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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진보싱크탱크인 코리아연구원과 공동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를 평가하고, 오바마 정부의 정책 방향을 분석하며, 한반도에 대한 영향을 전망하고 제언하는 특별기획을 진행합니다. 네 번째 글은 조성대 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가 집필했습니다. 이 글의 원문 및 관련 자료는 코리아연구원 홈페이지(www.knsi.org)에서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말]
연설하는 버락 오바마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자.
 연설하는 버락 오바마 차기 미국 대통령 당선자.
ⓒ 오바마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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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어려움과 좌절 속에서도 저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국의 꿈에 깊이 뿌리를 둔 꿈입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적 신조의 진정한 의미와 함께 살아갈 날 말입니다... 언젠가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 노예의 아이들과 노예주의 아이들이 우애의 식탁을 함께 하는 날 말입니다... 언젠가 불의와 압제의 열기로 뒤덮인 사막 미시시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변하는 날 말입니다... 언젠가 저의 네 명의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개성에 의해 평가받는 날 말입니다." (마틴 루터 킹.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연설문 중에서)

"그들(신세대)은 다양성과 평등성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세대이다. 의료보험정책에서 클린턴과 오바마가 얼마나 차별되는지 연연해하지 않는다. 누가 매케인을 더 잘 상대할런지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현 상황에 무척이나 식상해 있으며 변화를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오마바는 그들의 꿈을 실현해 줄 록스타(Rock Star)임이 분명하다."(뉴욕타임스, 2008/2/5)

미국의 흑인 지도자 킹 목사의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이 워싱턴 하늘에 울려 퍼진 지 45년이란 세월이 흐른 2008년 초 뉴욕타임스는 한 젊은 흑인 민주당 대선 후보를 미국사회를 흔들 '록스타'에 비유했다. 그렇다. 오바마의 백악관 입성은 적어도 150년 이상을 노예로 살아왔던 미국 사회 흑인들에게는 꿈의 실현을, 그리고 변화를 갈망하며 흑인 후보의 피부색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던 미국의 신세대들에게는 미국사회를 근저로부터 흔들어 보인 록스타의 빅 콘서트였다.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는 11월 4일 치러진 대선에서 국민투표에서는 53% 대 46%로 그리고 선거인단 득표에서는 365 대 173으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에게 완승을 거두었다. 의회선거에서도 민주당은 공화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상원의 경우 35개 주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11월 19일 현재 재검표 중인 2개의 선거구를 제외한 19개 선거구에서 승리하여 총 58석을 차지해 의사진행방해(filibuster)를 막을 수 있는 절대 다수 의석에 근접했다. 하원에서도 전체 435석 중 현재 재검표를 기다리는 5석을 제외하고 총 255석을 지닌 압도적 다수당이 되었다. 바야흐로 민주당의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어떻게 흑인 록스타가 백악관에 입성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록스타가 가져올 변화는 무엇일까? 필자는 지난 1월부터 현재까지 미국 현지에서 미국 대선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제대로 모양새를 갖춘 참여관찰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현지 학습을 토대로 오바마의 승리 원인과 그가 몰고 올 변화를 진단하고자 한다.

오바마의 승리 원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 가능하다. 하나는 부시 대통령의 실정과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문제점이다. 두 번째는 변화의 시대를 제대로 간파한 오바마의 리더십이다. 그리고 셋째는 오바마의 손발이 되었던 50개 주 전략과 신진보연대의 부상이다.

그리고 오바마가 가져올 변화는 아직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힘들지만 국내정치, 경제정책, 그리고 외교정책 분야에 있어 그간 오바마의 정치적 행보와 결과 그리고 대통령 인수위가 내놓은 오바마-바이든 플랜을 토대로 간단하게 예측하고 아울러 한국정치에 던지는 시사점까지도 모색해보고자 한다.

