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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앞서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투쟁 속에 동지 모아 손을 맞잡고 가자

열이면 열 천이면 천 생사를 같이 하자

둘이라도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산이라면 어기여차 건너 주자.

고개 넘어 마을에서 목마르면 쉬었다 가자

서산 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 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 주고

산 넘고 물 건너 언젠가는 가야할 길 시련의 길 하얀 길

가로 질러 들판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 길 하얀 길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 김남주,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모두

 

전사시인 김남주… 민족시인 김남주… 너무나 낯익고도 살가운 그 이름. 선생님 생가에 서서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입니다. 지난 1994년 2월 13일, 그 놈의 몹쓸 췌장암을 끝내 이겨내지 못한 선생님께서 30kg 남짓한 바짝 마른 몸만 남겨두고 이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훌쩍 흘러버렸습니다.

 

그 긴 세월동안 저는 식의주에 마구 쫓기느라 선생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해남에 있는 선생님 생가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에 있는 선생님 묘소도 다시 찾지 못했습니다. 선생님 이름만 떠올리면 이 세상이 너무 얄밉고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9년 남짓 살다 나온 선생님은 출옥한 뒤 5년 남짓밖에 살지 못했습니다. 

 

그때 선생님은 이미 옥중에서 췌장암이란 큰 병을 얻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췌장암이란 게 정기검진을 받아도 잘 눈에 띠지 않았던 관계로 선생님과 주변 사람들은 까맣게 몰랐습니다. 선생님은 저와 주변사람들에게 늘상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힘이 없어야, 힘이 하나도 없어야~"라고.

 

그때마다 저와 주변사람들은 선생님에게 "옥독 때문일 겁니다. 좀 지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정말 죄스럽습니다. 사실, 조금만 더 일찍 알았어도, 정밀 검진을 몇 차례만 더 받아 보았어도, 선생님은 마흔 아홉이라는 나이로 이 세상을 등지지 않아도 될 뻔했습니다. 어리석은 문인들에게 침을 퇘 뱉어버리십시오.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어둠을 사르고야 말 불빛인지도

그 노래인지도 몰라라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두

 

선생님 생가 앞에 있는 마늘밭을 바라보아도, 어른 몸뚱이만한 배추밭을 바라보아도, 실하게 뿌리 내린 무밭을 바라보아도, 바람에 만장처럼 휘날리는 걸개시를 바라보아도 그 안쓰러운 생각이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생가 앞마당 작은 공원에 있는 선생님 흉상과 시비, 초가집 안채를 둘러보아도 '그때 참 어리석었다'라는 생각이 자꾸만 가슴을 툭툭 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반외세, 분단극복, 광주민주화운동, 노동운동 전선에 서서 온몸과 마음을 던져 싸운 선생님을 지키지 못한 이 못난 후배들과 주변 문인들을 크게 꾸짖어 주십시오. 지금도 선생님 생가에는 초가지붕 위로 카랑카랑한 선생님 목소리가 이 땅의 시인을 비웃는 시가 되어, 이 힘든 세상을 질타하는 비수가 되어 이 세상 곳곳으로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가슴이 떨립니다. 선생님 육성시를 듣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가슴 저 밑바닥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분노와 저항이 끓어오릅니다. 선생님께서 반독재를 위해 목숨까지 내던졌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 세상은 모래세계처럼 다시 10년 앞으로 되돌아가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독재의 구멍이 다시 뚫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인들도 오랜 싸움에 지쳐버렸는지, 아니면 지난 10년 동안 민주주의가 다져지는 세상에 너무 안주하고 있었던지, 좋은 시가 나오지 않는 것만 같습니다. 촛불집회에도 열심히 다녀 보았지만 시인들의 참여도 예전과 같지 않았습니다. 슬픕니다. 소설가 김영현 형은 말하더군요. "만약 선생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문단이 이렇게 나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대 꼬리 붙들고 까부는 사람들 용서 좀 하시게나'

 

