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초스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지리산 산청의 토굴에서 큰스님의 상좌로 지내는 감동을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왔습니다.
야초野草스님은 그동안 삭발염의削髮染衣을 하였지만 오히려 많은 시간 사문寺門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시곤 했습니다. 도량에서 차수叉手로 용맹정진하는 불가의 수행을 따르기보다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전국의 사찰과 여염집, 토굴과 빈집을 가리지 않고 떠돌면서 들의 스스로 자라는 풀처럼 홀로 자유로움을 누리신 분이지요.
스님은 세속적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려고도, 욕망을 구태여 절제하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의 언행은 거칠고 거침이 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공력功力이 녹녹치 않다는 것을 대면할 때마다 실감하곤 했습니다. 소탈하고 익살이 넘치며 안분지족安分知足하여 아만我慢하는 마음이 털끝만큼도 없는 분이므로 만약, 야초스님이 조금만 마음을 바꾸어 보리심菩提心를 갖게 된다면 큰스님으로 거듭날 분임이 분명하였습니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분을 오히려 저의 욕심이 지나쳐서 구족계具足戒에 가두는 것이 아닌가하는 죄책감은 있었지만 스님이 무명無明을 떨치고 큰스님으로 거듭나셔서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의 번뇌를 씻어줄 수 있다면 저의 이런 탐심貪心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지난여름, 방태산에서 돌아오는 길에 소엽선생님이 계신 차안에서 저의 이런 사심을 조심스럽게 내비쳤습니다.
"종단宗團에 승적僧籍을 갖고 다시 출가 수행자의 바른 길을 걸어봄이 어떻습니까? 지금의 생활은 스님과 스님 주변의 몇몇만 즐거운 길이지만, 만약 큰스님을 모시고 바른 수행을 하시면서 스님의 그동안의 견문과 궁리窮理들을 구조화시키는 시간을 갖는 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스님으로 인해 더 가치로운 삶으로 인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가장 가까운 마음의 거리에서 스님을 지켜보아주시고 '야초'라는 호를 지어주시기까지 하신 소엽선생님은 만약 그리되면 그 절에 공양주로 들어가 절 밥 짓는 할머니로 늙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스님은 소엽선생님과 저의 제의에 감읍하는 마음을 보였지만 승적을 가질 수 없는 물리적인 장애가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물리적 장애도 제거 될 수 없는 것이 없음을 확신시켜드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진지 2개월, 지리산 토굴에서 감격의 전화가 온 것입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것을 두 분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경남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 자락에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찰이었던 단속사斷俗寺 자리 인근에 있는 금륜대 토굴입니다. 단속사지는 지금은 동탑과 서탑만 남은 절터이지만 이 단속사지의 쌍탑만으로도 고승들이 족출簇出했던 큰 가람의 엄정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은 문익점 선생님께서 목화씨를 시험재배 했던 곳이며 뒤의 옥녀봉은 실을 잣는 모습입니다. 제가 모시는 분은 영공靈空스님입니다. 현담이라는 법호를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강론을 다니시곤 합니다. 해학 속에 법을 숨긴 그 어법이 하도 시원해서 재가在家의 사람들 중에는 '한 달에 한 번은 뵈어야 속이 후련하다'하시기도 합니다. 제게 새로운 법호도 주셨습니다. 금곡錦谷입니다. '내가 이곳에 오래 은일隱逸했던 것은 바로 금곡 같은 상좌를 만나려고 했던 것이었나 보다'라고 칭찬도 주셨습니다."
야초스님, 아니 금곡스님은 목소리조차 감격으로 여리게 떨렸고 직설적이던 어법도 완곡하게 바뀌었습니다. 앞으로 좌선하고 포행하며 불경을 독송하고 기도하며 짬짬이 운력雲力하시면서 참구參究하는 사문沙門 생활에 몰입하고 계신 금곡스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제게 가슴 떨리는 기쁨입니다.
평생 기독교인이며 권사님으로 지금도 필리핀에 포교를 지원하기위해 가 계신 소엽 선생님이 공양주로 계신 그 절에서 금곡스님께서 법法을 베푸는 강론이 있는 날이면 그곳이 아무리 외진 구학丘壑이라 하드라도 저는 한달음에 달려가겠습니다. 그리고 법당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패는 일, 아니 어떤 하찮은 일도 마다않겠습니다.
시공에 갇히지 않는 큰 깨달음으로 전하는 법문이 아니라 하드라도 저는 스님과의 선연善緣에 크게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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