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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장 강가에 자리 잡은 충칭 거대한 창장(長江)처럼 인근의 수많은 민초들을 어우르며 거대하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 충칭은 재미있고 대단히 입체적인 매력을 지닌 도시이다.
창장 강가에 자리 잡은 충칭거대한 창장(長江)처럼 인근의 수많은 민초들을 어우르며 거대하게 발전하고 있는 도시 충칭은 재미있고 대단히 입체적인 매력을 지닌 도시이다. ⓒ 김대오

밤새 수많은 협곡을 돌고 터널을 지나 800여km를 달린 기차는 충칭의 아침에 연수단을 내려준다. 중국 속담에 “10리를 가면 풍습이 다르고 100리를 가면 언어가 다르다(十里不同风, 百里不同俗)”고 하니까 시안에서 2천리나 떨어진 충칭의 모습이 사뭇 달라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일 것이다. 충칭은 시안과 대조되는 젊음과 활기가 넘쳐난다. 그것은 아마 싼샤(三峽)댐 건설로 서부 물류 수송의 거점도시로 거듭난 충칭의 힘일 것이다.   

1997년 3월, 중국의 네 번째 직할시로 지정된 충칭은 총면적 3만 2,500㎢에, 3,200만 인구를 지닌,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1189년, 남송의 왕자였던 조돈(趙惇)이 왕에 봉해지고 바로 한 달 만에 광종(光宗)에 즉위하여 ‘경사가 겹쳤다(雙重喜慶)’는 의미로 충칭(重慶)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데 싼샤댐 건설로 급속한 현대화와 호황을 누리게 된 충칭의 경사가 과연 장기적으로도 경사스런 일이 될 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어링공원에서의 한-중 배드민턴 대결

아침을 먹기 위해 어링(鵝嶺)공원 근처의 식당으로 향하는데 도시의 풍모가 지금까지 보았던 중국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개성과 멋이 느껴진다. 우선 산비탈을 따라 발달된 만큼 충칭은 도시 자체가 대단히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충칭사람들은 방향을 말할 때 동서남북으로 하지 않고 상하전후로 표현하고 그래서 다른 도시에 가면 금방 방향감각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라고 한다.

기차에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진수성찬으로 아침을 먹고 시간이 남아서 어링공원에 산책을 갔더니 역시 중국 어딜 가나 공통적인 아침공원의 다채로운 운동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어링(鵝嶺)공원  아침산책 삼아 올라간 어링공원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링(鵝嶺)공원 아침산책 삼아 올라간 어링공원에서 태극권을 연마하는 중국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 김대오

태극권을 연마하고 삼삼오오 춤을 추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정겹게 외국관광객들의 카메라세례를 맞이해 준다. 공원 정상쯤에 이르자 중국인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다. 연수단 최정용 선생님과 함께 그곳 아저씨들과 한 세트에 100위엔(우리 돈 2만원) 내기를 걸고 시합을 하게 되었다. 물론 라켓이나 셔틀콕은 모두 중국 아저씨들에게서 빌린 것이었고 나는 샌들이고 최선생님은 맨발로 시합에 나섰다.

학교 동호회에서 익힌 실력으로 첫 세트를 아슬아슬하게 우리가 이기자 공원에서 제일 고수 분들이 등장한다. 공원에 아침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둥그렇게 몰려들어 한-중 배드민턴 시합을 관람하는 가운데, 두 번째 세트도 접전 끝에 우리 팀이 이겨 그 공원의 고수들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조금 미안하였지만 막상 시합이 시작되니 승부욕이 생겨 질 수가 없었다. 중국 분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공원을 내려오는데 창지앙(長江)과 지아링지앙(嘉陵江)이 합류되는 강가로 형성된 충칭의 도시 전경이 발 아래로 훤히 내려다보인다. '촉나라의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蜀犬吠日)'는 말이 있을 정도로 충칭은 안개 끼는 날이 많다고 하는데 역시 뿌연 아침 안개 속에 현대화된 빌딩들이 강가에 갈대처럼 솟구쳐 있는 모습이다.

