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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학교에 가야했다. 맨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엄마, 아버지, 목사님 부부. 앞에는 뿔테안경 쓴 언니, 동생들이 차례로.
▲ 교회 산상예배(야외소풍) 갔을 때 가족사진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하필이면 학교에 가야했다. 맨 오른쪽 끝에 서 있는 엄마, 아버지, 목사님 부부. 앞에는 뿔테안경 쓴 언니, 동생들이 차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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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 들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어린 시절, 자주 흥얼거렸던 노래를 부르며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거제도로 가는 이날 따라 날이 흐리고 빗방울까지 떨어질 듯 하늘은 잔뜩 물을 머금은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

올해는 거제도 부모님 집에 자주 가는 것 같다. 봄, 여름, 가을... 하여튼 벌써 네 번째니 말이다. 가을걷이를 끝낸 뒤에 엄마는 고구마를 택배로 보내면서 올해 추수한 햅쌀을 함께 보낼까 묻는 전화를 했지만 거제도로 직접 가겠다고 말씀드렸었기에 모처럼 시간이 나서  출발하게 되었다.

엄마! 우리 엄마! 그 뜨뜻한 이름!

고향 마을에 밤이 찾아왔다.
 고향 마을에 밤이 찾아왔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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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린 날씨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말다 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벌써 고현을 지난다. 고현에 도착할 즈음 빗줄기가 제법 굵어진다. 여느 때 같으면 거제도 해안도로를 끼고 한바퀴 먼 길을 돌아서 드라이브도 하면서 갔겠지만, 거제대교를 지나 거리가 비교적 짧은 고현을 관통해 연초를 지나 하청을 거쳐 간다. 거가대교 공사로 고향 마을 입구는 길을 새로 닦고 있는 것이 보인다. 전에 보이지 않던 풍경이다.

내가 살았던 고향마을도 점점 옛 모습을 잃어가려나. 마을 한가운데로 난 차가 지나다닐 수 있는 길을 지나 바닷가 쪽으로 차를 돌린다. 흐린 하늘, 거센 바람에 고향바다는 높은 파도가 일렁이고 높이 이는 파도가 물보라를 일으켜 길 위에까지 바닷물이 튀어 오르고 있다. 흐리고 바람 부는 날의 조용한 고향마을은 을씨년스럽고 왠지 낯설게 느껴진다.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더위를 피해 골목 끝 담벼락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바닷바람을 쐬고 있던 마을 어른들도 날씨가 추워져서인지 보이지 않고, 텅 빈 의자들만 놓여 있다.쾌청한 날이면 더없이 푸른 하늘과 쪽빛 바다가 가장 먼저 반기겠지만, 잔뜩 흐린 이날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풍경이다.

바다를 끼고 있는 이 마을은 태풍이 불면 파도가 높이 이는 데다 마을의 낮은 집들을 금방이라도 덮쳐 집어삼킬 듯 바람과 파도가 합세해 작은 마을을 더 작게 느껴지게 한다. 고향집 골목 앞에서 차 시동 꺼지는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는 굽은 허리를 애써 펴며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엄마는 주름진 얼굴에 움푹 팬 볼에 흐뭇한 미소를 띠며 다가왔다.

"엄마!"

나는 아직도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보다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엄마보다 더 좋은 말이 어디 있을까. 엄마~라고 부르면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뜨뜻한 그 무엇이 뭉클뭉클 피어오른다. 그렇다고 내가 아주 살가운 성격이나 애교가 많은 그런 성격은 아니다. 밑에 동생들은 가끔 시골에 오면 엄마! 하고 부르면서 바로 엄마를 끌어안고 뽀뽀를 하곤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극성스럽게 애정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수확한 고구마들
 수확한 고구마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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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엄마!'하고 반가운 목소리로 활짝 웃는 얼굴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정도가 내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다. 어떻게 보면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위로 언니, 밑으로 쭉 동생들이 있다보니 맘껏 재롱을 부리지도 못하고 마음 속에 넣어두면서 자랐을 것이다.

"오느라 힘들었제?!"
"아아~뇨오~"
"쌀쌀하다, 얼른 들어가자!"