추락하는 부시와 '가짜(?) 매버릭' 매케인

오바마와 민주당의 승리 원인을 내부로부터 살펴보기에 앞서 공화당의 실패 원인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실패의 일등공신은 뭐니 뭐니 해도 날개 없이 추락하는 공화당 부시 행정부에 대한 국민 지지율일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던 2003년 3월 부시에 대한 지지율은 71%에 육박했었다. 위기 시에 하나로 뭉친다는 소위 '깃발효과' 때문이었다. 제2기 임기가 시작된 2005년 초만 하더라도 부시에 대한 지지율은 57%에 달했었다.

그러나 부시에 대한 미국인들의 지지는 2008년 1월 34%로, 5월 28%로 그리고 10월에는 급기야 25%로 곤두박질쳤다. 아울러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10월 중순 78%에 달했다. 속이 뒤틀려도 단단히 뒤틀린 것이다. 미국인들은 무엇 때문에 부시 행정부에게 이처럼 엄청나게 염증을 느낀 것일까?

무엇보다도 살벌하게 느껴지는 실물경제가 일순위로 꼽힌다. 2007년 중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금융손실과 부동산 가격 불안정, 2009년 9월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 메릴린치의 합병, 그리고 AIG의 파산 위기에 따른 대규모 금융위기 등은 작년 10월 1만4198포인트였던 다우지수를 2008년 10월 말 8375 포인트까지 끌어내렸다.

여기에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에너지가격, 현재 6.5%에 머물러 있으나 9%까지 예상되는 실업률, 500만명의 빈곤층 증가와 의료보험의 사각지대로 밀려난 시민 700만 명 증가, 최상위층과 하위층의 소득격차가 무려 13배에 달하는 소득양극화 등은 부시 행정부의 지난 8년간의 경제성적표이다.

두 번째는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이라크전쟁 상황이다. 천문학적인 전쟁 경비 그리고 날로 늘어나는 전사자(11월 초 현재 4200명) 등은 국민적인 피로감을 더했다. 미국 유권자들은 이라크전쟁이 막대한 비용과 전력을 쏟아부을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2008년 10말 '잘된 판단' 33%, '잘못된 판단' 64%), 부시의 이라크전쟁 수행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2008년 10월 말 지지율 32%). 한마디로 표현하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공화당 소속의 매케인 후보에게 더할 나위 없는 악재였음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이제 공화당 후보인 매케인으로 가보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해군제독이었던 집안출신, 그 자신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 해군 비행기 조종사로 베트남전 참전, 5년간의 포로생활, 베트남전쟁 영웅으로 성공적인 정치 입문, 재선의 하원의원과 4선의 상원의원 등 그의 이력은 미국사회 공당의 대통령후보로는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2월 5일 슈퍼화요일 대전을 기점으로 일찌감치 승기를 잡았던 매케인에게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있었다. 부시 행정부에 대한 지지율이 바닥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부시와의 거리두기는 필수적이었으나 공화당 후보가 공화당의 현직 대통령과 거리두기를 시도한다는 것은 결국 자승자박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매케인은 자신의 전통적인 닉네임인 '매버릭(maverick, 독자노선을 걷는 자)'을 주요 이미지로 설정했다. 매케인의 매버릭 이미지는 1990년 이후부터 민주당 의원들과 협력을 모색했던 그의 행보로부터 유래되었다. 1994년 민주당의 존 케리 상원의원과의 베트남수출금지조치철회, 그리고 2002년 공화당 주류가 거세게 반대했던 선거자금개혁법을 역시 민주당 상원의원인 러셀 파인골드와 추진했던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 외에도 매케인은 부시의 감세안 반대(물론 선거전에서 매케인은 부시의 감세안을 영구적인 정책으로 실행해야한다고 역설했다), 이민에 대한 관대한 입장, 그리고 테러리즘과 관련된 포로들에 대한 고문 등의 비인간적 처우 반대 등 당내 주류와는 상반된 입장을 취했었다. 이러한 그의 전력에 대해 당내 보수주의 주류들의 시선이 고울리 만무했다.