못난 시 버리고 억울한 삶 깨치려 땅끝에 왔네

끝과 시작을 여닫는 바닷가에 서서

보길도 보고도 고산 모르는 가슴 없는 사람들 바라보며

고정희 김남주 생가에서 사진만 찍는 눈 먼 사람들 바라보며

그대 품기 위해 반역의 눈 두리번거리네

세상은 백내장 걸려 흐릿하네

여기 저기 마음 썪는 내음 지독하지만

사람들은 아이 좋아 아이 좋아 몸 둘 바 모르네

해남 들 가로질러 보길도로 부는 바람에

눈 다시 씻고 눈 다시 크게 뜨네

안 보여, 당달봉사 된 것 같아

참은 죽고 거짓만 월출산 바위처럼 촘촘촘 박혀

시는 스러지고 시인들만 조개껍데기처럼 널브러져

보길도 등에 업고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파도에

나이스 큐! 오마이 갓! 즐거운 비명 지르네

참시 주우러 새 삶 주우러 땅끝에 왔다가

그 초심마저 갯바위 속에 유배되고 말았네

만나는 사람 모두가 시인인 나라

방방곡곡 시들이 병신춤 추는 나라

그 나라에 시가 없다네

그 나라에 희망이 없다네

세상살이 아파 가슴에 서러운 핏물 솟구쳐

해질 무렵 방파제에 쪼그리고 앉아

묵은지 안주 삼아 막걸리 씹어 마시네

젓갈 안주 삼아 조선을 갈아 마시네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잊고 씻고 싶네

세상 잊고 나 잊고 시 씻고 시인 씻어낸 그 자리

비로소 조선이 참 싹 틔우고

이제야 시가 참 싹 틔울 수 있지 않겠나

바람 센 땅끝마을에 서서 막걸리에 까빡 취해 그대 부르네

시여, 세상이여

그대 꼬리 붙들고 까부는 사람들 용서 좀 하시게나

 

- 이소리, '땅끝마을에 서서' 모두

 

지난 11월 18일(토) 오후 4시. 저는 '한국문학평화포럼' 일행 50여 명과 함께 제9회 '김남주 문학제'와 '해남문학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선생님 생가를 찾았습니다. 처음으로 선생님 흉상 앞에 국화꽃 한 송이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흉상이 빤히 내려다 보고 있는 생가 앞마당에서 졸시를 한 편 읽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갑자기 1994년 2월 초 서대문 한 병원에 처참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선생님 새까만 얼굴과 새까만 눈빛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시를 그 따위로 써야 쓰겄냐?" 하는 선생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다른 한편으로는 "그래, 열심히 써야제"라며 등을 다독여주는 선생님 손길이 느껴져 고마웠습니다.

 

그때 문학에세이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와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 출판 관계로 이승철 시인과 함께 선생님 얼굴을 뵈러 간 그날, 그 만남이 선생님과 이승에서의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선생님이 누워계신 병실 창문에서 하얀 비둘기떼가 하늘로 푸더덕 날아올랐을 때 눈치챘어야 했습니다. 위대한 전시시인의 마지막 길을.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서야 알았습니다. 서울에서 민주사회장을 치룬 뒤 광주로 와서 전남대 앞으로 노제를 지내려 가려 할 때 전경들이 꽉 막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전경들을 향해 "너희들은 김남주 시인 저승길 가는 것도 막냐?"라며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전경들이 슬며시 길을 터주더군요. 선생님은 역시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전사였습니다.

 

 

'강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도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감옥으로 압송되어 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구옥일까 아니면 대전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 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나도 여기서 차에서 내려

아이들이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저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나도 그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사슬 풀고 오라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을 걷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 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집으로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춰 주지를 않는다

강을 건너 내를 끼고 땅거미가 내린 산기슭을 달린다

강 건너 마을에는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하얗게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옷의 수인이다

 

- 김남주, '이 가을에 나는' 모두

 

선생님 생가에 어둠이 깃들고 있습니다. 서울과 지역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과 이 지역 주민들이 선생님 집 앞마당에 빼곡하게 모였습니다. 밤바람이 제법 맵차게 불고 있지만 모두들 선생님 흉상처럼 꼼짝 않고 마당에 퍼질고 앉아 선생님을 기리는 문학제와 문학축전을 열심히 바라보고 듣고 있습니다.

 

생가 들머리 길목에는 누군가 모닥불도 활활 피워놓고 있습니다. 그 모닥불 불티 속에 선생님을 처음 만나던 때가 스쳐 지나갑니다. 1988년 12월 21일, 9년 3개월이란 긴 옥살이에서 벗어난 선생님은 옥독을 미처 풀기도 전에 제가 총무간사로 일하고 있었던 '민족문학작가회의'를 찾아오셨지요.

 

일일이 인사를 하며 악수를 나누던 선생님의 환한 모습, 그 모습에서 저는 그 어디에도 전사라는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새까만 얼굴. 늘 미소를 띤 얼굴, 누구나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성격을 가진 선생님은 문단에서 떠도는 말 그대로 '물봉'(물렁하고 사람 좋아 어물하다는 뜻) 그 자체였지요.

 

그렇게 시작된 선생님과의 인연은 제가 한길사로 자리를 옮겨 사설 문예교육기관 '한국문학예술대학' 사무국장을 맡아 일할 때까지 주욱 이어졌습니다. 그때 시창작반 담임교수를 맡은 선생님께서는 아침 일찍 제가 일하는 사무실에 나왔다가 학생들을 가르친 뒤 저녁 늦게까지 제자들과 함께 학교 주변에 머물러 있었지요.

