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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퇴비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아주 질 좋은 거름이 됐다.
▲ 열우물 텃밭 텃밭에서 퇴비를 만들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은 아주 질 좋은 거름이 됐다.
ⓒ 김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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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전환점은 언제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것 같다. 나에게 올해가 그런 해였던 것 같다. 올해 도시텃밭을 일구면서 내 삶의 많은 것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작년 말 십정동 열우물이란 곳에 텃밭을 얻었다. 물론 여럿이 함께 운영을 하기위해 회원도 모집되었고 각 회원들의 개인텃밭과 함께 관리하는 공동텃밭을 함께 두고 운영되었다. 열우물 지역은 부평이라는 과밀도시에 그나마 남아있는 그린벨트지역이며, 농지가 잘 보존된 곳이다. 최근엔 그린벨트가 많이 완화되어 개발의 움직임이 보이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얻은 땅은 땅주인이 무상으로 관리하는 방식으로 임대한 것이다.

겨울에 그 땅을 처음 보러 갔을 때가 생각이 난다. 그야말로 황무지, 검은 비닐로 덮여있는 땅위로 호박넝쿨들이 을씨년스럽게 덮고 있었다. 비닐을 걷어내자 황토 흙에 자갈이 잔뜩 섞인 땅이 드러났다. 농사지을 땅을 얻었다는 기쁨과 함께 막막함도 밀려왔다.

그사이 나에겐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큰 병에 걸리신 것이다. 고향 가평에서 평생을 농사를 지으시며 살아오신 아버지는 작년 가을부터 어깨 아픔을 호소하시다가 겨울이 돼서야 큰 병원의 정밀 진단으로 간암에 의한 뼈 전이가 원인인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올 초부터 투병을 하시던 아버지는 끝내 2개월 조금 지나 3월초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그동안 혼자 지으신 농사의 문제가 겹쳐왔다. 결국 논농사는 1/4정도로 줄여 형과 내가 짓기로 하고, 밭농사는 절반으로 줄여 어머니가 짓기로 하였지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동안 농사를 도운적은 많았지만 일 년 농사계획과 시기별 해야 하는 일들을 전혀 몰랐고, 수 십 년 몸에 배어 농사지으신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큰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결국 논농사의 시작인 못자리부터 실패하게 되었고, 급하게 모종을 위탁하여 길러와 모내기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있다지만, 힘쓰는 일은 형제가 없으면 어려웠고, 때에 맞춰 내려갈 수 없을 때는 곤란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버지가 계실 때 진작 농사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와 열우물 텃밭은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농사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해준 곳이다. 그동안 나에게 농사일은 그야말로 '힘든 노동'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농번기가 되면 일요일, 방학을 농사일을 돕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컸기 때문이다. 지금생각해보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열우물 텃밭 농사는 나를 위한 농사였고, 노동이 즐거웠다. 거름을 마련하려고 오줌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워 졌고, 밭에 풀이 자라면 의래 호미를 들고 풀을 매었다. 나의 변화는 자연스레 아내도 변화시켰다. 평소 벌레를 싫어하고 농사일을 해보지 않았던 아내도 내가 가지고 오는 상추며 호박에 반가워했고, 함께 밭으로 가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하지면 여전히 호미를 들고 일을 하다가도 지렁이가 나오면 펄쩍 뛰며 놀란다.

