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시골로 향합니다. 매년 이맘때쯤 곰국을 끓였는데, 어제(12. 6)는 곰국을 끓이려고 작정한 날입니다. 어르신들이 겨울을 무사히 견뎌내는 데는 소꼬리나 우족 곰국이 그래도 제일 괜찮은 것 같아서, 아내는 동네정육점에서 한우 우족을 특별히 주문을 했습니다. 몇 해 전에 싸다고 도매점에서 샀다가 '노린내가 나더라'는 엄니의 말씀이 있은 후로는 믿을 수 있는 동네정육점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야~야, 막내야! 추운데 머할라꼬 이런 걸 사왔노?"
핏물을 빼기 위해 곰거리를 물에 담그는 내게, 엄니는 안타까워서 혀를 차십니다. 손을 덜려고 아파트에서 가스 불에 끓인 적도 있지만, 시골에서 장작불을 모아 푹 고이도록 끓인 국물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거든요. 찬 날씨에 수돗물이 얼어서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끓는 물을 붓자 다행히 물이 나옵니다. 나는 수세미로 수도 옆에 걸린 솥을 깨끗이 닦아 냅니다. 물이 얼음처럼 차고 찬바람이 볼을 때립니다. 나는 아랫간에서 장작을 한 아름 안아다가 부엌 옆에 쌓아두고, 피를 뺀 곰거리를 솥에 안쳐서 장작불을 모았습니다.
"막내야! 불 모다놓고 방에 들어 온나. 날이 찹다."
엄니는 사내가 부엌에서 설치는 것이 조금은 못마땅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는 아내가 함께 오려는 것은 굳이 말렸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끓인 곰국을 엄니께서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장작이 참 장하게 타고 내 아랫도리로 뜨뜻한 기운이 전해집니다. 불기운에 방이 조금 따뜻해지자 엄니는 작은방으로 옮겨왔습니다. 엄니는 쪽문을 열고 저를 쳐다봅니다. 문틈으로 찬 기운이 들어가자 천식을 앓고 있는 엄니는 연신 기침을 합니다.
나는 급히 문을 닫습니다. 엄니는 쌔근쌔근 숨을 가쁘게 몰아쉽니다. 세 시간 반을 끓이니 물이 삼분의 일로 졸아 있습니다. 나는 엄니께 국 한 그릇을 담아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독에다 담습니다. 이제 두 번째 국을 끓여야합니다. 다시 장작불을 모두고 뼈를 안쳐서 솥에 물을 가득 채웁니다. 이제 다시 센 장작불에 세 시간 이상을 끓여야합니다. 나도 국 한그릇을 떠서 방으로 들어가는데, 그때까지 엄니는 드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막내야! 이런 맛있는 곰국을 먹으니 옛날 생각이 난다. 내가 시집온 이태쯤에 왜놈이 전쟁(만주사변인듯 합니다)을 일으켜 한참 생활이 어려웠단다. 그 해 가을 타작을 했는데, 왜놈들이 공출로 다 빼앗아가고 겨우 겨울양식을 하려고 나락(벼) 한 섬을 소 마구간에 숨겼단다. 그런데 그때 우리동네 00양반(택호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매제가 구장 질을 했는데, 그 놈이 왜놈을 데려와서 소 마구간을 창으로 쑤셔서 결국 그 양식을 찾아서 빼앗아 갔단다. 식구많은 우리 집 사정을 아는 구장 질을 한다는 사람이 그런 짓을 하니, 그때 울매나 서럽고 원통하든지…….
그 이듬해 봄, 새벽에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꺾고 있었단다. 중참 때쯤 되었는데, 너거 할무이가 찾아 왔더라. '며늘아, 점심때가 다 되었는데 아침도 안 묵고, 배가 울매나 고푸노?' 하더마는 핏기(식물의 새순인데, 먹을 수 있다)를 한줌 뽑아서 까주더구나. 그걸로 허기가 면해지겠냐마는 목이 멕히더구나. 그라더마는 송구(소나무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속껍질을 먹는다)를 두개 꺾어서 나누어 먹었는데, 시어무이 그 마음이 지금도 생각이 나는구나."
엄니는 기미년에 나셨으니 올해 꼭 아흔이 되십니다. 열여섯에 이 동네에 시집와서 세 해쯤 지난 일이라고 하시니, 지금부터 칠십 이,삼년 전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그 어려운 세월 중에도 사람들은 글을 배웠단다. 니는 우리 동네에 야학이 있었다는 말을 들어 보았느냐?"
"저는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그럴 끼다. 그때 우리 동네에 <우산양반>이라는 사람이 있었단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고 하는데, 아마 왜놈 밑에 벼슬살기가 싫어서 고향에 묻혀 지낸 모양이다. 그 양반도 때거리가 없을 정도로 형편이 나빠서 너거 작은집 터에 오두막을 지어서 겨우 바람을 가리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야학을 시작했단다."
"엄니도 다녔습니꺼?"
"오데! 그때 나는 한참 시집살이를 하던 새댁이었는데……. 너거 삼촌 셋은 다녔단다. 그란데 그때 너거 삼촌들이 부르던 <야학노래>가 생각이 나네. 들어 볼래?"
엄니는 조용히 노래를 시작합니다. 가락이 참 서럽습니다.
<돈담 야학의 노래>
빛나고 색(色)나는 우리 야학은♬♩
김동아 노력으로 창설되었네.
잠깨어라, 꿈 깨어라.
청소년들아!
이십세기 문명바다 방방곡곡을
모두 모두 학문으로 쫓아 나오네.
문명의 기초는 학문에 있고,
농촌의 짓는 것은 근로가 제일!
인생의 명령은 학습에 있고
어화, 우리 청소년들아!
힘쓰세, 힘쓰세, 학농(學農) 힘쓰세.
활발한 정신으로 공부를 하여
빼앗긴 우리조국 다시 찾아서
금수강산 삼천리 태극기 꽂고
만세소리 하늘 높이
높이 부르자!♬♩
마침내 엄니의 노래가 끝났습니다.
"김동아는 돈담야학을 만든 우산양반의 이름인데, 그 당시 야학을 다니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였단다. 돈을 따로 받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분필 값 정도는 챙겨주었던 것 같다. 그 뒤에도 뜻있는 사람들이 야학을 세워서 사람들의 까막눈을 뚫어 주었단다. 내가 이 노래를 너한테 불러주는 이유는 니가 욱이(제 아들)한테 들려주어서 우리 욱이가 우리나라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란다. 그때 너거 삼촌들은 야학에 댕긴 덕택으로 한글을 깨우쳤고, 그런 사람들의 희망이 합쳐서 우리나라가 왜놈한테서 독립이 된 것이 아니겄나?"
엄니의 희망대로 저 야만적인 일본제국주의 칼날 앞에서도 학동들에게 조국의 독립을 일깨우고 노래했던 이름없는 시골야학선생을 본받아, 제 아들도 불의에 맞서면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용기와 드러내지 않아도 사회의 소금이 되는 젊은이로 자라길 간절히 소망합니다(구순 엄니께서 총기를 잃지는 않으셨지만 연세가 높아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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