그들은 특히 사회적 쟁점에서 공화당의 전통적인 보수주의 노선과 시시각각 대립각을 형성했었던 매케인을 그들의 진정한 후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러시 림보같은 보수주의 논객은 차라리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해야 한다고 역설할 정도였다. 도덕적 이슈를 극화시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을 성공적으로 동원했던 2004년 부시의 재선전략을 매케인이 구사할 수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매케인의 매버릭 이미지는 오바마 후보와의 본선 대결에서도 먹혀들지 않았다. 몇몇 이슈에서의 당파를 초월한 행보 외에 지난 8년 간 부시 행정부가 추진했던 정책의 90%에 찬성표를 던졌던 그의 의정기록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부시의 이라크전쟁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그의 양면성은 결국 오바마 진영의 과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바마는 매케인이 매버릭이 아니라 또 다른 부시일 수밖에 없고 이미 지난 8년으로 족하다는 대대적인 광고와 유세를 전개했다. 더군다나 72세라는 그의 나이는 경륜을 상징할 수는 있었지만 변화를 갈망하는 유권자들에게 노회한 이미지밖에 줄 수 없었다.

변화, 상징주의... 오바마의 리더십

2008년 미국 대선의 키워드는 뭐니 뭐니 해도 변화였다. 이미 부시 행정부에 대한 미국인의 실망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듯이 변화의 바람은 2008년 신년 벽두부터 민주당 예비선거의 흐름을 좌우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1월 3일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민주당 투표자들의 52%는 미국사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덕목을 가장 중요한 후보자의 자질로 꼽았었다. 그리고 변화에 대한 주문은 6월 3일 몬태나와 사우스다코타의 프라이머리를 끝으로 민주당의 예비선거가 막을 내리기까지 50%대의 여론을 유지했다.

케냐 출신의 이방인 유학생의 아들, 부모의 이혼, 어머니의 재혼, 외조부모 밑에서 자라야했던 불우한 청소년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컬럼비아대학을 거쳐 하버드법대를 우등생으로 졸업한 유망한 변호사, 시카고에서의 지역운동과 인권변호사 생활, 1996년 일리노이 주의회 상원의원 당선, 그리고 2004년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당선이라는 경력을 지닌 47세의 젊은 흑인 오바마는 이러한 바람에 적격인 후보였다.

초기 민주당 예비선거는 한마디로 경륜과 변화의 대결이었다. 성공한 변호사, 전직 아칸소 주지사 영부인, 전직 대통령 영부인, 그리고 재선의 뉴욕 주 상원의원이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던 클린턴은 '미국을 위한 해결책(Solutions for America)'을 캠페인 슬로건으로 내걸고 유력한 선두주자로 내달리고 있었다. 클린턴은 민주당 예비선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전국 여론조사에서 45%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뉴데모크라트(New Democrats)라는 민주당 주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에 반해 아직 이렇다할 경력이 없던 오바마는 27%의 지지율에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바마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변화(Change We can Believe in)'를 캠페인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변화에 갈증을 느끼는 수많은 민주당원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작전은 적중했다. 변화라는 키워드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인 클린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다.

결국 그녀는 대중에게 '준비된 리더십(Ready to Lead)'과 '해결책(Solutions)'을 자신의 키워드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변화에 대한 갈증을 채워줄 수 없었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47세의 신예 흑인후보가 내세운 '미래(Future), 희망(Hope), 그리고 변화(Change)'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메시지는 이념이나 구체적인 정책으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기보다 오히려 마법이나 종교적 주술과도 같았다.

여기에 과거 케네디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달변의 젊은 후보 오바마가 던지는 매력과 카리스마는 클린턴을 노회한 정치인으로 대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뿐만 아니라 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가 킹 목사의 이미지는 흑인 인권변호사 오바마의 이미지와 겹쳐져 그에게 더할 수 없는 상징주의를 부여했다.

결국 오바마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미국적 신조를 실현한 신세대의 록스타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나아가 정당정치의 기본틀을 넘어 미국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전환형 지도자(transformative leader)'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다.

