나?
"초등학교 6학년 때 큰 오빠(22)가 병명도 모른 채 돌아가셨다. 그때 충격을 어찌나 많이 받았던지 아주 좋았던 시력이 갑자기 나빠졌다. 여동생이 5명 있었는데 큰 오빠가 저를 굉장히 많이 예뻐했다. 큰 오빠는 자신이 못한 것을 제가 대신 해주기를 바랐고, 뒷바라지도 참 많이 해줬다."
-김여옥 시인의 고향은 해남이다. 해남은 김남주, 고정희, 윤재걸, 김준태, 황지우 등 수많은 뛰어난 시인이 많이 나온 곳이다. 어찌 생각하는가?
"제가 그런 토양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도 고향을 밝힐 때 '전남 해남'이라 하지 않고 '해남'이라고만 쓴다. 그 분들의 시적 영향력이 제게도 많이 미친 것 같아 자긍심을 갖고 있다."
-이번 시집에 보면 돈황읍, 반고 한인 등 우리 고대사에 얽힌 내용이 나온다. 언제부터 우리 고대사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는가?
"문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하게 됐다. 특히 <자유문학> 편집장을 맡고 있을 때 신세훈 선생님이 천부경과 조선상고사 등 우리 숨겨진 고대사에 대해서 많이 얘기해줬다. 그때 우리 고대사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
-두 번째 시집은 언제쯤 낼 계획인가?
"사실, 두 번째 시집을 묶기 위해 첫 시집 개정판을 내게 됐다. 왜냐하면 제가 보관하고 있는 첫 시집도 1권뿐인 데다 첫 시집을 묶은 지 15년이나 지난 터라 주변 사람들도 못 본 사람이 더 많다. 느닷없이 두 번째 시집을 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년에 두 번째 시집을 낼 계획이다. 앞으로 어찌될 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평생 3권의 시집만 펴낼 계획이다. 시집을 너무 많이 펴내는 것도 일종의 언어공해라고 생각한다. 저는 앞으로 펴내는 세 권의 시집에서 2~3편의 좋은 시만 건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다."
-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저 안 쓰고는 못 배겨서 시를 쓴다. 제 시의 테마는 정체성 찾기, 제자리 찾기이다. 제가 시를 쓰는 것은 '이것밖에 없겠구나, 이 길이 제가 걸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인사동에서 남도음식점 <시인>을 꾸리고 있는 줄 알고 있다. 시는 언제 쓰는가?
"요즈음에는 시를 거의 못 쓴다. 시는 시간과 공간이 많이 필요치 않다고 여긴다. 잠깐 잠깐 이미지가 떠오를 때마다 늘 메모를 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시인>을 직접 운영하다 보니 책상 앞에 앉아 메모한 이미지를 차분히 정리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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