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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 책 겉그림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 또 하나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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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가부장제 틀 속에서 지내야 했다. 오늘날처럼 남녀고용평등법과 가족법 등이 확실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그 이후에나 가능했다. 여성을 위한 그 모든 입법의 과정 속에는 항상 박영숙이 자리하고 있기에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다.

박영숙은 1930년대에 태어난 여성으로서 지극히 불리한 가부장적인 식민사회를 안고 자라났다. 이후 1940년과 50년대의 전쟁의 시대, 1970년과 80년대의 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불합리한 군사정권의 비민주화 사회, 남성 가부장제 사회를 온 몸으로 맞서 싸워나갔다.

1970년대부터 86년까지 그녀가 여성 운동의 한복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전쟁 통에 살아남으려는 어머니의 보따리 장사 기질을 체득한 데다, 그녀를 여성운동의 중심에 서도록 한 젊은 날의 멘토인 YWCA의  박에스더와 이희호 여사, 그리고 열 살 많은 남편이자 민중신학자인 안병무 목사가 늘 동행해 주었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마침내 군부 정권이 직선제 개헌을 선언하자, 박영숙은 김대중이 이끄는 평민당의 부총재직을 맡게 되었고, 곧이어 총재권한대행까지 맡았는데, 그녀의 눈부신 활약으로 당시 평민당에서는 20여 명이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입당한 지 5개월 만에 일군 쾌거였고, 비례대표 1번으로 그녀는 국회의원에 입문하게 되었다.

보건사회위원회에 배정된 박영숙은 이후 '가족법 개정',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윤락행위방지법', '에이즈 마약 법안' 등 여성과 생명에 관련된 법안 개정에 몰두했으며, 이후로도 '여성부 설치건, 정신대 문제, 수질 보전 문제, 골프장 건설 관련 등 다양한 입법 활동을 전개했다. 그녀의 집요하고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고평법'과 '가족법'이 개정됐던 것이다.

김현아가 엮은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에서는 그처럼 전쟁과 독재의 시대를 거쳐 오면서, 우리사회의 가부장제 틀을 온 몸으로 맞서 투쟁하고 개혁한 박영숙을 만날 수 있으니, 그녀의 삶 자체는 우리사회의 역사 자체와 다를 바가 없음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 가족법 개정에 사명감을 가지고 있던 박영숙이 그 중심에 있었기에 가족법 개정이라는 역사적인 드라마가 가능했다. 여성 운동 출신의 한 여성이 제도 정치권으로 진출하면서 여성 친화적 정책을 법제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례였다."(256쪽)

여성운동사의 중심에 선 여성으로서, 여성과 생명을 위한 입법추진에 눈부신 활약을 한 여성으로서, 박영숙이 평생을 살아왔기에 그녀의 모습은 투사처럼 날카롭게 비쳐질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2008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난 그녀의 78살 된 얼굴에는 인자하고 평온한 기품이 가득하다. 

왜일까? 여성 운동을 주도하던 시절 그녀는 주도면밀하게 준비하고 앞장서는 것 못지않게 수유리 자택에서 동료들과 남편의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을 위해 늘 대접하는 삶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가난과 굶주림에 처한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베푼 그녀의 삶은 그녀의 얼굴을 더욱 후덕하고 평온하게 만들어 주었다.

우리시대 여성운동사에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그 가운데 박영숙의 삶은 여성으로서 한 개인이 지닌 몸의 역사가 그대로 우리나라의 살아 있는 역사 과정임을 알게 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사회에서 리더가 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는 그녀의 삶이 단계별 맵이 될 수 있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자 하는 우리사회의 딸들에게는 유용한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영숙을 만나다 - 생을 마칠 때까지 현역으로 살고 싶다

김현아 지음, 또하나의문화(2008)


태그:#박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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