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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계절이 아주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 어린 시절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어른 흉내 내는 소꿉놀이도 자주 했고, 도시에 나가있던 친척언니가 빼딱 구두라도 신고 우리 집에 놀러오는 날이면 현관에 놓인 그 높은 구두를 신고 걸어보기도 했었다. ‘이 다음에 내가 크면~’하면서 꿈꾸었던 시절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달에 태어난 내가 어느새 마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다. 한때는 더디 가기도 했던 시간이 이젠 활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사정없이 내닫는 그 세월에, 가끔 어리둥절해 지금까지 무엇하며 살았을까 되돌아보게 된다. 마흔 다섯 살 생일을 맞는 오늘 아침도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벽 5시에 맞춰놓은 알람시계가 채 울리기도 전, 새벽 4시 45분께에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

 

전기장판을 깔고 누운 침대 바닥의 따뜻한 온기와는 달리 방안에 흐르는 차가운 공기에 코가 시리고 목이 따가워서 오싹한 한기를 느끼며 컵에 담긴 차가운 물을 마셨다. 소름이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얼른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몇 분 동안 몸을 떨면서 누워 있던 나는 여느 때 같으면 일어나 앉아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할 시간이었지만 근래에 들어 많이 추워진 탓에 이불을 걷고 나오는 것이 움찔해진다.

 

오늘 새벽에도 그냥 배를 깔고 누운 채 엎드려서 성경을 읽고 잠깐 동안 기도한 후, 아침이 되기까지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침대에서 그냥 누워 있다가 남편 아침을 챙겨줄 오전 7시가 좀 넘어서야 부엌으로 겨우 나간다. 마흔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오늘도 나는 여전히 어제와 다름없이 남편 아침식사를 챙겨주고, 출근하는 곳까지 배웅을 나가서 그가 차를 타고 가는 것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어제와 다름없는 똑같은 나의 일상적인 일들을 한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들여다 본 순간, 딸한테서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

 

시간을 보니 어제 밤 12시가 넘자마자 보낸 메시지였다. 알고 있었구나. 기특하다, 내 딸. 곧 지하철을 타고 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딸이 도착할 시간이 다 되어갈 때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단발머리 나풀거리며 저만치서 마주 오고 있는 딸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딸은 매년 엄마생일은 물론 가족들 생일을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기억해주는 속이 깊은 딸이다.

 

아침에 끓인 미역국으로 점심을 함께 먹었다. 처음엔 생일 선물로 서점 가서 책을 선물할까 했던 딸은 ‘엄마는 옷을 잘 안 사 입으니까 옷이 낫겠어요!’했다. 생일 다가온다고 단 한번도 얘기한 적 없건만, 미리 알고 나름대로 준비한 모양이다. 딸은 내 노트북으로 인터넷 홈쇼핑에 들어가서 한참을 검색해보더니 진초록 색 가디건을 하나 구입했다.

 

이 가디건은 며칠 후에 우리집에 도착 할 것이다. 낮에 남편 역시 핸드폰으로 축하 문자를 보내왔다. 점심을 먹고 나서 한번 이상 전화를 하는 남편이지만 오늘은 좀 늦어 한순간 서운함이 내 맘속을 훑고 지나갔다. 생일인 만큼 남편이 전화를 해서 생일 축하한다는 그 한마디라도 듣고 싶은데, 오늘따라 전화가 늦어 기다리다 못해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오늘은 내 생일인데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 없어 서운하다’했더니, 출근하기 전에도, 그리고 며칠 전부터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몇 번이고 거듭했다고 남편은 말했다. 나는 한번도 들은 적이 없다며 은근히 딱 잡아뗐다.

 

‘알았어, 여보 생일 축하해!’하고 전화를 끊더니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로 다시 보내왔다. 순전히 엎드려 절 받기였지만 싫지 않았다. 남편은 저녁에도 다른 날보다 서둘러 몇 분 더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생일이 되면 조촐하게라도 외식하자고 몇 날 전부터 얘기했던 남편은 가까운 중국음식점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탕수육과 자장면을 주문해 함께 맛있게 먹었다. 밖으로 나오자 남편은 내 손을 이끌고 시장으로 향했다. 당신 생일을 그냥 보낼 수 없다며 남편은 옷가게로 들어갔다. 주머니 사정을 빤히 아는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내 손을 힘껏 잡고 이끌었다.

 

“털이 두툼하게 많이 달린 잠바 있어요?”

 

남편은 발걸음 하는 옷가게마다 두툼한 외투를 찾았다.

 

“어떤 잠바 말인가요?”

 

하고 점원이나 주인이 물으면,

 

“이 사람이 추위를 많이 타서 그런데 아무쪼록 따뜻하고 털 많이 든 옷이 필요해서요.”

 

무조건 털이 부숭부숭하고 두꺼운데다 아무쪼록 무게감이 느껴지는 옷만 찾는 남편, 점원한테 물어볼 필요가 뭐 있나 싶었던 나는

 

 “여보, 그냥 찾아봐요.”

 

하고 손을 끌었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나에겐 눈밭에 뒹굴고 칼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끄떡없는 두꺼운 외투가 제격이라고 생각한 남편은 적극적으로 내게 선물할 옷을 골랐다.

 

하지만 좀 마음에 들면 가격이 비싸고, 저렴하면 옷이 마음에 안 들고 해서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적당한 곳을 찾았다. 남편이 사 준 겨울 외투는 엉덩이까지 덮은 사파리 잠바에 안쪽엔 부드러운 털이 부숭부숭 붙어 있어 입어보니 아주 따뜻했다.

 

덕분에 남편 지갑은 더 가벼워졌지만, 겨울외투를 입은 내 모습이 보기만 해도 따뜻하게 보이는지 남편은 그저 흐뭇한 표정이었다. 추운 겨울을 남편 사랑이 담긴 겨울외투와 딸이 사 준 가디건으로 따뜻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뜨끈뜨끈한 사랑이 있어 더욱 따뜻한 겨울이 될 것 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남들처럼 위대한 성취도 성공도 부도 이룬 것이 없지만,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게 하시고, 또 마흔 다섯 번째 맞은 생일을 축하해 줄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사랑하며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삶,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나 또한 이렇게 고백하리.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하박국3:17-19)

덧붙이는 글 | 12월 8일(월)은 저의 생일이었습니다. 


태그:#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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