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 마지막 장면에서 절대반지에 굴복하고 마는 프로도는 영웅 탄생을 고대하는 관객들에게 실망을 넘어 허탈감, 배신감마저 안겨 준다. 두 눈 질끈 감고 용암 속에 절대반지를 던져 넣기만 하면 되는데 한순간 탐욕에 눈이 멀어 이실두르의 전철을 되풀이할 뻔한 그를 과연 영웅이라 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프로도 입장에선 애초에 영웅이 되려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해도 관객들은 영웅과 범인(凡人), 선인과 악인, 승자와 패자의 경계에서 갈등하다 끝내 절대반지에 굴복하고 마는 프로도를 보며 당혹감,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결정적 순간에 자기의 양심과 의지, 동료들의 믿음, 관객들의 기대를 모두 저버린 프로도를 영웅으로 보기엔 2%, 아니 20% 부족한 게 사실이다. 만약 그 자리에 샘과 골룸이 없었다면 프로도 역시 이실두르처럼 암흑의 힘에 결박되어 세상을 파멸로 내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프로도가 영웅인 이유
그렇다면 프로도는 단지 나약하고 비겁한 패배자에 불과한가? 그렇지 않다. 20세기 최고의 신화 해설가 조셉 캠벨에 의하면 신화 속 영웅에겐 다섯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첫째, 초기엔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둘째, 여행 중에 엄청난 시련을 당한다. 셋째, 주어진 소명을 완수하고 승리를 쟁취한다. 넷째, 귀향하여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다섯째,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한다.
그런데 프로도의 여정은 이 과정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주인공이 프로도일 수밖에 없는 이유, 결정적 순간에 스타일 구긴 프로도가 끝까지 영웅으로 남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마지막 순간에 그릇된 선택을 하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는 위험한 여행을 자청하고 절대반지의 사악한 속삭임에 영혼을 잠식당하면서도 우여곡절 끝에 불의 산 정상까지 반지를 운반한 프로도는 자신의 한계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절대반지를 소멸(燒滅)하러 불의 산을 오르는 프로도는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그리스도의 재현인지도 모른다. 흑암의 힘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해야 한다는 뚜렷한 소명의식, 절대반지와 십자가, 불의 산과 갈보리산(골고다), 구레네 시몬(십자가를 나눠 진 사람)과 샘 등이 유사한 형태로 대응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의 책무를 잊지 않았던 그리스도와 달리 유한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절대반지(절대권력, 절대악의 상징)에 굴복한 프로도는 완벽한 영웅의 모델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다. 그 대신 2%(혹은 20%) 모자란 프로도의 빈자리를 서로 상반된 역할의 조연들(샘과 골룸)이 보완해 주면서 힘겹게 영웅 신화가 완성된다.
반지를 소멸할 것인가 소유할 것인가
특히 마지막 장면은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기게스 신화(투명인간으로 변하는 반지를 이용해 왕을 죽이고 왕국을 차지함)의 철학적 인식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도 도덕적 실천이 가능하냐는 물음과 연결되어 있다.
이때 절대반지를 소멸할 것이냐 소유할 것이냐 선택의 기로에서 갈등하는 프로도의 모습은 영락없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작게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크게는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역사의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들과 직면한다.
바로 그 선택의 순간에 인간은 이기적이고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반지의 제왕> 원작자 J.R.R. 톨킨의 대답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관론이나 회의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한자의 한계를 자각할 때 비로소 한계상황을 극복할 돌파구를 찾을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와 유사한 상황을 일본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진경의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에는 <은하철도 999>의 마지막 장면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는 한, 아니 ‘나’라는 관념을 버리고 ‘나의 신체’ ‘나의 영혼’이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워지지 않는 한 대체 누가 자기-파괴의 목걸이를 던질 수 있을 것인가?
(.....) 하지만 메텔은 떠밀려 간다. 철이가 대신 그것을 던진다. 스스로를 던지지 못할 땐, 이처럼 옆에서 던져주는, 혹은 함께 던져주는 친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어쩌면 메텔의 마지막 동반자로서 철이가 해야 했던 최후의 행동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메텔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 그런 만큼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함께 던져주는 이 행위 속에서 나와 친구의 경계는 함께 하는 존재를 포괄하는 ‘우리’라는 가변적 집합으로 변환된다. - 이진경 外,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중에서
메텔은 자신의 어머니 프로메시움이 통치하는 기계 문명의 결정체 메텔성을 파괴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인물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메텔은 파괴의 목걸이를 던지지 못하고 망설인다. 프로도와 마찬가지로 끝내 자기 자신(여기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도 포함된다)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프로도에게 샘과 골룸이 있듯이 메텔에겐 철이가 있다. 메텔 대신 철이가 목걸이를 던짐으로써 길고 긴 여정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는다.
이처럼 프로도와 메텔은 유한자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한계상황 앞에서 좌절하지만 그들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는 충직한 하인, 진실한 친구의 도움으로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 최후의 승자가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유한자 개개인의 분열된 힘을 '우리'라는 가변적 집합으로 변환할 때 비로소 한계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언론노조 총파업 사태가 현실화된 지금의 한계상황을 극복하는 데 이 깨달음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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