변화를 중심으로 한 오바마의 상징주의는 본선에서도 강력하게 작용했다. 우선 공화당의 72세 매케인 후보가 던져주는 이미지는 클린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변화라는 키워드를 간파하고 44세의 젊은 여성 알래스카 주지사 세라 패일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한편, '안정된 변화'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경험을 오바마와 차별화시키긴 했지만 이미 변화는 오바마의 소유물이었다.

예를 들어, 대선이 끝난 직후 출구조사에서 미국 유권자들은 변화(34%)를 경험(20%)보다 더욱 우선시했으며 이중 89%는 오바마를 선택했다. 물론 경험을 선택한 유권자의 93%가 매케인을 선택하긴 했지만 대세를 역전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흔히들 후보자의 자질을 평가하는 유권자들의 시선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이념적 렌즈에 의해 채색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보수적인 이념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후보자의 덕성(정직이나 강직 등)이나 이념성향을 보다 중요시 하는 반면, 진보적인 이념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후보자의 능력이나 감동을 주는 자질을 보다 중요시 한다. 오바마는 이러한 유권자들의 성향을 제대로 간파해냈다.

세 차례 열린 매케인과의 TV토론에서 오바마는 시종일관 '쿨(cool)'한 자세로 자신의 정책적 능력을 전달했으며 사회통합에 대한 그의 비전으로 유권자들을 설득시키려 했다. 반면, 매케인은 자신이 열세에 처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정책부분에서도 부시와 자신의 차이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했다. 특히 오바마의 '쿨'한 자세로 진지하게 토론하는 이미지는 흑인 대통령이 던져주는 막연한 불안감을 잠재우기에 충분했고, 무당파 유권자들에게 큰 매력으로 다가갔다.

출구조사에 따르면 오바마는 대중과의 친숙함에서 매케인을 44대 26으로 크게 따돌렸다. 이밖에 오바마는 백인과 고소득층을 제외한 모든 계층에서 매케인에게 앞섰다. 특히 처음 투표권을 행사했던 11%의 유권자들로부터는 69%라는 압도적 지지를 거두었다. 아울러 유권자의 29%를 차지하는 무당파에서 오바마는 매케인과 차이를 8% 벌였고 44%를 차지하는 중도적 이념성향의 유권자에서는 21%까지 격차를 벌였었다. 한마디로 오바마의 완승이었다 하겠다.

'오바마의 손발' 50개 주 전략과 신진보연대

오바마의 리더십과 더불어 오바마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민주당의 조직적 변화이다. 구체적으로 2004년 대선 이후 민주당 내에 정파로 형성되어 온 '신진보주의연대'는 이번 대선에서 오바마의 손발이 되었고, 1990년대 이후 빌 클린턴 대통령과 함께 절정기를 구사했던 '뉴데모크라트' 대신 민주당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0년 공화당 레이건 후보의 대통령 당선과 역시 공화당의 상원 다수당 장악은 민주당 내부의 전통적 노선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다. 일련의 민주당 세력은 소위 '레이건 데모크라트' 백인 중산층을 겨냥해 당의 전통적 노선을 수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뉴데모크라트'라는 깃발아래 1985년 민주당리더십회의(Democratic Leadership Council)를 시작으로 1990년 싱크탱크인 진보정책연구소(Progressive Policy Institute), 1997년 의회내 조직인 상하원 뉴데모크라트연대(House and Senate New Democratic Coalition), 그리고 1996년 사회조직으로 뉴데모크라트네트워크(New Democrat Network PAC) 등을 조직하면서 민주당의 주류로 자리매김 되어왔다. 특히 그들은 1990년 빌 클린턴을 DLC 의장으로 영입했으며, 1992년 그의 백악관 입성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뉴데모크라트 노선의 핵심은 1930년대 이후 민주당의 전통적 노선이었던 뉴딜진보주의로부터 보수적 회귀를 시도한 소위 '제3의 길' 노선이었다. 구체적으로 경제영역에서 국가영역의 확장반대와 시장친화적 성장, 문화부문에서 소수자 보호의 문화에서 보수적 주류문화로의 이동, 그리고 외교적으로는 상대적으로 군사력을 강조하는 강한 외교 등이 주요 골자를 이루었다.

