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광선 박사님!
안녕하세요. 이 메일이 박사님에게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박사님의 두 아드님을 가르쳤던 박도입니다.
2004년 2월 퇴직한 뒤 강원도 횡성 안흥이라는 마을로 내려와 텃밭을 가꾸면서 틈틈이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간밤에 한 의롭게 살다가 운명하신 분(곽태영 선생)의 행적을 더듬다 서 박사님의 메일 주소를 보고 반가운 마음으로 이 글을 보냅니다. 아무쪼록 이 글이 전달되어 회신을 받으면 대단히 반갑고 기쁘겠습니다.
두 아드님 서정실, 서진실 군도 보고 싶습니다. 내외분 건강하십시오.
2008. 12. 3.
박도 올림
반갑습니다
박도 선생님, 남북평화재단을 통해서 보내 주신 메일 잘 받았습니다. 정실이, 진실이와 이야기하면서 옛날 이화 교정에서 선생님 뵙던 생각, 책도 한 권 선물 받았던 기억도 떠 올렸습니다.
정실은 애초의 전공을 접고 음악가가 되어 일산에서 학원 경영과 공연 생활하면서 여기 저기 출강하며 잘 살고 있습니다. 진실은 미국 여기저기에서 재즈 공부하고 드럼어로 연주활동 하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아들과 딸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 내외는 진실이네와 함께 살고 있지요.
저는 1996년 이대에서 정년퇴임하고 미국 뉴욕에 있는 신학대학원 모교와 드루 대학이라는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5년 간 강의하다가, 홍콩에 미국 고등교육재단 사무실을 새로 만드는 데 도와 달라고 해서 5년 동안 일하다가 2006년 모두 정리하고 은퇴한 뒤 일산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좋은 공기 마시고 독야청청하며 사시는 모습 부럽습니다. 사는 이야기 가끔 들려주십시오. 연말연시에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산속에서 안빈낙도의 삶 즐기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2008. 12. 10.
서광선
RE: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서 박사님! 창밖의 빗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머리맡의 손 전화를 보니 4시 11분이었습니다. 간밤에 <대한국인 안중근>이라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발행한 사진과 유묵집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순간 '極樂(극락)'이라는 안 의사의 유묵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년에 안 의사 발자취를 일일이 답사한 뒤 쓰려고 예정한 안중근 순국 100주기 기념답사기의 제목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왜 여순감옥에 있는 안 의사가 이 글을 썼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안 의사는 당신이 갇혀있는 감옥이 오히려 극락으로 느껴졌나 봅니다.
당신이 쏜 총알 여섯 발이 단 한 발의 실수도 없이, 조국의 강토를 유린한 원수 도적 무리를 꿰뚫었습니다. 그런 뒤 그들의 손에 잡혀 감옥에서 사형수로 갇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곳이 감옥이 아니라 바로 극락이었다"라는 생각이 영감으로 스쳤습니다.
순간 잠자리에서 망설이다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오늘은 아침 일찍(내년 하얼빈 답사 일정 문제를 상의하고자) 멀리 안동으로 가야하기에 시간은 좀 이르지만 그동안 내 집 고양이 '카사' 이야기를 느긋하게 한 편 쓰고 떠나야겠다고 작심하였습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는 책상 전등을 켠 뒤 곧 컴퓨터에도 전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 옆에 있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손목시계를 보니 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어둠속에서 1자를 4로 잘못 읽은 것입니다. 내 눈에 내가 속은 게 조금 화가 났지만 곧 느긋하게 글을 쓰라는 계시로 알고 마음가짐을 바꾸었습니다.
예삿날처럼 메일함을 점검하자 '반갑습니다'라는 서 박사님의 답장이 저를 기다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매우 반갑습니다. 서 박사님을 뵙지 못한 지 10여 년이 넘는 듯합니다. 저는 박사님을 떠올리면 아드님 혼인예식에 주례를 보신 모습이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그동안 혼인잔치에 꽤 여러 번 다녀보았지만 아버지가 아들의 혼인식에 주례를 선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때 저는 순간 아마 주례 선생님이 혼인 날짜를 깜박 잊었거나, 아니면 교통 체증으로 제 시간에 닿을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하객들을 위해서 박사님이 대신 주례에 임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매우 겸연쩍게 박사님께서 주례를 서게 된 전말을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아들이 결혼 허락을 청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를 주례로 모시고 싶다”는 그 청을 거절치 못하고 주례석에 섰다고.
사실 저도 자식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보니까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지언정 자식에게 존경받는 아버지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주례사 가운데 “가족이기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부정부패는 대부분은 가족이기주의에서 출발한 것이지요.
내 자식만은, 내 부모만은, 내 형제만은, 내 남편만은, 내 아내만은 … 등 내 피붙이만은
예외로 눈감다 보니 부정부패 사슬을 쉽게 끊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집권층이나 사회지도층조차도 이 가족이기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해 퇴임 후에도 두고두고 멍에를 지고 있습니다.
유난히 바르게 자란 첫째 아드님 정실 군도, 다른 학생이 모두 외면하던 일에 정의롭게 앞장선 둘째 아드님 진실 군도, 이 어둑새벽에 그 얼굴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아버님의 삶을 보고서 바르게 자랐나 봅니다.
1992년 박사님께서 저에게 주신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문집 가운데 한 구절을 뽑아 다시 읽으면서 제 글 마칩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저희 민족은
이 분단의 아픔 속에서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우리 민족의 운명은
외국 사람들의 생각과 힘과 사상과 이념 때문에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갈라지고, 아프고,
가난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언제까지 저희 남과 북의 형제들이
서로 총을 겨누고 살아야 합니까.
언제 죽을지 몰라 떨면서 살아야 합니까.
- 1988. 8. 14. 평화 ‧ 통일 기도 주일 기념 기도문 중에서
이 글 한편을 쓰고 나니까 출발채비를 해야 할 시간입니다. 애초에 쓰기로 한 제 집 고양이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습니다. 내외분, 부디 건강하십시오.
2008. 12. 11.
박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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