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연구기관인 한국보건사회연구원(보사연)에서 최근 '경제위기에 대비한 사회정책 핵심과제'라는 제목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보사연은 지금 추세대로 경기침체가 이어질 경우 내년에는 소득이 최저생계비 이하인 빈곤층이 2006년도의 두 배인 20.9%로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그리고 이 중 70~80%가 현 사회보장제도로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분석도 함께 나왔다. 보사연의 예상대로라면, 곧 천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사회안전망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빈곤층의 지위로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한국일보 12월 13일자 [칼럼] '빈곤층 1,000만'의 신음 참조).
보사연의 이런 분석을 ‘과장’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인천남동공단 공장의 10% 가량이 매물로 쏟아져나왔다. 부도업체 수는 11월에만 321개로, 3년 7개월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건설업계의 급격한 침체로 건설현장의 일자리 증가율은 16개월 째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대기업 자동차업계에서는 줄줄이 감산계획을 발표했고, 그 여파로 하청업체들이 휘청이고 있다. 총체적인 감산, 부도, 폐업, 그리고 그로 인한 임금 삭감, 실업이 줄을 잇고 있는 것이다. 경제위기를 넘어서서, 이젠 당장 민중 생계가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다.
보사연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사회안전망 적용을 늘려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막상 정부는 이런 ‘당연한 방안’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해결책’으로 내놓고 있다.
'인건비 내리면 고용이 증가한다'는 논리의 허구성
노동부는 12월 8일 ‘최저임금제도 개선방향’을 발표했다. 노동부의 발표 내용에는 ▲ 60세 이상 노동자가 동의할 경우 최저임금을 감액적용 ▲ 본래 최저임금 감액 적용대상이었던 수습근로자의 사용기간을 현행 3개월에서 6개월로 연장 ▲ 근로자의 숙식비를 일정 한도 임금에서 공제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11월 18일 김성조 한나라당 의원이 내놓은 최저임금법 개정안과 거의 동일한 내용인데, 결국 최저임금 적용배제대상을 확대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노동부는 “지나치게 높은 최저임금이 고령자, 청년층 등의 고용 기회를 축소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이번 ‘개선’방안을 내놓은 취지를 설명했다. 과연 최저임금을 낮추고 기업의 인건비 압력을 없애주면 고용이 늘어나서 당장 고령층?청년층을 비롯한 민중들의 실업문제가 해결될까. 일단 이건 발상 자체만으로도 너무도 가혹하다. 안 그래도 경기침체 속에서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 지난 세월동안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던 이들에게 사회안전망을 확대해주지는 못할망정 임금기준까지 깎는다니.
게다가 지금의 ‘고용 위기’는 최저임금 낮춘다고, 인건비 낮춘다고 해결될 수준의 것이 아니다. 이번 경제위기가 어떻게 해서 오게 됐는지를 다시 한 번 짚어보자. 2008년 초까지만 해도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절정에 올라있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어느 나라보다도 신자유주의 경제를 앞장서서 실행해왔다.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금융산업을 팽창시키고, 고용을 유연화했다. 금융시장을 외국자본에 완전개방하여 외국자본들이 마음껏 한국으로부터 이윤을 가져갈 수 있도록 보장했다. 실물경제는 정체된 채로 버려졌고, 금융만이 고속 경제성장의 열쇠로 떠받들어졌다. 그 과정에서 양극화는 말그대로 ‘시대의 트렌드’가 되어버렸고, ‘고용 없는 성장’, ‘수출만 증가하고 내수는 침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발 금융위기가 한국경제를 강타했고, 한국경제의 거품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그리고 지금도 무너져내리는 중이다). 건실한 노동을 통해 실물가치를 창출해내기보다는 외국자본의 투기바람과 부동산시장?금융시장의 거품으로 고속성장을 노린 결과였다. 그리고 무너져내린 거품은 실물경제에까지 영향을 미쳐 대규모 감산·실업 사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경제위기와 고용한파는 노동의 가치를 무시하고서 신자유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함으로써 빚어진 구조적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지나치게 높은 최저임금” 운운하며 노동자의 임금을 더 깎아내리는 것은 고용창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한국경제의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더 크다.
'신자유주의 프렌들리'보다는 '노동, 실물 중시'가 필요한 때
현 상황에서는 한국경제의 왜곡된 구조를 노동 중심, 실물경제 중심으로 바꿔내기 위해 민중의 생계를 보장하고 내수를 증진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책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쓰러져가는 중소기업들 중 건실한 중소기업에 직접 자금수혈을 해주고, 어쩔 수 없이 도산한 기업의 노동자들에게는 튼튼한 실업대책과 사회안전망을 갖춰주는 등의 조처가 필요하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된 임금을 보장하고 고용을 안정시킴으로써 민중들의 생계를 탄탄히 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 정부와 여당의 행보는 구조적 모순이 드러난 지금의 신자유주의 질서를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종합부동산세 완화, 법인세 완화, 상속세 완화, 금산분리 완화, 대기업 언론분야 진출규제 완화까지, 대기업과 고소득층을 위한 여당과 정부의 '완화' 시리즈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여기에다 사회보장 예산 감축과 공기업의 대규모 인원감축도 진행하고 있다. 최저임금기준 완화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벌써 생존권 위협은 '현재진행형'이다. 빈곤화의 물결이 이미 서민들의 턱밑까지 차오른 상황이다. 지금 당장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해나가야 한다. 더 이상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 ‘비즈니스 프렌들리’의 환상으로는 우리 경제는 버텨나갈 수 없다. 여당과 정부의 각성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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