아울러 그들은 열렬한 진보주의자로 대선승리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나 특히 당에 충성도가 높은 풀뿌리 시민조직을 동원해 다수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신화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992년 대선부터 민주당의 선거운동은 주로 카리스마 지도자의 힘과 스타일에 의존하고, 지도자 개인의 캠프가 선거운동의 중심이 되며, 풀뿌리 당조직 중심의 지상전보다는 방송을 통한 광고나 이미지 전달의 공중전을 강조하고, 원칙과 철학에 근거한 노선보다 그때그때의 쟁점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며, 당선에 유리한 접전 주를 집중 공략한다는 선거공학적 정치가 대세를 형성했다.

이념적 중도주의와 테크닉 위주의 뉴데모크라트들에게 이라크전쟁을 반대하며 50개 주 전체에서 풀뿌리 당조직을 재건해야한다는 하워드 딘이 반가울 리 없었다. 그들은 딘의 반전 메시지를 '정신 나간 자유주의(out of touch liberalism)'으로 매도했다.

심지어 2004년 5월 이후 이라크전쟁에 대한 미국인의 지지율이 급감하는 순간에도 민주당리더십회의(DLC)는 동료 의원들에게 부시의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판을 자제할 것을 당부하는 등 부시의 이라크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이라크전쟁 지지 또한  연장선상이었던 것은 당연했다. 아울러 2008년 그녀의 대선후보직 또한 조직적으로 뉴데모크라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4년 이후 12년간 의회선거의 패배와 2000년과 2004년 대선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민주당내 중도주의에 대한 회의와 진보주의로의 복귀를 갈망하는 새로운 세력의 등장을 가져왔다. 출발점은 하워드 딘이었다. 딘은 2003년 3월 가진 대선 출정식에서 "왜 그렇게 많은 민주당 의원들이 부시의 일방적인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며 포문을 열었다. 아울러 소위 빅머니의 특수 이익집단 정치를 거부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풀뿌리 당조직을 활발한 접촉하기 시작했다.

그의 반전 메시지는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 지지자들인 딘의 아이들(Deanie Babies)은 Meetup.com에 모어 온라인 정책포럼을 조직했고, 인터넷을 통한 소액 선거자금 기부를 독려했으며, 캠페인 아이디어를 직접 전달하거나 다른 사이트로 내용을 펌질하는 등 딘 캠페인의 손과 발이 되었다.

비록 당내 조직기반의 취약으로 인해 초기 예비선거에서 실패를 계기로 대선 도전은 접어야 했지만, 하워드 딘의 민주당 체질 개선에 대한 도전은 2004년 3월 미국을 위한 민주주의(Democracy for America)의 설립에 이어 2005년 2월 민주당전국위원회(Democratic National Committee) 의장으로 취임하면서 재개되기 시작했다.

그는 접전 주들에 집중한다는 종래의 선거공학적 사고를 '50개 주 전략'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모든 주의 모든 지역단위의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당 조직을 재건한다는 방침이었다. 딘은 우선 모든 지역단위에서 젊고 헌신적인 젊은 후보자들을 발굴하여 지방정치 영역에 투신하도록 했다. 둘째, 모든 지역단위의 유권자 명부를 취합해 전국 유권자 명부를 만들어 우편물, 이메일, 혹은 온라인 활동이나 직접 방문을 통해 수시로 접촉할 수 있게 했다.

셋째, 소위 지상군을 조직하기 위해 선거전문가, 자원봉사자, 그리고 주정당 조직 운영자들을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넷째, 기존에 중앙당이 관리하며 접전 주들에 쏟아부었던 정치자금을 직접 주정당 조직으로 내려 보내고 아울러 주정당의 이름으로 직접 정치자금을 모집함으로써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결과는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갖춘 주 정당 조직의 부활이었고, 덕분에 2006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은 상하원 의회선거에서 모두 승리할 수 있었다. 특히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캔사스, 인디애나, 몬태나 등에서 의석을 건진 것은 뉴데모크라트 전략가 제임스 카빌이 "그러지 말고 접전 주에 더욱 집중했으면 더 많은 의석을 건졌을 것"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당의 실행위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기에 충분했다.