'중국의 게르니카', 아픔 딛고 부활하는 충칭

버스를 타고 충칭인민대회당으로 향하는데 현지 가이드는 안개 끼는 날이 많아 충칭에는 하얀 피부색의 미녀가 많고 그래서 운전 중에 미녀들을 보느라 교통사고도 자주 발생한다고 소개해 버스 안에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하지만 가이드가 충칭의 역사를 소개하자 버스 안은 이내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일본군이 국민당 정부의 수도였던 충칭에 1938년 2월부터 1943년 8월까지 총 약 2만 발의 폭탄을 민간인 지역에 무차별적으로 투하해 사망자만 약 1만 2천명에 달했다는 내용이었다.

충칭은 그러니까 '중국의 게르니카'였던 셈이다. 도시 곳곳에 아직도 흉물스럽게 남은 방공호는 당시의 참혹했을 아픔을 묵묵히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동안 대단히 현대화된 번화가를 보면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화려하게 부활한 충칭의 발전상이 놀라웠다.

충칭인민대회당 중국 서남부의 행정업무를 담당할 목적으로 1954년 준공된 충칭인민대회당이 최근 호화롭게 변모했다.
충칭인민대회당중국 서남부의 행정업무를 담당할 목적으로 1954년 준공된 충칭인민대회당이 최근 호화롭게 변모했다. ⓒ 김대오

버스가 한 군부대를 지날 즈음 가이드가 1979년 2월 발생한 중-월 전쟁에 대해 얘기를 꺼내려 하자 우리 버스에 월남 중국어 교수가 타고 있는 것을 안 중국인 인솔 교수가 발빠르게 말을 가로막았다. 아쉽게도 두 나라의 재미난 논쟁거리를 놓쳤다.

늘 좌우를 살피며(顧左右而言), 터놓고 얘기하는 것(開門見山)을 꺼리는 중국인들의 속성을 잘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사실 중-월 전쟁에서 먼저 공격을 하고도 더 큰 희생을 본 것은 중국이었기 때문에 월남 교수님은 연신 괜찮으니 얘기하라고 했지만 가이드는 끝내 그 문제에 입을 닫았다.

먼저 중국 서남부의 행정업무를 담당할 목적으로 1954년 준공된 충칭인민대회당에 도착했다. 아침 시간이어서 태극권과 다양한 체조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베이징 티엔탄(天壇)공원의 기년전(祈年殿)을 연상시키는 원형건물을 중심으로 옆으로 뻗어나간 충칭인민대회당은 중국공산당의 정통성을 뽐내듯 위엄 있는 자태로 서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충칭중국싼샤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이 광장에는 박물관에서 도망쳐 나온 듯한, 기원전 11세기 이 부근에서 살았다는 전설적인 파인(巴人)의 동상이 알몸으로 활을 쏘고 있다. 언덕이 많아서 짐을 운반할 때 충칭사람들은 주로 멜대를 사용하는데 광장에 포도를 짊어지고 가는 모습이 정겨워서 포도 두 근을 사려는데 의외로 비싸 한 근에 7위엔(우리돈 1400원)이나 부른다.

'작은 충칭'으로 불리는 전통문화의 축소판 츠치커우(磁器口)

츠치커우 고문화거리 츠치커우는 '작은 충칭(小重慶)'으로 불리며 전통문물들이 어우러진, 살아 숨쉬는 충칭문화의 축소판이다.
츠치커우 고문화거리츠치커우는 '작은 충칭(小重慶)'으로 불리며 전통문물들이 어우러진, 살아 숨쉬는 충칭문화의 축소판이다. ⓒ 김대오

충칭인민대회당을 뒤로 하고 찾은 곳은 충칭의 고문화거리 츠치커우(磁器口)였다. 중국 10대 전통마을의 하나라는 츠치커우는 원래 '바이이아창(白崖場)'이라 불리던 곳으로 송대(998년)부터 발전하다가 명대에는 유명한 상업 부두로, 청대에는 청화(靑花)자기공장이 유명하여 츠치커우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개발을 제한하며 보존하고 있는 츠치커우는 고풍스런 건물에 다양한 먹을거리와 충칭의 전통문물들이 어우러진, 살아 숨 쉬는 충칭문화의 축소판이다.