우리는 엄마의 젖가슴 사이에서 자랐다. 주어도 주어도 철철 넘쳐나던 엄마의 젖은 오랜 세월 속에서 지금은 말라 빈 주머니처럼 되었지만, 세월 지나도 엄마의 처진 가슴 속에는 자식 향한 사랑의 샘은 가이없다. 아버지는 엄마가 딸만 내리 넷을 낳고도 사람 좋은 웃음만 벙글벙글 입가에 띄우며 좋아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이웃 아저씨가 아버지한테 "아들도 못 낳은데 어디서 하나 낳아오소!" 하는 말을 듣고 자존심 강한 우리 엄만 기어코 다섯째를 잉태했고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그 다음엔 여동생이 태어났고, 또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 우리는 칠남매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나는 엄마의 자주 불러오던 배를 보았고, 자라면서 어린 동생들을 업고 놀았다.

적어도 넷째 동생부터 그 밑에 동생들까지 말이다. 넷째 여동생을 업고 외갓집까지 걸어 가다가 도랑물가에 넘어져서 이마에 큰 상처가 생겼던 적이 있는데, 어렸던 동생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자식 욕심 많은 엄마는 또 모성애도 유별났다. 나는 엄마가 일곱 자식 키우면서 단 한번도 자식 많아 힘들다고 하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다.

기도는 부모님의 사랑

골목에 저녁이 내리고 있다.
▲ 고향집 골목에 저녁이 내리고 있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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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이 탄 배가 순풍에 돛 단 듯 잘 흘러가던 때도 있었지만 또 한 가족의 삶을 위협하는 풍랑이 찾아와 삶을 위협했을 때에도 엄마 입에서 단 한번도 자식 많아 힘들다 하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기독교신앙을 갖기 시작했던 부모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우린 교회에 나갔고, 늘 부모님의 기도로 자랐다.

순풍엔 순풍이어서 감사, 고난의 폭풍 앞에선 이겨낼 수 있는 힘 주셔서 감사, 감사였다. 그렇게 우리는 엄마의 기도의 젖줄로 살았다. 사실, 모든 시련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셨고 기도로 자식들을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 고향에 부모님이 있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 옛날 내가 살던 이곳은 어린 시절만 해도 고샅 고샅마다 아이들의 뛰어노는 소리, 웃음소리, 울음소리, 떠들썩한 사람 사는 소리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일년에 초등학교 입학생이 한 명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라 하니 어린아이 뛰노는 소리 들릴 리 만무하고 젊은 사람들의 모습도 보기 힘드니 그야말로 마을은 고요함 그 자체다.

이곳의 오래된 낡은 집들처럼 마을과 함께 늙어가는 마을 사람들이 있고 마을은 빛바랜 사진처럼 흐리고 적요하다. 부모님... 오랜 세월 동안 이 땅에 기대어 살아오신 부모님, 많은 세상 풍파를 겪으면서도 그 시련의 바람에 꺾이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시련의 바람에 떠밀려 객지로 나가 떠돌기도 했던 십수 년의 세월,

세파에 떠밀려 이 땅을 버려두고 떠나야 했던 가족들, 그 가운데서도  부모님은 이 땅을 돌볼 수 없어 버린 듯 방치해 두고 다녔지만, 팔지 않고 끝까지 두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에 늘 자리 잡고 있던 이 땅을 다시 찾아왔고, 오랜 세월동안 주인 없이 버려진 것처럼 보였던 집은 십수 년 전, 부모님이 다시 들어오시면서 생기를 찾게 되었다.

끝까지 버리지 않아서 지금, 여기에 있다

작년 여름이었나보다...밭에서 콩도 따고 옥수수도 따면서...부모님의 모습이다...
▲ 밭에서... 작년 여름이었나보다...밭에서 콩도 따고 옥수수도 따면서...부모님의 모습이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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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다시 고향마을에, 그리고 추억이 살아 숨쉬는 이곳 고향집에 맘 내킬 때마다 올 수 있게 되었다. 동네 한가운데 있는 집, 세 개의 골목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이기도 했던 이 집이 주인 없이 버려진 듯 있었을 땐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주검처럼 오랫동안 폐허처럼 보였다. 객지에 살면서도 두고 온 고향집을 그리워하시던 부모님은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소도시에서 살던 삶을 접고 다시 고향집으로 낙향한 지 어언 십수 년째다.