 

민족사의 큰별 김남주 시인, 그는 영원히 살아 있다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많은 사람이 실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수천 명이 죽어갔다

수만 명이 죽어갔다

아니 수백만 명이 죽어갈지도 모른다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세계도처에서 나라 곳곳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산악에서 감옥에서

압제와 착취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 김남주 '전사2' 몇 토막

 

사람을 너무나 좋아했던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에도 제자들과 함께 때론 노래방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때론 생맥주집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가르쳤지요. 저도 업무 도중에 수없이 불려 나갔습니다. 아니, 선생님 수업이 있는 날은 그날 오후 업무를 아예 실무간사였던 오현숙씨에게 맡겨놓아야 할 정도였지요. 

 

그때 선생님은 노래방에 앉아 학생들이 비디오에서 비춰지는 영상과 노랫말에 따라 노래 부르는 것을 바라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도 말이야, 저렇게 시에 맞는 영상을 만들어 시인이 읊으면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거야. 저런 걸 연구 좀 해 봐."라구요. 생맥주를 마실 때도 그랬습니다. "시를 말이야, 이런 생맥주잔에 새겨놓으면 술맛이 훨씬 더 좋지 않겠어"라구요.  

 

그랬습니다. 선생님은 늘상 이 세상 모든 것을 시의 대중화에 초점을 맞추려 했습니다. 그때 선생님 조언에 따라 임헌영 선생님과 함께 만든 단체가 '영상문학연구회'였지요. 물론 선생님께서도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셨지요. 게다가 저희 학교에서 '여름문학학교'나 '문학기행' 등 여러 문학행사을 할 때에도 선생님은 빠지지 않고 참석해 문학강연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모두가 시의 대중화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고맙습니다.

 

밤이 점점 깊어갑니다. 선생님 생가에서 열린 문학제와 문학축전도 모두 끝이 났습니다. 이제 저희들도 선생님 생가를 떠나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선생님께 드릴 말씀은 너무나 많지만 오늘은 이만 마칠까 합니다. 끝으로 선생님 이름을 다시 한번 저 별빛 박힌 하늘에 또렷이 새깁니다. '민족사의 큰별 김남주 시인, 그는 영원히 살아 있다'라고. 

 

스스로 전사이기를 원한 민족시인 김남주 

전국 최초로 유신 반대 지하신문 <함성> 제작

 

 

민족시인 김남주(金南柱, 1946~1994)는 1946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 봉학리에서 아버지 김봉수와 어머니 문일님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남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광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때 획일적인 입시위주 교육에 반발해 자퇴한다. 1969년에는 검정고시로 전남대 영문학과에 입학해 3선 개헌 반대 등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1972년 유신헌법이 선포되자 이강(李綱) 등과 전국 최초로 반(反)유신 지하신문 <함성>을 제작했으며, 1973년 제호를 <고발>로 바꾸어 전국에 뿌리려다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8개월)되면서 대학에서 제적당했다. 1974년에는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잿더미' '진혼가'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75년에는 광주에서 사회과학 전문서점 '카프카'를 열었으나 경영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1977년에는 고향 해남에서 '한국기독교농민회' 뿌리가 된 '해남농민회'를 만들었으며, 같은 해 광주에서 황석영 등과 '민중문화연구소'를 열고 활동하다 사상성 문제로 1978년 서울로 피신,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에 가입했다.

 

1979년 '남민전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15년을 선고 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1984년 첫 시집이자 옥중시집 <진혼가>를 펴냈다. 1988년 12월에는 형집행정지로 9년 3개월 만에 석방되었으며, 1989년 남민전 동지 박광숙(소설가)과 결혼했다. 1990년에는 '한국문학예술대학' 시창작 담임교수와 '민족문학작가회의' 민족문학연구소장을 맡았다.

 

1992년에는 건강 때문에 민족문학연구소장에서 물러나 단식, 한방치료 등을 통해 투병생활을 했으나 몹쓸 췌장암을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1994년 2월 13일 이 세상을 떠났다. 시인이라기보다 스스로 전사라 부른 선생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에 묻으러 가는 그날, 전남도청 앞에서 지내려던 노제까지도 전경들이 가로막아 마지막 가는 길까지 전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시집으로 <나의 칼 나의 피>(1987) <조국은 하나다>(1988) <사상의 거처>(1990) <이 좋은 세상에>(1993)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1995) 등이 있으며, 시선집 <사랑의 무기>(1989) <학살>(1990) 등이 있다. 산문집으로는 <시와 혁명>(1991), 문학에세이 <불씨 하나가 광야를 태우리라>(1994) <피여 꽃이여 이름이여>(1994), 번역 평론서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프란츠 파농, 1978) 등 여러 권이 있다.

 

신동엽창작기금(1991), 단재문학상(1992), 윤상원문학상(1993), 민족예술상(1994)을 받았다. 2000년 5월 광주 중외공원에 시비 <노래>가 세워졌으며, 2007년 5월에는 생가 복원과 함께 앞마당에 흉상이 세워졌다. 유족으로 부인 박광숙 여사와 아들 토일 군이 있다. <이종찬 기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태그:#민족시인 김남주, #해남, #김남주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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