'작은 충칭(小重慶)'으로 불리며 충칭의 민속문화박물관으로 자리 잡은 츠치커우에는 과연 다양한 먹을거리와 볼거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장비(張飛) 탈을 쓰고 고기를 파는 집들이 있어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장비가 원래 고기와 술을 파는 상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화(麻花)'라는 밀가루를 꽈배기 모양으로 꼬아서 튀긴 과자가 있는데 츠치커우에는 천마화(陳麻花)라는 이름의 가게가 많았다. 그런데 유독 한 가게 앞에만 긴 줄로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어 이유를 물었더니 천창인(陈昌银)이 개발한 마화는 향과 맛이 탁월하고 바로 구워서 주기 때문에 더 인기가 높다는 것이었다. 구수한 향기에 입안이 얼얼한 독특한 마라맛과 바삭바삭한 것이 한여름인데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천마화 가게가 여럿 있었지만 유독 이 가게 앞에만 사람들이 이렇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천마화가게가 여럿 있었지만 유독 이 가게 앞에만 사람들이 이렇게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 김대오

다른 선생님들은 한자이름을 글씨와 그림으로 장식해주는 10위엔짜리 액자를 많이 만들었고 베이징보다 값이 싼 중국전통 기념품들을 많이 구입하는 모습들이었다.

츠치커우 고문화거리의 세 가지 보물(古鎭三寶)

츠치커우에 세 가지 보물(古鎭三寶)이 있으니 바로 마오쉬에왕(毛血旺), 치엔장피(千張皮), 소금에 절인 고추땅콩(椒盐花生)이다. 세 요리는 모두 역경 속에서 우연히 전화위복의 기회를 만들어낸 재미난 유래를 가지고 있다.

장(張)씨는 배를 타고 목재를 운반하던 중 배가 걸려 오도 가도 못하고 양식도 동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츠치커우 도살장에서 버려지는 돼지뼈와 돼지피를 가지고 허기를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장씨가 그 돼지뼈를 고아낸 국물에 선혈과 각종 양념으로 맛을 낸 요리 맛이 일품이어서 츠치커우에 아예 음식점을 차리고 장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돼지선혈로 만든 마오쉬에왕(毛血旺)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부장수 지아(賈)씨는 홍수에 떠밀려온 여자아이를 딸처럼 키우는데 아이에게 종기가 있어 아무리 치료를 하려고 해도 좋아지지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딸아이가 집에서 만드는 두부피를 즐겨 먹고 종기도 차츰 좋아진다는 것을 알고는 그 딸이 좋아하는 두부피를 천 장이 되도록 만든 요리를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천 장의 두부피요리 치엔장피(千張皮)가 되었다는 것이다.

쉬(徐)씨는 수확한 땅콩을 싣고 오다가 그만 급류에 배가 침몰되면서 땅콩이 거의 휩쓸러 가고 그나마 남은 땅콩도 소금물에 절여져 생계가 막막해졌다. 절친한 친구였던 펑(彭)사장은 '집에서는 부모님께 의지하고 밖에 나오면 친구에게 의지한다(在家靠父母,出门靠朋友)'며 땅콩을 말린 후 볶아서 팔아보자고 제안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소금에 절여진 볶은 고추땅콩이 너무 인기가 좋아 츠치커우의 명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 가지 요리에는 모두 창장유역 민초들의 고단한 삶과 시련에 굴복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과 생활 속의 지혜가 묻어 있는 듯하다.