이 땅에 다시 깃들어 살며 노년을 보내시는 부모님은 여기서 땅을 일구며 바다에 잇대어 살아가신다. 다음날 아침 일찍 가야 한다는 말을 들은 엄마는 어두워지는 밭에서 무를 뽑다가 하시는 말씀, "땅을 방치해 두었을지언정 버리지도 팔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 있다"고 그렇게 말했다. 내가 자란 고향마을이 여기 있고, 내가 자랐던 옛집이 그대로 있고 부모님이 여기 계셔서 언제라도 마음을 내서 올 수 있는 고향집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와 함께 추억을 쌓았던 그 누군가가 그 추억의 장소와 추억 속의 사람이 그리워져서 살다가 문득 이곳을 찾아왔을 때, 그대 그 추억의 장소와 사람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또 얼마나 반가우랴. 사실, 십수 년 동안 고향집을 비어놓고 객지에 나가 있을 때, 부모님을 찾거나 우리 남매들을 찾아 왔던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도 했다. 이번에야 안 사실인데,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그 시절, 제일 처음 교회가 우리 마을에 생겼을 때, 처음으로 부임해 오셨던 전도사님이 계셨다.

골목 옆에 놓인 의자들. 날씨가 추워 비어 있다.
 골목 옆에 놓인 의자들. 날씨가 추워 비어 있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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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디에 살고 계신지 가끔 궁금하기도 했던 나는 우연히 엄마한테 그분의 소식을 듣는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더니, 작년 가을에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목사님, 그때의 전도사님이 30년도 더 넘은 세월이 넘어서 찾아오셨더라고 엄마가 말해 주었다. 그 분의 소식만 엄마를 통해 들었는데도 마치 눈앞에서 뵙고 있는 것처럼 반갑고 기뻤다. 처음엔 너무 오래된 세월이라 엄마는 목사님을 몰라봤다고 했다.

웬 나이많은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엄마한테 "저기 있던 교회가 아직 있습니까?"하고 물어서 엄마는 "아니요, 교회를 마을 입구로 옮긴 지 오래됐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예, 제가 오래 전에 저기 교회에 있었습니다"하길래 자세히 보았고, 엄마와 목사님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다고 했다.

목사님은 "집사님, 제가 여기를 떠난 뒤로 단 한번도 집사님 가정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시더란다. 엄마는 너무도 반가워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어 했지만, 일행이 있었던 목사님은 잠시 후 떠나야 했고, 엄마는 밭에서 고구마랑 채소랑 있는 대로 가득 차에 실어주었었다고 얘기해 주었다. 작년에 있었던 일을 나는 이제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엔 종종 교회 옆에 있던 사택, 목사님 댁에 자주 심부름 갔던 기억이 난다. 뭐든지 맛난 것, 좋은 것 있으면 언제나 사택에 갖다드리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 부모님의 자식 사랑법

아버지와 아버지의 배.
 아버지와 아버지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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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힘에 부치게 노동하고도 늘 고기 한번 제대로 잡숫지 못하시는 부모님 생각에 거제도에 오기 전에 준비해 온 돼지고기를 굽고, 또 모처럼 삼계탕 재료도 준비해왔던 우리는 부엌에서 바쁘게 움직여 보았다. 우리가 온다는 연락을 받은 즉시 바다에 배를 타고 나가 그물어장을 놓고 오셨던 아버지는 샛바람(태풍)이 불어서 고기가 어망에 들지 않을까봐 걱정을 했고, 저녁을 드시고 난 뒤에 아버지는 또 말없이 밖으로 나가시더니 다음날 우리가 떠날 때 줄 쌀을 기계로 찧고 계셨다.

엄마는 또 엄마대로 장독대에서 된장을 퍼담고, 얼마 전에 택배로 고구마를 부치고도 또 더 주기 위해 고구마을 담고 나서 함께 밭에 가서 무, 파 등을 챙기느라고 저녁 늦게까지 바빴다. 저녁을 먹고 난 뒤에 나는 직접 엄마 머리를 파마를 말고 파마가 되는 동안 옛 이야기를 하다보니 밤이 되었다. 부모님은 늘 퍼주고 나를 비롯한 우리 형제자매들은 늘 받기만 한다. 부모님 마음은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는 마음이고, 자식은 받고 또 받아도 늘 받고 싶은 마음이다.

어릴 땐,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고 싶은 마음에, 형제들 많은 가운데 자라면서 입에 발린 것처럼 농담반 진담반으로 하는 말이, "엄마! 왜 내까지만 낳고 밑에 동생들은 낳지 말지!"하면서 형제가 많아 내게 올 사랑이 늘 부족한 것 같아 그렇게 투정을 하곤 했었다. 조금만 서운해도, 내게 돌아 올 사랑과 관심이 뺏기는 것 같아 서운했고, 극성맞은 자매들 사이에서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늘 사랑을 착취당하는 것 같기도 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덜 아픈 손가락이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나는 경험으로 또 알고 있다. 수년 전, 갑작스럽게 밤중에 병원 응급실로 갔던 나는, 다음날 이른 아침에 급하게 수술을 해야 했을 때, 가장 먼저 병원으로 온 사람은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 먼 거리를 사촌동생의 차를 타고 전속력으로 달려왔던 것은 남편도 그 누구도 아닌, 엄마였다.

