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작가 이종득 2008 몰운대문학축전에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있는 작가 이종득
작가 이종득2008 몰운대문학축전에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있는 작가 이종득 ⓒ 이종찬

 

"미진은 휴게실에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생각한다. 가출 소녀와 가출 소년, 가출한 가정주부를. 그 가출한 가정주부는 미진 자신이다. 그러나 그녀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가출이 아니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여행이라고 스스로 위안한다."-29쪽, '이미 준비된 길' 몇 토막

 

길, 온통 길뿐이다. 그 길은 오래 전부터 준비된 길도 있고, 무작정 앞만 보고 걷다가 길 위에서 찾은 길도 있다. 인생을 들고 가는 나그네 앞에 놓인 길은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다. 몇 해 앞 그 여자, 죽도록 사랑했던 그 여자가 떠나는 길도 있고, 그 길을 따라 걷다가 길 위에서 잃어버린 길도 있다.  

 

길은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처럼 그저 바람에 묻혀 가는 길도 있고, 아스라한 절벽 아래 하얀 어둠의 길도 있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 산맥처럼 높고 허리케인처럼 거센 파도에 부서져 버린 난파선 위에 놓인 길도 있고, 가난한 어부들이 진종일 바다를 그물질하며 살고 있는 바닷가로 가는 길도 있다. 

 

저만치 하늘과 바다가 입맞춤하며 갈매기 서너 마리 바람에 펄럭이는 빨래처럼 널어놓은 수평선으로 가는 길도 보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길 혹은 바다 위로 난 길도 보인다. 거기 또 다른 길과 연결된 길도 보이고, 노을처럼 불그스레한 빛이 있는 길도 보이고, 지금 그가 떠나는 길도 보인다.

 

지난 11월 끝자락, 작가 이종득이 펴낸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에는 여러 갈래 길이 거미줄처럼 촘촘촘 얽혀 있다. 베트남에서 반신불수가 되어 돌아온 아버지와 결혼해 '인석'을 낳는 어머니가 걷는 길도 엉겨 있다. 사랑하는 '미진'과 이별을 하고 결혼소개소에서 만난 '선영'에게 혼인빙자간음죄로 고발된 '인석'이 걷는 쓸쓸한 길도 꿰어져 있다. 

 

나는 그동안 걷고 또 걸었다

 

"또 한 번의 시월이 다 가고 있다. 앞산 뒷산 할 것 없이 모조리 불타오르고 있다. 활활 타오르고 있다. 그 끄트머리에서 나는 망연한 눈으로 서 있다. 매번 그렇게 나는 서 있거나 자빠져 있었다…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는 그동안 걷고 또 걸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작가의 말' 몇 토막

 

강원도 홍천에서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두 딸을 데리고 살고 있는 작가 이종득(47)이 첫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도서출판 화남)를 펴냈다. 1998년 중편소설 '바람의 끝은 어디인가'로 제42회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니, 등단한지 꼭 10년만이다.

 

모두 13장으로 짜인 이 소설은 꿈과 현실, 자아와 세계란 양극에 헝클어져 있는 삶의 뿌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미 준비된 길, 길 위에서 찾은 길, 그 여자가 떠나는 길, 길 위에서 잃어버린 길, 바람에 묻혀 가는 길, 하얀 어둠의 길, 난파선 위에 놓인 길, 바닷가로 가는 길, 수평선으로 가는 길, 밤길 혹은 바다 위의 길, 또 다른 길과 연결된 길, 불그스레한 빛이 있는 길, 지금 그가 떠나는 길이 그것.

 

작가 이종득은 "내 소설에 등장하는 평범한 내 이웃들 혹은 친구들, 그들과 더불어 살았고, 앞으로도 그들과 살며, 그들과 기쁨을 같이 나누고, 그들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주면서 살아갈 것"이라며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을 고발한 여자 품에 안겨 함께 복상사하다

 

이종득 첫 장편소설 <길, 그 위에서서> 모두 13장으로 짜인 이 소설은 꿈과 현실, 자아와 세계란 양극에 헝클어져 있는 삶의 뿌리를 움켜쥐고 있다
이종득 첫 장편소설 <길, 그 위에서서>모두 13장으로 짜인 이 소설은 꿈과 현실, 자아와 세계란 양극에 헝클어져 있는 삶의 뿌리를 움켜쥐고 있다 ⓒ 이종찬

