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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4일자 농협 하나로클럽 양재점에 나온 배추 1포기 가격은 1000원. 지난해 대비 3분의 1 가격이란다. 배추값이 폭락했지만 서민 삶도 폭락했다. 그래서 주부들이 김치 싸게 담그는 방법을 찾느라 애쓴다는데.

서울 어느 여학교에서 배추 수백 포기를 기른다는 소문을 접했다. 도대체 학교 어디에 배추 수백 포기를 심었다는 말인가. 운동장? 옥상? 운동장이라면 학생들이 머리띠를 동여맸을 듯하고, 옥상이라면 흙 퍼 나르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을 듯하다.

수소문해 물어보니 둘 다 아니란다. 그럼 뭘까. 지난 3일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찾은 것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학교, 대부분 농사 외면... "귀찮아서"

 서울여상 한 귀퉁이에 잘 자란 배추들.
 서울여상 한 귀퉁이에 잘 자란 배추들.
ⓒ 정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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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문 입구에 흙냄새 나는 이가 서 있다. 관악도시농업네트워크 조홍련 사무국장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에서 도시농업을 연구하다 이 길로 들어섰다.

봉천동이 집인 그는, 마을 동네 사람들과 함께 도시농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시작했으니 이제 1년 남짓. 그래도 벌써 학교 한 군데서 배추 수백 포기를 길러냈으니 대단하다 싶다. 게다가 기른 배추로 동네 독거노인들에게 김치를 담가주기로 했단다. 대단하다. 감탄하려는 찰나. 산통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배추가 모두 얼었어요. 11월 말 엄청 추웠잖아요. 1주일 정도 날짜를 못 맞춰서 그만…."

허걱. 어르신들에게 김치를 드리기로 이미 약속한 상태. 부랴부랴 친환경농업인에게 배추를 사서 담그기로 했단다. "어쩌죠"라고 묻는데, "실패 또한 값진 교훈"이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다. 하긴, 한 번에 성공하면 그게 무슨 드라마인가.

조 사무국장과 함께 학교 안에 들어섰다. 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화분이 즐비하다. 미처 뽑지 못한 배추가 몇 포기 남아 있다. 비밀은 이거였다. 화분 활용법. 텃밭 만드느라 엄청난 흙을 퍼올리지 않아도 되고, 관리도 쉽다.

이처럼 학교에서 크게 농사를 짓는 곳이 있는지 물었더니, 거의 없단다. 학교와 어린이집에 여러 군데 제안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이란다. 이유는 "귀찮아서"다. 방수 문제, 거름 문제 등을 이야기하는데, 속마음은 결국 귀찮음이란다. 화분이니 그다지 방수를 신경 쓸 필요가 없고, 경량토를 섞으면 무게도 그다지 나가지 않는다.

"학교는 주말에 쉬잖아요. 그런데 관리하려면 주말에 사람들 올 때 문을 열어야 하거든요. 저녁에도 문을 열어야 할 때도 있구요. 신경 쓰이는 거죠. 오죽하면 우리가 입주한 관공서에서도 옥상 텃밭 못하게 하겠어요."

학교 농사 첫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가을배추를 늦게 심어 얼려 죽인 것, 병충해 대비를 잘 못한 것. 농사짓는 분들로부터 "배추는 약 안치곤 절대 못 키운다"는 조언을 들었지만 유기농 쪽을 통해 결국 약을 치지 않고 키웠다.

이것저것 물으려는데, 조 사무국장 마음이 어딘가에 가 있다. 어제 오늘 김치 담그는 날이라 빨리 가야 한단다. 그러고 보니 바지에 고춧가루가 잔뜩 묻어 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정춘규 교사가 안다면서 후다닥 사라진다.

빗물 활용법 고민하던 정춘규 교사, 배추 기르기 도전

 정춘규 교사. 빗물 활용에 관심이 많던 그는 2년 동안 관련 연구를 하다 마침내 배추 기르기에 나섰다.
 정춘규 교사. 빗물 활용에 관심이 많던 그는 2년 동안 관련 연구를 하다 마침내 배추 기르기에 나섰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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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여상 정춘규 교사(과학)는 '건강한 도림천을 만드는 주민모임' 운영위원이다. 도림천은 관악구, 영등포구, 구로구, 동작구 4개에 걸쳐 있다. 서울여상은 관악구에 있다.