인근 수많은 민초들을 끌어 안고 거대히 흘러가는 충칭!

보륜사에서 내려다보는 충칭 전통가옥들과 현대 건물들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어우러진 충칭
보륜사에서 내려다보는 충칭전통가옥들과 현대 건물들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어우러진 충칭 ⓒ 김대오

츠치커우 안쪽에는 보륜사(寶輪寺)라는 절이 있는데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손자였던 제2대 황제 건문제(建文帝, 1383-1402)가 삼촌이던 주체(朱棣, 영락제)에게 쫓겨 삭발을 하고 도사가 되어 은둔했던 곳이라고 한다. 입장료에 향 값이 포함되어 있는지 향을 나눠준다. 장작불 피우듯 향을 태우는 중국인들 속에서 묻혀 나도 이런저런 소원을 빌어보게 된다.

옆에 탑이 있는데 따로 입장료를 내고 올라가는데 마지막 한 층은 안전상의 이유로 올라가지 못하게 나무로 막아 놓았다. 우뚝 솟은 탑이 갖는 힘은 일단 오르면 끝까지 오르기 전에는 걸음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데 있는 것 같다. 그곳이 비록 관작루(鸛鵲樓)는 아니었지만 '천리까지 더 멀리 보고자 한다면(欲窮千里目) 한 층계 더 위로 올라서라(更上一層樓)'는 시구를 떠올리며 막아둔 나무를 치우고 꼭대기까지 올랐더니 과연 충칭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안개가 자주 끼어 가끔 해라도 뜰라치면 개가 낯설어 해를 보고 짖어대는 안개의 도시, 인근에서 몰려드는 수많은 전근대적 농촌문화를 끌어안고 빠르게 현대화하는 도시, 거대한 창장의 물줄기처럼 수많은 영욕을 산과 강이 어우러지듯 자연스럽게 용해해내는 매력적인 입체도시 충칭은 오늘도 전통가옥과 현대식 빌딩사이 뿌연 안개와 창장의 흐름을 배경으로 고즈넉이 한낮의 오후를 맞이하고 있다.

어머니를 위한 생일 축하 공연 어머니의 쉰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는 딸의 공연인데 중국인들의 가족주의 문화를 느끼게 한다.
어머니를 위한 생일 축하 공연어머니의 쉰 번째 생일을 축하해주는 딸의 공연인데 중국인들의 가족주의 문화를 느끼게 한다. ⓒ 김대오

점심을 먹으러 식당을 찾았더니 그곳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었다. 알고 보니 어머니의 쉰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딸의 공연이었다. 연기학원에 다니는 딸이 친구들과 함께 어머니를 위해 준비한 공연이라는데 중국에 아직 강하게 남아 있는 가족주의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였다.

점심을 먹고 식당을 나오려는데 입구의 손님맞이 종업원이 국화차를 끓여 주며 친절을 베푼다. 20살 꿔어(郭)양은 고향이 광동(廣東)인데 이모가 계시는 충칭으로 일을 하러 와 있다는 것이었다. 월급은 800위엔(16만원)정도인데 고급식당에서 숙식을 제공해주지만 월급이 그리 많지 않아서 조만간 다시 고향으로 가서 옷 만드는 회사에 취직할 예정이라고 자신의 계획을 들려준다.

이처럼 충칭은 낙후된 인근의 수많은 농민들이 부푼 기대를 안고 찾아오는 꿈의 도시이다. 그러나 이 도시 또한 그다지 품이 넉넉하지 않아 그 많은 농민들을 모두 넉넉히 안아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세찬 바람에 식당 앞 깃발들이 힘차게 나부끼고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꿔양 충칭은 중국 서북지방의 블랙홀로 많은 농민들이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몰려드는 기회의 땅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꿔양충칭은 중국 서북지방의 블랙홀로 많은 농민들이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몰려드는 기회의 땅이다. ⓒ 김대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8월5일~14일까지 중국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충칭#츠치커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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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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