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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의 원작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들이 충돌하는 무대로서 '도박의 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드러내놓지는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숨기고 있다. 그러한 욕망을 현실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도박의 세계이며, 그 무대 속에서 허황된 탐욕에 물든 인간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먹이로 삼는 존재들이, 바로 도박판의 숨은 기술자 '타짜'들이다.

 

허영만 작가의 원작은 도박꾼 세계의 생생한 리얼리티를 그려내고 있지만, 그 본질은 단지 화려한 도박 기술이나 게임의 긴박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감춰진 수많은 인간군상들 그 자체에 있다. 도박은 카드나 패를 걸고 하는 게임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인간대 인간이 서로 욕망을 놓고 펼치는 팽팽한 심리전에 있다.

 

영화 <타짜>는 원작만화의 이러한 매력을 비교적 생생하게 스크린에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1부 '지리산 작두'를 각색하여 만들어진 영화는,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된 원작의 방대한 캐릭터와 스토리를 주인공 고니를 중심으로 압축하며, 고니가 타짜가 되는 과정과 평경장·정마담·아귀로 이어지는 네 핵심인물들간 복수와 대결의 복마전으로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했다.

 

만화와 영화의 눈부신 성공을 바탕으로 가장 마지막으로 리메이크된 <타짜>의 드라마 버전은 많은 이들에게 흥행 보증수표로서의 기대감을 가지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드라마는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엇갈린 반응을 끌어내며 기대만큼의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평균 10~15% 이상의 시청률이 실패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만화나 영화가 보여준 반향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 사실이다.

 

<타짜>의 부진은 만화·영화와는 또 다른 TV 드라마라는 장르 자체가 가지는 표현의 한계와, 원작의 매력포인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잘못된 기획에 있다.

 

드라마 <타짜>의 지향점은 궁극적으로 도박을 모티브로 한 액션활극에 있었다. 이점은 사실 영화도 마찬가지였지만, 드라마는 이것을 고니 측와 아귀의 대결을 통한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더욱 단순화시켰다. 여기서 도박은 단순히 모티브일뿐, 다른 무엇으로 대체시켜도 큰 지장이 없을만큼 소재가 지닌 특수성은 줄어들고 착한 고수(타짜)가 악한 고수를 응징하는 무협극 스타일의 활극으로 변질되었다.

 

절대고수(평경장)로부터 무공(도박기술)을 전수받은 두 제자(작두와 아귀)가 선과 악으로 나뉘어 싸우게 되고, 그 와중에 아버지를 잃은 아들(고니)가 복수를 위하여 다시 절대고수를 찾아가 무공을 배우고 강호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리고 여기에 또다시 대를 엇갈린 친구들의 우정, 헤어진 첫사랑과의 재회 같은 요소들이 끼어든다. 여기서 '도박'이라는 키워드를 빼고 살펴보면, 기업이야기나 형사드라마, 사극 등 어떤 장르에 갖다붙여도 무난한 복수극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만화나 영화가 그려내는 도박의 세계는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비열한 거리'였다. 생존을 위하여 작은 패 하나에 인생을 걸고, 끊임없이 서로를 속고 속이며 누구도 끝까지 믿을수 없는 타짜들의 세계란 곧 우리네 삶의 어두운 축소판과도 같다. 영화에서는 고니가 도박의 세계에 빠져드는 과정과 활약상을 철저히 개인적인 욕망의 발로에서 접근했으며, '절대악'으로 대표되는 아귀와의 중간 지점에 고니 편도 아귀 편도 아닌 정마담이라는 모호한 인물을 투입시켜 선과 악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만화 원작이 주는 생생한 리얼리티도, 영화가 보여줬던 복마전 구도의 물고물리는 매력도 반감됐다. 불특정 다수가 시청하는 TV라는 매체 특성상, 도박 장면을 만화나 영화처럼 생생하게 재현하기란 처음부터 무리였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느와르적인 구성을 드라마에서 구현하기에는 너무 어두웠다. 나중에는 스토리를 끌고 가기에도 힘겨운 모습을 보이며 기존 느와르나 액션물에서 한번쯤 보았음직한 설정들을 안이하게 재탕하는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드라마가 지향한 것은 만화도 영화도 아닌 '제3의 길'이었다. 드라마는 원작의 기본적인 구도와 캐릭터를 그대로 계승했지만 스토리는 드라마의 매체 특성에 맞추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만화나 영화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컨텐츠로서 차별화시키려는 전략은 좋았지만, 궁극적으로 원작이 지닌 매력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그 본질까지 간과했다.

 

배우들의 연기와 캐릭터는 대체로 훌륭했다. 단지 '영화와 비교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영화판 조승우의 고니가 유머러스하면서도 약삭빠른 타짜의 면모를 잘 살려냈다면, 장혁은 좀더 우직하고 다혈질적인 터프가이의 모습이다. 영화판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좀더 부각시킨 것이 특징이지만, 장혁의 연기는 심리전에 능한 노련한 타짜로서의 면모를 살리는 데는 부족했다. 장혁은 <고맙습니다>같이 오히려 눈에 힘을 빼는 연기에서 좀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으나, 감정을 과도하게 분출하는 분노 연기나 부담스러운 터프가이 캐릭터에서는 10년전 <짱>이나 <햇빛속으로> 시절에 비하여 별로 발전한 것이 없다.

 

악의 축을 이루는 아귀 역을 맡은 김갑수는 영화판의 김윤석이 보여주던 카리스마 넘치는 위협적인 마초이라기보는, 좀더 치밀하고 교활한 책략가형의 인물로 재구성되었다. 또한 드라마는 스토리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영화판의 김혜수가 연기했던 정마담의 캐릭터를 강성연의 정마담과 한예슬이 맡은 난숙에게로 비중을 분산시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영화판이 정마담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팜므파탈의 캐릭터가 상당히 반감되는 부작용을 나타내기도 했다. 영화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평경장이나 고광렬의 비중은 줄어든 반면, 드라마 판에서 새롭게 탄생한 난숙과 영민의 캐릭터가 극 전개에서 차별화된 활력을 제시할만큼 확실한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한 것도 아쉬운 부분.

 

궁극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드라마 <타짜>의 인물들이 TV판으로만 기억될 수 있는 생동감있는 캐릭터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영화판 <타짜>에서의 아귀나 정마담, 혹은 비슷한 시기에 방영된 MBC 수목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 같은 캐릭터 자체가 화제가 되었던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드라마판의 인물들은 배우가 아닌 캐릭터 자체로 화제가 된 적이 거의 없다. 시청자들은 드라마속 <타짜>에서 극 중 캐릭터가 아닌 배우들의 이미지를 먼저 보았다. 배우가 캐릭터를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배우의 이미지에 기대어 캐릭터를 억지로 끌고가는 수준에서 그쳤다는 것이 드라마 <타짜>를 평작에 그치게했던 근본적인 한계인지도 모른다.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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