정 교사는 원래 빗물에 관심이 많았다. 빗물 활용에 대해 고민하다 학교에 큰 빗물 탱크를 만들었다. 빗물로 콩나물도 길렀다. 2년 동안 실험한 결과 우려하던 산성 수치는 극히 미미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라는 것.

좀 더 폭넓은 빗물 활용을 고민하다 학교 농사를 생각하게 됐다. 조홍련 사무국장과 뜻이 맞았다. 올해 4월 농사를 시작했다. 봄에는 가지, 오이, 쌈채소, 깻잎, 고추를 심었다. 가을엔 배추와 갓을 심었다.

학교 안에 있는 화분은 모두 500개 정도 된단다. 가을에 화분 수를 크게 늘인 결과다. 애초에 학생들과 함께하기 위해 모집 공고를 내걸었다. 학생 한 명당 10개 정도씩 맡길 생각이었다. 몇 명 모이지 않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기대 이상이었다.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모인 것. 학생 1인당 2~3개 정도가 돌아갔다.

학생들에게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매일 물 주고, 벌레 잡는 게 할 일이다.

 화분엔 모두 학생들 이름표를 붙였다.
 화분엔 모두 학생들 이름표를 붙였다.
ⓒ 김대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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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상했나요. 이렇게 많이 모이리라고?
"전혀 못했죠."

- 학생들마다 아무래도 차이가 있었겠죠?
"그럼요. 어떤 학생은 몇 번 하다가 시들해져서 친구에게 맡겨버린 경우도 있고, 어떤 학생은 하루도 안 빠지고 물을 준 경우도 있어요. 화분마다 관리하는 학생들 이름을 써붙였는데, 자라는 것을 보면 학생 성격이 드러나더군요."

- 농사를 지으면서 학생들 변화가 있었나요?
"아유, 많았죠. 정서 순화에 좋다고 봤어요. 학생들이 너무나도 신기해하는 거예요. 토마토 나무를 처음 봤대요. 상추대도 처음 보고. 오이꽃이 피니 정말 신기하다고 사진 찍고 난리가 났어요. 나는 촌에서 컸으니 못 느꼈는데, 도시 아이들이라 다른가 봐요."

- 벌레는 잘 잡던가요.
"처음엔 징그럽다고 손도 못 댔어요. 소리 '꺅' 지르면서 젓가락 갖고 잡다가, 나중엔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쏙쏙' 잡던 걸요."

 배추벌레
 배추벌레
ⓒ 정춘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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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교사에게 일이 많았겠다 물었더니 그렇지도 않단다. 물 주라고 한 번씩 이야기하고, 벌레 생길 때 '잡아라' 이야기하면 끝이라고. 화분은 마침 학교에서 남아돌던 것을 재활용했다. 흙과 거름은 관악도시농업네트워크에서 지원했다. 학교 힘만으로 했다면 엄두도 못냈을 거란다. 학교 텃밭은 환경단체와 학교 합작인 셈이다.

이제 마무리할 시간. 공익광고 할 시간이다. 학교에서 텃밭을 가꾸면서 얻게 된 이익을 물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품게 돼요. 학생들이 얼마나 신기해 하는데요. 인성교육은 자연스레 따라가요. 먹을거리 걱정도 덜 수 있죠. 먹을거리 안전성 이야기 많이 하는데, 야채와 채소를 자기가 직접 기르면 걱정 덜 수 있죠. 애들이 얘기해요. 기르던 것 먹다가 파는 것 못 먹겠다구요."

서울여상 사례에서 배울 점, 버릴 점
서울여상 사례는 나름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학교에서 당장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춘교 교사처럼 관심을 보이는 교사가 있어야 한다. 학교장 반대 또한 없어야 한다. 관리자가 반대한다면 매끄럽게 진행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지원할 환경단체가 있어야 한다. 서울여상은 이 세 가지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달리 생각하면 어디서나 할 수 있다. 정춘교 교사는 농사 경험이 전무했다. 그런데도 학생들과 힘을 모아 텃밭을 훌륭하게 가꿨다. 조홍련 사무국장도 농사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 정춘교 교사는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운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관심'과 '애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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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관악도시농업네트워크 http://cafe.daum.net/antifta



#도시농업#도시농사#서울여상#정춘규#조홍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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