엄마~라는 단어만 들어도 그 따뜻한 이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따뜻하고 온기 있는 이름, 그것은 우리 엄마다. 그때 난 알았다. 부모님의 깊고 깊은 사랑을! 부모님은 매년 봄이 돌아오면 가을걷이가 끝날 때까지 힘들어하면서 ‘내년엔 정말 농사 안해야지~’하시면서도 또 한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기운이 돌면서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봄볕이 따사롭게 비치기 시작하고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그 한해에 또 무엇을 심을까를 생각하며 봄이 오는 들녘으로 나가신다.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 몇 년전 사진을 디카로 다시 찍었더니 화질이 좋지 못하다.
 부모님의 다정한 모습. 몇 년전 사진을 디카로 다시 찍었더니 화질이 좋지 못하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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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땅을 일구고 파종을 하고, 심고 물주고, 거름을 주고 하면서 바쁘시다. 엄마는 마을 사람들이 버젓이 땅을 두고도 판판이 땅을 놀리고 있다면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종종 말한다. ‘자식들의 도시생활이 얼마나 힘든데, 자식들이 하루하루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지도 모르고 멀쩡한 몸을 갖고 땅이 있어도 밭을 갈지 않고 있는 것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내 한 몸 조금만 더 움직이면 얼마든지 정직한 땅이 소중한 선물을 내어주는데, 자식들이 오면 그런 것이라도 해 주면 얼마나 좋아!" 하시며 안타까워하신다. 엄마는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일곱 자식들 얼굴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들에 나가 파종하고 김을 매고, 이것저것 심고 가꾼다. 봄, 여름, 가을은 가장 바쁜 철이다. 헉헉대면서도 자식들 향한 사랑의 힘, 유별난 모성의 힘으로 엄마의 손은 바쁘다.

저녁이면 피곤해 쓰러질 듯 하다가도 다음날 이른 아침이면 기적처럼 거뜬히 일어나고 자식들에게 딱히 큰 재산은 물려줄 것이 없다 해도 이렇게라도 해서 도움이 되길 바라시며 기도하듯 땅을 일구고 파종하고 김을 맨다.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는 막내 남동생은 가끔 이렇게 말한다.

"도대체 아버지가 농사욕심이 많은 건지 어머니가 많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 말을 들어보면 아버지가 자꾸 이것저것 하자고 해서 한다 하고, 아버지 말을 들어보면 엄마가 자꾸 더 하자고 해서 한다고 하시니, 누구 때문에 자구 일을 많이 벌이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

언젠가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엄마가 모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유독 강한 것은 너희 외할머니를 닮아서 그렇다. 외할머니가 젊었을 때, 외삼촌들이 대동아전쟁과 6.25전쟁 때문에 군에 가 있을 때, 하루도 빠짐없이 정한수 떠놓고 밤새워 기도했고, 먼 지역에서 아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 넘고 물 건너 그 먼 거리까지 한걸음에 달려가셨다. 그리고 너희 작은 외숙모가 한쪽 수족을 못 쓰고 아파서 고생할 때도 온 산을 헤집고 다니면서 약초를 캐서 달여 먹여서 어느 약이 닿아서 나았는지도 모르게 깨끗이 낫곤 했니라.

너희 엄마가 외조모의 모성애를 그대로 닮았다. 자식들 생각해서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건강도 생각해야 된다고 누누이 말해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하면서도 막상 닥치면 잘 안되나 보더라. 말려도 소용이 없다."

우리 형제들도 가끔 모일 때면 부모님의 농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로 머리를 모아 지혜를 짜내기도 해보지만 그게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남동생은 "아버지가 책을 좋아하시는데 너무 바빠서 책을 못 읽으시니까 좋아하는 책을 부지런히 사드리면 어때?" "그것 괜찮겠다"며 모였을 땐 지혜와 의견을 모아보지만 제각기 생활하기 바쁜 일상 속으로 돌아오면 금방 잊어버리기 일쑤다.