"잠을 자는 듯이 누워 있는 남자.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올려놓고 있는 여자. 여자의 오른쪽 다리가 남자의 사타구니 위에 올려져 있다. 누드 사진을 일부러 찍은 것처럼 남자의 성기를 교묘하게 감추고 있는 사진이다. / 나는 여자의 포동포동한 엉덩이 살을 꼬집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13쪽, '이미 준비된 길' 몇 토막

 

이 소설은 세상과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왕따' 당한 주인공 '왕인석'이 자신을 혼인빙자간음죄로 고발한 '선영'의 품에 안겨 같이 복상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석'과 '선영'의 주검이 형사에게 발견되자 그와 관련된 주변 사람들은 그의 흔적을 더듬어보기 위해 과거를 향한 긴 여행을 떠난다.

 

전쟁고아였던 인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고아원에서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면서 사랑을 싹틔우기 시작한다. 그렇게 어머니와 사랑을 속삭이며 어른이 된 아버지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그만 반신불구가 되어 돌아온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따스하게 끌어안으며 마침내 결혼을 해 인석을 낳는다.

 

아버지는 인석이 세 살 되던 해 이 세상을 등지게 되고, 인석은 그때부터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다. 청년이 되어 대학에 들어간 인석은 야학선생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급기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 3년 형을 받고 수감된다. 인석이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새벽기도를 다니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죽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살붙이로부터 온통 '왕따' 당한 인석이 갈 길은?

 

"인석은 이모의 부탁을 딱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임장을 써주었다. 그런데 그가 만기 6개월여를 앞두고 특별사면 되어 어머니와 같이 살던 집을 찾아갔지만 그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전세로 들어와 살고 있었다. 이모의 말인즉슨 가게를 인수받는데 포목점을 판 돈 가지고는 모자랐다는 것이다."-37쪽, '길 위에서 찾은 길' 몇 토막

 

인석이 교도소에서 나오자 이모는 어머니가 남긴 모든 재산을 털어 가게를 차리고 있다. 그때 이모부가 가게 보증금을 몽땅 빼 가지고 줄행랑을 치고, 이모마저 집을 빼 자식들을 데리고 멀리 도망을 간다. 여기에 인석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진과의 깊고도 오랜 사랑마저 깨지고 만다.

 

미진 부모님의 반대도 심했지만 인석은 자신 앞에 놓인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사랑하는 미진을 함부로 붙잡을 수도 없다. 그 뒤 인석은 결혼소개소에서 만난 선영에게 혼인빙자긴음혐의로 고발된다. 유치장 신세를 진 인석은 이 세상에 환멸을 느껴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지만 이내 싫증을 내고 만다.  

 

산속 생활이 신선들이나 하는 허세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인석은 원양어선을 타기로 마음을 굳히고 오래 전에 말소된 주민등록을 살리기 위해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에 도착한 인석은 자신에게 결혼하자는 말을 꺼냈다가 거절당한 영애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을 고발했던 선영을 품는데…. 

 

혹독한 시대에 휩쓸린 한 사내에게 바치는 슬픈 일기장

 

"……미안해요……제가……잘못……했어요……."

"인석의 시선에 낯이 익은 버스가 들어온다. 그가 타고 온 버스가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석은 수화기를 놓지 않는다. 버스 속에 배낭이 실려 있다는 생각도 떠올랐지만 선영의 흐느끼는 목소리를 잘라낼 수 없다." -249쪽, '지금 그가 떠나는 길' 몇 토막

 

작가 이종득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는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군사독재정권이란 어려운 시대에 휩쓸려 모든 것을 잃어버린 한 사내를 위해 주변사람들이 바치는 슬픈 일기장이다. 그 일기장 속에는 갈 길을 잃고 헤매다 이 세상으로부터 '왕따' 당한 채 자신을 고발한 여자 품에 안겨 함께 복상사하고 마는 한 사내가 나온다.

 

근데, 그 사내는 왜 그렇게 쓸쓸하게 살다 가야만 했을까. 그 사내가 감옥에서 나온 뒤 사회변혁운동에 뛰어들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왜 그 사내는 그토록 사랑하는 여자가 부모의 반대로 멀어져가는 것을 보고도 자신의 불안정한 미래 타령이나 하면서 붙잡지 못했을까. 세상이 그 사내를 버린 게 아니라 그 사내가 이 세상 앞에 무릎 꿇어버린 것은 아닐까.