50개 주 전략으로 조직된 지상군들에게 오바마는 그들의 후보로 적격이었다. 변화와 미국적 신조를 상징하는 그의 리더십은 한 때 뉴데모크라트의 아성에 젖어있던 당을 조직, 협력, 그리고 구조를 갈망하는 당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활동가들과 쉽게 결합될 수 있었다. 그들은 2004년 '딘의 아이들'에서 2008년 오바매니아(Obamania)로 기꺼이 변신했다.

MoveOn, ACORN, Netroots Nation, America Coming Together, Power PAC 등과 같은 수많은 풀뿌리 조직들은 오바마를 위해 유권자 선거등록과 인터넷 정치자금 모금, 그 밖의 선거운동에 발 벗고 나섰다. 결과는 수백만의 새로운 민주당원의 탄생이었고 인터넷을 통해 오바마에게 소액 헌금을 한 사람들만 3백만이 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민주당 내의 민주파'로 불렸던 이 풀뿌리 조직들은 세계적인 거부인 조지 소로스, 할리우드 스타들, 그리고 영화감독 마이클 무어 등의 명사그룹과 진보적 싱크탱크인 진보미국을 위한 센터(Center for American Progress)와 함께 자연스럽게 '신진보연대(New Progressive Coalition)'의 흐름에 합류되었다. 신진보연대는 뉴데모크라트를 실현불가능한 중도주의 신화에 매몰된 당의 이단아로 규정했다.

아울러 민주당은 1930년대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과 1960년대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 프로그램, 그리고 1970년대 문화적 자유주의를 결합한 정통적인 진보주의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4일 오바마의 대선승리는 결국 민주당 내 신진보연대의 승리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라 하겠다.

'록스타'가 가져올 미국의 변화

이제 세계는 록스타가 가져올 구체적인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아직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지 않은 상태라 이를 예측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이다. 그러나 선거기간 중 오바마의 유세내용과 대통령직 인수위가 내놓은 오바마-바이든 플랜을 토대로 한국정치에 민감한 관계를 지니는 분야들을 중심으로 간단하게 진단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목할만한 변화의 첫 번째 항목은 오바마의 리더십이 가져올 미국 정치지형의 변화이다. 이미 살펴본 쌍방향 의사소통구조에 기반을 둔 사이버공간과 다양한 풀뿌리 시민조직의 네트워크는 오바마 리더십의 강력한 버팀목이다. 특히 신진보연대 네트워크는 앞으로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할 변화와 개혁의 전위부대 역할을 할 것이다. 딘과 오바마의 50개 주 전략은 장기적으로 미국 정치지형의 변화, 즉 정당재편성(party realignment)을 가져올 것이라는 예측도 제기되고 있다.

오바마는 이번 선거에서 과거 뉴데모크라트들이 집중했던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그리고 플로리다 등 접전 주에서 승리했을 뿐만 아니라 1964년 린든 존슨의 승리 이후 40여 년간 공화당의 아성이었던 남부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에서도 승리했다. 오바마는 아울러 2004년 부시가 승리했던 콜로라도, 네바다, 뉴멕시코에서도 승리함으로써 민주당의 취약지역인 중서부 지역으로의 진출에 대한 교두보를 쌓는데도 성공했다. 이미 오바마는 이들 풀뿌리 조직들을 선거가 끝난 후에도 지속 가능한 조직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바 있으니 지켜볼 대목이다.

두 번째 변화는 경제구조의 개혁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미국사회 소득양극화와 실업률 증가, 그리고 빈곤층의 확대문제는 오바마 행정부가 해결해야할 가장 시급한 문제이다. 오바마-바이든 플랜은 미국경제의 회생을 위해 1) 미국 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즉각적 행동 2) 난관에 처한 가족들을 위한 구제책 3) 모기지 회사에 대한 구제금융이 아니라 실질 주택소유자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 4) 금융위기에 대한 신속하고 적극적인 대응이라는 4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규직을 창출하는 기업에게 1인당 3천 달러의 세금감면과 도로, 교량, 그리고 학교의 재건을 통해 100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청사진은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플랜이 진보적인 케인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읽게 한다.

