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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종교 자유화, 군대 폐지 등을 주장하며 명실상부 우리 사회의 이슈 메이커로 자리 잡은 강의석의 말을 빌리자면, 군대에서 죽는 건 '개죽음'이라고 한다. 이에 격분한 누리꾼들이 '그럼 서해교전 전사자의 죽음은 뭐냐?'고 묻자 그는 똑같이 '개죽음'이라 표현했다. 개죽음의 사전적 의미가 '아무런 보람이나 가치가 없는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니, 뭇 누리꾼들의 융단포화에 미니홈피가 박살나고 유가족들이 사과 요구를 할 법 하다.

 

당시 '개죽음' 관련 이야기를 접했던 나 역시 다소 마뜩치 않은 기분이 들었었다. 파격적인 주장과 상식을 깨는 퍼포먼스를 통해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던 문제, 혹은 누구나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문제 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공론화하고 활발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려는 그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됐다 하지만 그것이 꼭 과격한 표현으로 특정 인물을 꼬집거나 비틀고, 그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형태로 이뤄져야 했는지, 그 표현 방식과 문제제기 방법에 아쉬움이 많았던 탓일 거다.

 

그런데 최근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이 14개 과거사위원회를 통·폐합하는 내용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개정안 등 15개 관련법 개정안을 발의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닌 권력자들"이라던 강의석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신 의원이 발의한 개정안은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등 13개 위원회는 진실화해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로 통합하고, 올 12월 활동 기한이 만료되는 군의문사위원회(이하 군의문사위)는 폐지하고 미결사건은 진실화해위로 이관토록 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난 2006년 출범한 이후 현재까지 군의문사위에 진정된 사건은 600여건. 그 중 절반 수준인 322건이 종결되었고 나머지 278건은 아직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 3월 군의문사위가 기자회견에서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진상을 규명한 43건 가운데 5건(11.6%)은 타살을 단순 사고나 병사 등으로 은폐 및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또 진상규명된 43건 중 절반이 넘는 25건(58.1%)에서 구타나 가혹행위 등 심각한 인권침해 요소가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걸 밝혀냈다고 한다.

 

많은 조직이 그러하듯, 군대 역시 조직의 안위와 윗선의 보위를 중요시한다. 그래서 인명사고와 같은 큰 사건도 군의 이름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여론에 오르내리지 않기 위해,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거기에 오랜 시간 군부독재 정권이 이어지면서 군에 대한 대중의 공포심은 진실을 파헤치려 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만들었고, 이는 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현실에서 군의문사위는 지금까지 성역처럼 여겨졌던 군 내 의문사에 대한 가려졌던 진실을 밝혀내는데 힘썼다. 그로 인해 억울하게 죽고도 그 사인조차 은폐·조작되어야 했던 망자의 명예를 기렸다. 동시에 명확하지 않은 자식의 사인을 납득할 수 없음에도 변변한 항의조차 할 수 없이 그 고통과 슬픔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아야만 했던 유가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어 왔다.

 

 

그런데 그런 군의문사위가 이제 활동 기한이 끝나가 일각에서는 기한 연장을 추진하고 있는 마당에, 여당 의원인 신지호 의원은 통·폐합을 주장한다. 신 의원은 그 까닭으로 군의문사위에서 하는 일은 진실화해위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며, 따라서 굳이 개별위원회를 따로 둬 국민들의 혈세를 낭비할 게 아니라 종합백화점 격인 진실화해위 한 곳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게 하면 된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군의문사 진상규명은 계속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좀 더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거다.

 

일견 그럴 듯 해 보이지만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말이 엉터리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진실화해위와 군의문사위가 하는 일은 다른 것으로 지금까지 전혀 중복된 적 없고, 따라서 군의문사위의 일을 진실화해위로 이관하려면 진실화해위 아래 또 하나의 새로운 소위원회를 조직해야 한다. 소위원회는 상임위원 1명과 비상임위원 4명을 포함하여 5명 정도로 구성되는데, 현재 군의문사위의 위원 수가 7명임을 감안하면 신 의원의 주장처럼 예산을 크게 줄이는 효과도 없을 거란 얘기다.

 

MB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실용'을 기치로 내걸었다. '실용정부'라 불릴 만큼 모든 분야에 실용을 접목하려 애썼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땠나? 실용외교 한다더니 미·중·일한테 외면당하고 개성공단은 문 닫힐 위기에 처했다. 실용경제 한다더니 내수 박살나고 수출 휘청거려 내년 경제 성장률 2%대를 전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실용교육 한다더니 국제중 지어서 사교육비 끌어 올리고 좌편향 없앤다고 멀쩡한 교과서 가지고 색깔 논쟁이나 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아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 회복에 일조하는 과거사정리위원회에까지 '실용'의 잣대를 들이대려 한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그게 무슨 실용이냐?'며 반문하는 지경이다.

 

위원 숫자 2명 줄이고 장관급 개별위원장 자리에 들어가는 돈 1억 5천만 원이 아까워 실용 운운하는 거라면, 조직을 새로 만들고 새 사람 뽑아 인수인계 절차를 거쳐 업무숙달에 이르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에 대한 금전적 환산은 해봤는지 묻고 싶다. 더구나 개별위원회가 아닌 진실화해위 산하 소위원회가 됨으로써 군의문사위가 개별위원회로 가졌던 전문성을 상실하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더 이상 군의문사 진상규명에 대해 신뢰하지 않는다면 설사 세금 몇 푼을 아낀다고 그게 무슨 큰 이익이 될 것인가?

 

군 의문사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실용이 아니다.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기관과 위원들, 그리고 그것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지막으로 은폐·조작된 거짓 속에서 진실을 파헤치려는 노력이다. 신 의원이 이번 발의한 개정안은 그 모든 것들을 일순 앗아가 버릴 가능성이 농후해 보인다. 군의문사위가 존치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말처럼 군대에서 죽는 것을 개죽음이라 해도 우린 할 말이 없게 된다.

 

현 정권 출범 이후 우리 군은 국방부 장관까지 나서서 '강한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강한 군대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는 '신뢰받는 군대'일 것이다. 자국민으로부터 신뢰받지 못하는 군대가 강한 군대이면 무엇 하나? 군에 대한 국민들의 깊은 불신, 땅에 떨어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유지하고 무엇을 없애야 하는지, 정부와 여당, 그리고 군은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태그:#군의문사위원회, #신지호, #과거사위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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