 

작가 김영현은 "온통 길 천지이다. 인간과 인간, 운명과 운명, 삶과 삶 사이에 놓여 있는 이 거미줄 같은 길을 따라 작가는 때로는 길을 찾기도 하고, 잃기도 하며 힘겨운 의미 추적에 나선다"며 "이 소설은 그 누구도 주연이 아니고 그 누구도 조연이 아니다. 모두가 자기 삶의 주체이며 동시에 타인에 대한 객체가 되어 각자의 길을 찾는다."고 평했다.

 

강원도 홍천에 살고 있는 작가 이종득은 196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1998년 중편소설 '바람의 끝은 어디인가'가 제42회 <문학사상> 신인상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 뒤 중편소설 '옥이', 단편소설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포대장과 송마담' '가을과 겨울 사이'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한국문학평화포럼> 이사.

 

작가 이종득 작가 이종득(47)이 첫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도서출판 화남)를 펴냈다
작가 이종득작가 이종득(47)이 첫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도서출판 화남)를 펴냈다 ⓒ 이종찬

다음은 지난 11월 15일(토) 오후 5시, 강원도 홍천에 있는 홍천관광호텔 3층에서 열린 '이종득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작가와의 일문일답이다.

 

-언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가?

"지금으로부터 18년 전, 1990년 서른 살이 되던 그해 겨울부터였다. 그리고 8년이 지난 뒤 제42회 <문학사상> 신인상에 졸작 '바람의 끝은 어디인가'를 투고, 소설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다." 

 

-서른 살 때부터 소설쓰기를 시작했다면 좀 늦은 나이다. 물론 마흔 살(1970년 소설 '나목')에 가까운 나이에 등단한 박완서(1931~)도 있고, 오십 살(1998년 계간 <문학동네> 장편소설 '한 모금의 당신' 연재 시작했으나 곧 중단)에 소설을 쓰기 시작한 김훈(1948~)도 있지만. 뒤늦게 왜 소설을 쓰려고 했는가?

"나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그들과 함께 있는 그 시간이 행복하니까. 내가 쓴 소설 속에 인물들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찮은 사람들이지만, 힘없고 돈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진실에 가까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을 그려내는 소설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설을 쓰면서 어려웠을 때는 없었는가?

"늦은 나이에 아내를 만나 두 딸(지금 다정 5살, 의정 2살)을 얻었다. 나는 가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소설쓰기를 멈춰야 했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소설이 밥이 되지 않는 세상이기에 지난 10여 년 동안 소설쓰기를 포기하고 학원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

 

-그렇다면 이번에 펴낸 장편소설 <길, 그 위에 서서>는 어떻게 나오게 되었는가?

"한동안 소설을 쓰는 것은 포기했지만 언제까지나 소설쓰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난 여름 오래 묵은 3.5인치 플로핏 디스켓을 뒤져보니 10여 년 앞 내가 쓴 글들이 있었다.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나에게 아프다, 아프다 아우성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들은 내 게으름으로 너무 오랫동안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나는 그때부터 그 인물들을 이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작가의 고향은 전북 익산이다. 홍천을 택한 까닭은?

"나는 마흔 살 나이에 접어들면서 소설만 쓰면서 살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머물 장소를 찾아 여러 곳을 다녔지만 홍천에 있는 산골마을이 첫 눈에 마음에 쏘옥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홍천에 살면서 이웃도 만들고, 가족까지 생겼으니 홍천이야말로 제2의 고향이 아니겠는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 계획인가?

"돈도 없고 힘도 없었던 스무살 시절부터 나는 사람 모두는 행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 희망은 지금도 포기할 수 없다. 동광무역, 동양정밀, 풍국산업 기숙사에서, 성남시 단대시장 난장에서, 화곡동, 신림동, 미아리, 면목동 등의 먼지 자욱한 지하공장 기숙사에서 나는 그렇게 외쳤다. 내가 소설쓰기를 포기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길, 그 위에 서서

이종득 지음, 화남출판사(2008)


#작가 이종득#길 그 위에 서서#홍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