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9일은 이슬람권에서 큰 명절 중 하나인 '에이드 엘 크빌'이다. 이곳의 제1 외국어인 프랑스 말로는 "La fête de mouton" 한다. 말 그대로 '양축제'라는 다소간 투박한 의역을 사용하고 있다. 이곳의 명절 또한 우리네 설이나 추석과 같이 태음력(우리와는 조금 다른 이슬람 태음력을 사용한다)에 따라 해마다 다르게 명절이 정해진다.
보통 시작일을 기준으로 2~3일이 공휴일이 된다. 이틀 이상 쉬는 것은 전적으로 왕에게 달려있다. 올해(2004년)는 이 엘크빌이 내일 일요일이 되어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일요일에 공휴일이 겹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국적과 문화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모양이다.
프랑스 말로 '양축제'라는 말로 번역이 되긴 하지만, 사실 이 날은 양들에게는 수난의 하루다. 각 가정마다 성인 남자 한 명당 양 한 마리씩을 직접 잡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보통은 한 가구당 양 한 마리 잡는 것이 보통이다. 가끔씩, 모두들 지난 기억이 현실에서 투영되는 경험들이 있을 텐데, 이 명절의 양 구입을 위한 대출을 광고하는 길거리 대형 광고판을 보면 어린 시절 한국서 보았던, '치킨 광고의 닭'이 연상되어 슬며시 웃음짓게 된다.
보통 한 2주 전부터 이 명절의 준비가 시작된다. 준비는 각 가정마다 명절에 쓸 양을 구입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명절까지 그 양은 가족들과 함께 기거한다. 아래 사진은 작년 엘크빌날 함께 했던 현지인 친구 사이드(Said)네 양의 모습이다. 녀석은 이 한 장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나갔다.
양 하면, 하얀 메리노 양을 먼저 떠올렸었는데, 이곳에 와서 이 지역에서 주종을 이루는 '일반양'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엘크빌이 다가옴과 동시에 길가에서 양떼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지방으로 나가면, 양떼나 당나귀의 모습을 보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수도인 라밧(Rabat) 한가운데에서 양떼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색다른 기분이 들게 한다.
이 명절에 특이한 행사는 바로 '손수 양을 잡는 것'이다. 수많은 가족들이 모여, 함께 붙어 앉아서 온종일 '양'과 관련된 일들을 해도 하루가 모자를 만큼 이 '양을 잡는 것' 자체에 수반되는 일이 참 많다. 이 행사는 아침에 시작된다. 텔레비전에서 왕이 직접 나와 그의 몫인, 양 한 마리의 목을 칼로 그으면, 전국에서 지켜보고 있던 국민들은 이때를 기점으로 양을 잡으러 각자의 집 옥상으로 올라간다.
직접 양을 잡는 이들도 많지만, 서투른 이들을 위해 먼저 자신의 집 양을 잡고 가까운 집으로 도와 주러 다니는 이들도 있다. 작년 내가 함께 했던 사이드네 집에서는 양 한 마리와 보신용 염소 한 마리를 잡았는데, 이 집의 경우도 이웃의 양을 잘 잡는 이가 와서 그 일들을 도와 주었다.
칼로 양의 목을 긋는 때는, 이 집의 모든 남자들이 함께 그 칼을 함께 잡는 모습을 보인다. 나 또한 그 집의 아들 대접을 받고 있는지라, 양 잡는데 '양 다리를 꼼짝 못하게 잡는' 일조를 했다. 도시의 아이로 자라온 나는, 무언가를 '잡는'다는 것에 처음엔 다소간 긴장을 했었지만, 유구한 문화 가운데 정착된 이 '잡는' 행사는 생각보다 잔인하거나 번잡스럽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간단하게 끝났다.
그렇게 양을 잡은 후에는, 가족들의 손길이 더 바빠진다. 먼저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정리한다. 그러는 동안 다른 한 편에서는 양 머리와 양족(다리)를 숯 화로에 올려놓고 털을 태우면서 저녁의 요리에 쓸 수 있도록 정리하고 익히는 일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소의 모든 부분을 먹는다면, 여기서는 양의 모든 부분을 먹는다.
가족들 모두 각자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정해서 분주히 정리하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가죽을 수거하러 집집마다 돌아 다닌다. 그들이 걷어간 가죽은, 나중에 가공처리와 세탁을 한 후 다시 돌려 받게 된다. 물론 돈을 내야 한다. 한편, 동네 곳곳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화로 하나를 가져다 놓고, 손이 많이 가는 귀찮은 작업인 양머리, 양족 익히기 알바를 시작한다.