텃밭으로 향할 때 오줌통을 가지고 가서 올 때는 단호박과 피망을 담아갔다.
▲ 자전과와 텃밭 텃밭으로 향할 때 오줌통을 가지고 가서 올 때는 단호박과 피망을 담아갔다.
ⓒ 김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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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우물 텃밭은 휴일이면 밭을 가꾸러온 회원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거의 모두가 가족들이 함께 왔다. 특히 아이들은 벌레도 잡고, 호미로 땅도 파보고 이것저것 자기들 끼리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모른다. 작물에 물도 함께 주고, 수확도 함께 돕는 아이들의 모습이 여느 도시아이들과 달라보였다. 텃밭은 자연스레 아이들을 바꾸어 갔고, 가족을 바꾸었고, 텃밭이란 공간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나에게도 이제 텃밭농사는 더 이상 힘든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된 것이다. 상추·케일 등 쌈 채소부터 감자·고구마·오이·호박·고추·가지·피망·완두콩·강낭콩·파·땅콩·옥수수 그리고 가을에는 무와 배추까지 정말 여러 종류를 심었고, 이렇게 수확된 것들은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자급하고 남아 이곳저곳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시골에 내려갔다가 어머니가 감자를 싸주시려고 하면 수확한 감자가 있다고 마다하기도 하였으니, 반 농사꾼이 다 되었다.

농사의 체험은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한다. 광우병사태나 멜라민 파동으로 먹을거리의 안전성 문제가 커지면서, 사람들은 어떤 걸 먹어야하는지 막막해한다. 직접지은 작물, 믿을 만한 아는 사람이 지은 농산물. 이것보다 더 안전한 게 있을까?

올해 세계적인 곡물가 폭등에 에너지난까지 오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러다 정말 먹고살기 그자체도 어려워지겠구나'였다. 그나마 나로선 시골에 논밭이 있어 마음 한구석에 대비책이 되었다고 안심한 면도 있었지만, 그것도 농사지을 방법을 알아야 하기에, 도시에 이렇게 가꿀 수 있는 텃밭이 있다는 것은 소중한 것이다.

도시농업에 대한 관심에 생태에 대한 공부를 조금씩 시작하게 되었고, 자연히 대안적인 삶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농사는 그 대안적인 삶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고향 농촌을 떠나 인천에 살고 있지만, 농촌의 위기가 이렇게 깊이까지 몸으로 느껴진 것은 올해 텃밭농사를 짓고, 이로 인해 생겨난 다양한 고민들을 생각하면서부터이다.

김장밭을 만들다가 나온 지렁이를 보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있다.
▲ 아이들과 지렁이 김장밭을 만들다가 나온 지렁이를 보고 아이들이 좋아하고 있다.
ⓒ 김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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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이네 가족은 텃밭회원 모두가 인정하는 열심회원이다. 소린이의 오줌을 받아와 액비를 주기도 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5평 작은 텃밭으로 큰 기쁨을 누리는 가족이었다. 얼마 전 텃밭회원모임에서 일 년 농사를 마무리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소린 아빠의 말이 떠오른다.

"처음엔 그냥 재미삼아 해보자하고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시작했는데, 두 달 전부터 위기를 느끼고 도시농업이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나중에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누가 먹을 것을 생산할 것이며, 외국에서 비싼 값에 사오게 될 텐데, 그러면 정말 큰일이 날 것 같다. 농사체험도 중요하지만, 농사짓는 기술과 경험을 쌓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

이야기를 듣고 정말 놀랐다. 텃밭회원들에게 농사법과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농업의 위기나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는 함께 나누는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도, 이미 몸으로 느끼면서 스스로 깨달았다는 것에 놀랐고, 그런 위기의식을 모두가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한 동질감으로 반가운 기분도 있었다.

아직도 많은 도시민들은 대형마트에 가서 카드를 긁으면 언제나 넘쳐나는 먹을거리를 살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고, 자기가 먹는 것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어 내 몸에 들어가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풍요로움이 계속되길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도시민들이여 늦지 않았으니 텃밭농사를 시작하라"고. 그러면 건강도 좋아질 것이며, 가족도 화목해질 것이고, 신선한 채소도 얻을 수 있고, 생태적인 삶을 고민할 것이고, 농업의 중요성도 알게 될 것이며, 이웃과 더욱 친해지게 되고, 도시의 환경도 바뀔 것이다.


태그:#도시농업, #도시텃밭, #텃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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