무역플랜은 특히 한국이 주목해야할 분야이다. 오바마-바이든 플랜의 무역 분야의 원칙은 한마디로 공정무역이다. 무엇보다 국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무역이어야 하며, 더불어 국제적인 노동과 환경 기준을 준수하는 자유무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해외로 일자리를 옮기는 기업에 대한 세금감면 혜택의 중단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개정은 우선순위로 배정되어 있다.

한미FTA도 재검토되어야할 정책임을 오바마는 선거공약을 통해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이는 최근 논의되고 있는 자동차산업에 대한 구제금융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상하원에서 다수의석을 장악하고 있는 민주당 의회 또한 이구동성으로 오바마 행정부와 호흡을 맞출 것이다.

세 번째 변화는 안보측면에서 미국의 국제적 위상의 변화이다. 한국 역시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분야이기도 하다. 오바마-바이든 안보플랜은 원칙적으로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정책에 종언을 고하고 국제협력을 토대로 21세기의 도전을 헤쳐나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심지어 적성국들과도 전제조건 없이 과감하고 직접적인(touch and direct) 안보외교를 전개할 것이며 구체적인 분야로 테러리즘 그리고 이란과 북한의 핵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북핵 문제에 있어 오바마는 일본과 한국과의 강한 연대를 통해 6자회담에 접근하고자 한다. 아울러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담대한 만남도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이미 밝힌 바 있다. 오바마-바이든 플랜은 이밖에도 2010년 여름까지 이라크로부터 단계적 철군, 관타나모 수용소 폐지, 지구온난화 방지 국제협약 참여, 국제평화봉사단 추진 등 다자주의 국제협력 노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오바마의 미국변화구상이 한국에 지니는 함의는 무엇일까? 먼저 딘과 오바마의 50개 주 전략은 한국정당정치가 나아가야할 길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지역당을 조직하고, 지역으로부터 일꾼을 길러내며, 의석확보에 유리한 지역보다는 사고지역에 더욱 집중하는 전략은 많은 비용을 수반함에도 불구하고 단기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전략은 분명 아니다. 오죽했으면, 뉴데모크라트 전략가 베가라(Paul Begala)가 50개 주 전략을 두고 "몇몇 스태프들을 고용해 유타와 미시시피를 유람하면서 현지 사람들을 귀찮게 할 뿐"이라고 폄하했겠는가.

그러나 아래로부터 지상군을 육성한다는 50개 주 전략은 수년간의 노력 끝에 2006년 중간선거와 2008년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대승을 가져다주었으며 장기적인 정당재편성까지 내다보게 하고 있다.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정치 과제를 안고 있는 한국정당, 특히 호남의 틀에 갇혀 여전히 신음하고 있는 민주당이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할 대목이다.

둘째, 오바마가 한미FTA의 재검토를 천명한 이상 한국도 이번 기회에 한미FTA에 대한 접근을 면밀하게 재검토했으면 한다. 한국이 먼저 의회비준을 해서 미국을 압박해야 한다는 사고는 상대를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일일 수 있다. 더군다나 한미동맹을 매개로 문제를 접근하는 자세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공정무역의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 조항을 고쳐나가겠다는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더 유익한 접근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바마가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겠다면 남북관계에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겠는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아예 이번 기회에 한국이 북핵문제에서 적극적인 피봇(pivot, 회전축의 중심을 일컫는다. 국제정치의 영역에서는 균형자가 될 능력이 없는 국가가 최소한의 거부권을 매개로 완충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함을 의미한다)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주문하고 싶다.

다시 말해, 오바마와 김정일의 회담을 한국이 적극적으로 주선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이를 위해 중국과 러시아의 협조를 구해내는 일 또한 한국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라 판단된다. 문제는 이명박 행정부가 과연 이 일을 진심으로 할 의지가 있는지 여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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