그리고 막상 시골 부모님 집에 가면, 요즘처럼 믿고 사 먹을 것 없는 세상에서 부모님이 직접 가꾼 것을 갖고 오는 것을 우린 여전히 좋아하고 받기를 좋아한다. 엄마랑 옛 이야기를 하며 놀다보니 어느새 깜깜한 밤이 되었다.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장시간 운전으로 피곤해 하는 남편과 함께 남동생이 쓰고 있는 옥상에 있는 2층 방으로 올라갔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자 거실엔 붉은 고추가 그물에 널려 있었다.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추수한 나락과 고추를 말리는 모습.
 지난 가을에 찍은 사진. 추수한 나락과 고추를 말리는 모습.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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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고추를 다 말려서 고추를 빻아 고춧가루를 자식들에게 부쳐주고도 뒤에 또 밭에서 따온 고추를 말리고 있는 것이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엄마의 부지런함을 여기서도 본다. 마을은 어둠에 깊이 잠겨 있고 밖에는 바람소리, 파도소리가 마을은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높게 부는 거친 바람이 전깃줄을 건드리는지 윙~윙~ 우는 소리를 냈다.

불을 끄고 방에 누워 있어도 거센 파도소리와 바람소리는 밤새 잠들지 않고 이 낮은 마을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듯 뒤채고 있었다. 누워 있어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거실로 나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바다가 보이는 창이다. 하지만 깜깜한 어둠에 잠긴 바다는 보이지 않고 철썩이는 파도소리, 바람소리만 높았고 어둠에 잠긴 마을을 밤새 밝히고 있는 보안등만이 따뜻한 오렌지색에 가까운 노란빛을 내고 있었다.

밤새 파도소리, 바람소리 들으며 뒤척이다 다시 일어나 앉아 낡은 앨범을 뒤적거리다 또 누웠다가 하다가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부터 아버지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시고 안 계셨다. 어제, 우리가 온다는 얘기를 듣고 바다에 나가 어망을 쳐놓았는데 샛바람이 불어서 물풀들이 많이 엉키기 않았을까 내심 걱정하셨는데 아침 식사를 거의 다 했을 때 아버지는 바다에서 돌아오셨다.

손에는 작은 그물망태기에 싱싱한 꽃게랑 생선들이 제법 많이 담겨 있었다. 꽃게를 다듬어 꽃게 된장국을 끓이고 생선을 굽고 해서 아침상을 차리니 풍성한 아침 식탁이 되었다. 과묵하고 말없으신 아버지는 이렇게 자식들을 향한 사랑을 은근하게 표현했다. 엄마는 또 주고 또 주고 퍼고 또 퍼주어도 또 뭔가 미진한 듯싶은지 자꾸만 냉동실 문을 열고 아버지가 바다에 나가실 때마다 잡아왔던 생선을 다듬어서 얼려놓은 것을 꺼내놓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이 없나 살펴보곤 했다.

부모님의 사랑, 아낌없이 주는 사랑

어느새 우리가 타고 온 차 안에는 부모님이 챙겨주신 양식들로 가득 찼다. 햅쌀 한 자루, 무가 든 비닐포대, 고구마박스, 파, 된장, 콩 등 한차 가득했다. 우린 갑자기 부자가 된 듯한 마음으로 부모님께 인사하고 또 양산으로 출발했다. 부모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물건을 싣고서 고향마을을 벗어나 일상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부모님과 인사하고 차를 타고 고향집과 멀어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엄마와 아버지 두 분은 이쪽을 향해 서 계셨다. 문득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리고 그 나무에게 놀러 오는 귀여운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매일 나뭇가지에 매달려 놀기도 하고, 열매를 따 먹기도 하였다. 또 술래잡기도 하고,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다. 소년은 나무를 사랑하였다. 나무는 행복했다. 어느덧 소년은 청년이 되었다. 그에게는 다른 친구가 생겼다. 그래서 나무는 때때로 외롭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그는 나무를 찾아와 밑동만 남겨놓고 나무를 베어갔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다. 노인이 된 소년은 다시 나무를 찾아왔다. 나무가 말했다. "너에게 줄 거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어, 나는 밑동만 남았거든." "나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그저 앉아서 편히 쉴 조용한 곳이나 있었으면 좋겠어." 노인이 말했다. "앉아서 쉬기에는 늙은 나무 밑동이 최고야. 자 이리 와서 앉아." 노인은 나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나무는 무척 행복했다. - 셀 실버스타인, <아낌없이 주는 나무>

부모님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다. 나는... 마냥 받아도, 받아도 또 받았던 그 소년이었다. 늙어서까지 받기만 했던 동화 속의 그 사람이었다.

덧붙이는 글 | '가족에게 길을 묻다' 응모글입니다.



태그:#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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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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