뿔이나 굽을 벗기는 것도 이 알바의 주요 공정 중 하나. 몇몇이 불을 피우고 양머리를 다듬고 익히는 동안 다른 몇몇은 분주히 다니며 집집마다 양머리를 받으러 다닌다. 물론 좀 공격적인 마케팅(?)의 예 이고, 대부분은 귀찮아서 그냥 손님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렇다 해도, 워낙 수요가 많으니, 돈은 벌리게 된다. 이 엘크빌 명절에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신종부업'들이 생겨난다. 오늘자 Le Matin(이곳의 일간지)에는 명절에 생기는 이 신종 알바(nouveaux petits meiter naissent le jour de l'aid)에 대한 소개기사가 나기도 했다. 여느 개도국과 같이 일자리가 부족한 이곳의 젊은이들에게, 이 날은 썩 괜찮은 수입을 거둘 수 있는 많지 않은 기회들 중 하나다.
이렇게 양을 잡는 행사를 하다 보면, 온 도시가 양머리를 그을리는 연기로 자욱하다. 양 잡는데 수반되는 많은 일들을 옥상에서 하다가 보면, 금세 점심시간이 다가 온다. 점심은, 갓 잡은 양의 간과 내장을 적당한 크기로 다듬어 꼬치(brochette)에 꽂아 숯불에 굽는다. 특별한 양념은 없고, 다양한 부위를 양의 기름으로 잘 싸서 구워내 소금과 함께 먹는다. 나는 평소에도 동물의 내장 부위에 대해선 그닥 비위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 가족들과 함께 맛있게 점심식사를 다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는, 다시 양 손질 시작이다. 이번에는 살코기들을 발라내는 일을 시작한다. 원칙적으로 이 축일 기간 중에 양 한 마리를 다 먹어야 한다고 하지만, 냉장고가 발달한 요즘에는, 그렇게 의무적으로 양을 다 먹어 치우는 경우는, 식구들이 아주 많지 않는 한 드문 것 같다. 이렇게 온 가족이 저녁시간 까지 양과 함께 씨름을 하면서 보낸다. 큰 명절이고, 모처럼 온 가족이 맛있는 양을 먹는 날이라 그런지, 다들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얼굴들은 마냥 밝다.
내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저녁식사가 바로 이 날의 묘미라고 한다. 바로 양머리 꾸스꾸스(couscous)다. 꾸스꾸스는 밀을 찌고, 갖은 야채와 고기로 만들어 내는 북아프리카 이슬람왕국들의 전통음식인데, 특별히 이 날은 양의 머리로 꾸스꾸스를 한단다. 손님에 대한 환대, 특히 식사를 통한 환대가 중요한 가치로 매김되는 이곳에서, 저녁식사시간의 모습은 보지 않아도 머릿속에 훤했었다. 이 가족의 중간에 앉아, 양 머리의 갖가지 부위들을 제일 먼저 맛 봐야 할 내 모습 말이다.
그래서 작년에는 저녁시간을 앞두고, 먼저 집을 나섰다. 가족들 모두 어찌나 서운해 하시던지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는데, 예의 '저녁만찬'을 머리에 떠올리니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설 수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인류학 관련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 바로 그네들 식문화에 똑같이 참여하는 것이라더라. 이곳 모로코의 음식은 참 맛이 좋아서, 그때까지 별 무리 없이 그 '원칙'에 잘 따를 수 있었지만, 아직 내겐 양머리는 조금 무리였었던 듯 하다.
이렇게 집집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함께 모여 양들을 잡아내는 동안,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도심은 문자 그대로 개미새끼 한 마리 안보일 정도로 썰렁해 진다. 작년 나는, 오후에 집에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몸소 텅 빈 도심을 가로질러 걸어가며 '썰렁함'을 체험해야 했다. 이날의 낮 시간 동안에는 버스도 택시도 모두 중단되기 때문다.
그런데, 올해는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참여해야 할 것 같다. 우선, 사이드와 그 동생 케림이 지난해 결혼을 해서, 잡아야 할 양이 4마리가 되어버렸다.(그 위로 히샴이라는 형이 더 있고 아버지 분의 한마리, 그래서 4마리) 작년, 내 손을 꼭 붙들고, 내년(올해)에는 꼭 나에게 양 한마리 온전히 잡게 해 주시겠다던 어머님의 말씀이 점점 선명해진다. 과연, 나는 양 한마리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아랍어 에이드(Aid)는 우리말 '명절' 중 '절' 정도에 해당됩니다. 크빌(Kbir)은 크다, 첫째 정도고, 엘(El)은 정관사. 모로코에선 이맘때쯤 에이드라고 하면 다 에이드 엘크빌을 의미합니다. 이 글은 모로코 체류하던 2004년 적어둔 글로, 오늘(12월 9일)이 모로코 현지에선 에이드 시작이라는 친구 연락을 받고 소개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