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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하고, 불안하다는 말만 있지 아무도 책임 있게 나서질 못하니까…."

 

그는 말을 극도로 아꼈다. 20일 오후에 만난 국책금융기관의 한 고위임원은 답답하다는 표정이었다. "정부가 돈을 쏟아붓는데도 금융시장의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런 질문 자체가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대신 한 가지 비유를 들었다. 그의 얘기다.

 

"어떤 배(한국경제)가 있는데, 폭풍이 닥쳐 엄청난 파고가 눈앞에 와 있어요. 유능한 선장이라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필요 없는 짐부터 바다에 버려야지."

 

"지금 (필요 없는) 짐을 고르고 있는 것 아니냐"고 되묻자, "언제까지 고르고만 있을 거냐"면서 "배는 지금 가라앉고 있는데…"라고 말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신뢰와 권위를 상실한 선장과 침몰하는 한국경제호

 

금융위기에 따른 여파가 실물경제로 급속히 확산되면서, 한국경제가 좀처럼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연일 돈을 쏟아붓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하지만, 시장에선 약발이 전혀 먹혀들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중소기업의 부도와 도산이 줄을 잇고, 대량 해고와 실직의 공포가 확산하고 있다. 대량 실업은 곧바로 소비와 실물경기 위축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기업의 자금난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의 부실은 은행 등 금융기관의 부실로 옮겨진다. 심각한 상황이지만 실질적인 정부의 대응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건설업과 저축은행 등에 대한 구조조정 문제. 정부와 금융권이 이들에 대한 구조조정 원칙과 기준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경제의 불확실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게다가 일부 중견 해운회사의 파산설과 함께 해운과 조선업 등 다른 제조업의 부실도 함께 터져 나오고 있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어떤 식으로든 거품은 빼야 하고, 과잉투자는 해소해야 한다"면서 "이것을 피하려고 (정부가) 이리저리 꼼수를 부리다간 우리 전체가 더 큰 고통을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혼돈과 혼란 속의 금융시장... 외국인들 "한국경제 불확실성 커"

 

이 같은 경제의 불확실성은 금융시장에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금융시장은 연일 혼란과 혼돈의 연속이다. 주가는 연일 폭락하고 있고, 환율은 또 다시 폭등하고 있다.

 

특히 20일에는 코스피지수가 950선마저 무너졌다. 연기금을 통한 정부의 주가 방어도 투자자들의 불안심리를 좀처럼 잠재우지 못했다. 개인과 기관투자자 모두 주식을 팔아치웠고, 외국인들의 한국주식 '팔자' 주문도 계속됐다.

 

외국인들은 이날도 924억원어치의 주식을 팔아 치웠다. 최근 주가폭락을 이끌어 온 이들은 지난 9월 리먼 파산 사태 이후, 모두 7조5105억 원어치 주식을 내다 팔았다. 해외 금융시장의 자금 경색이 좀처럼 풀리지 않는 데다가 연말이 다가오자, 자금확보를 위해 주식을 팔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외국인의 대규모 자본 유출은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 전망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외국계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정부가 연일 해외로 나가서 한국 경제를 홍보하고 있지만,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라면서 "중요한 것은 여전히 한국경제의 부실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경제학)도 "외국인들은 한국 정부가 제대로 된 원칙을 가지고 신속하게 구조조정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다"라면서 "이 같은 불신을 해소시키지 못하면 외국인의 한국 자본시장 탈출은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133조 원을 쏟아붓고도, 돈이 안 도는 이유

 

외환시장의 불안도 마찬가지다. 원-달러 환율은 이제 1500선 돌파를 눈 앞에 두고 있다. 한국과 미국사이에 통화 스와프(맞교환) 계약을 체결하고, 샴페인을 터뜨린 지 3주만이다.

 

정부는 그동안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690억 달러(85조 원)에 달하는 돈을 내다 풀었다. 여기에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 등에서 중소기업과 은행 쪽에 47조9000억 원에 달하는 돈을 풀었거나 풀 예정이다. 이들 원화와 달러를 모두 합하면 133조 원에 달하는 돈이다. 게다가 한은이 한 달 사이에 기준금리를 1.25%포인트나 낮췄다.

 

이 정도의 돈이 풀리고, 금리가 떨어졌으면 금융시장에 돈이 넘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이고 있다. 돈이 돌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업은 여전히 돈을 빌리기 어렵거나, 빌리더라도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한다.

 

이 많던 돈은 어디로 갔을까. 문제는 은행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어도, 이를 대출 등을 통해 시중에 돈을 풀어야 하는 역할은 은행 몫이다. 하지만 은행들이 제 몫을 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최근 들어 은행의 수익성이 크게 나빠지면서, 자신들도 살아남기에 급급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국내 금융기관들의 수익성이 하반기 들어 크게 악화하고 있는데다가 향후 국내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어떤 부실이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말대로 무조건 기업에 대출하거나, 시장에 돈을 풀기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또 다른 외환담담 임원은 "한미 통화스와프의 약효가 떨어진 지는 오래됐다"라면서 "문제는 외환시장의 불안정성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따라서 시장 일부에선 이미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혈세만 낭비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선 미국이나 영국처럼, 정부가 직접 기업이나 은행에 돈을 집어 넣어 사실상 국유화하는 특단의 조치까지 언급하고 있을 정도다.

 

신뢰 회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구조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이에 금융위기가 실물경제로 급속히 확산되고, 금융시장 불안이 지속될 경우 경제위기는 더 빨리,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전성인 교수는 "그동안 누누이 제기됐던 이야기지만, 현 정부의 경제위기 관리 능력이 의심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는) 제대로 구조조정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지금이라도 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을 내세워, 구조조정에 대한 방향과 원칙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라면서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고통의 시간만 길어질 뿐"이라고 강조했다.

 

유종일 교수도 "앞으로 물가와 금리는 더 오르고, 소득은 그대로거나 줄어들면서 더 힘든 날들이 이어질 것"이라며 "정부의 무분별한 규제완화나 건설사 지원은 위기의 해법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사회안전망을 더욱 늘리고,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금융시스템 개혁이 필요하다"라면서 "내수 위주의 경제성장 구조를 만드는 등 경제위기를 한국경제 구조 개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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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금융위기, #구조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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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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