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가 예산정국이었다면 이번 주는 한미FTA 정국이 될 모양이다.
예산정국에서 민주당은 그야말로 참패했다. 민주당 내 일각에서는 '한나라당의 부자감세 중 일부분을 막아냈으니 부분적인 성과가 있었다'거나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는 식으로 위로하는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는 정말로 자신들의 주제를 모르는 소리다.
야당에게 필요한 건 비판정신과 선명성
민주당은 이제 여당이 아니라 야당이다. 국민들이 여당에게는 책임성과 내용적 합리성을 요구하지만, 야당에게는 비판정신과 선명성을 더 요구한다. 특히 여당이 절대적 힘의 우위를 갖고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지금의 정국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이러한 상황에서 '책임 야당', '합리적인 토론과 타협' 운운하는 것은 쥐가 고양이를 생각하는 격이다. 이렇게 얘기해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면, 최근의 '강달프' 현상을 보라. 5석의 미니정당 대표가 거대 여당 원내대표에게 '깡패'라는 소리를 들으며 호통치는 모습에서 국민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있다.
내 생각에는 한미FTA 정국이 민주당의 운명을 결정할 것 같다. 만약, 한미FTA 정국에서도 지난 주처럼 맥빠진 모습을 보인다면, '민주당=한나라당'의 등식에 의해 '진보대연합'에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져 민주당이 대연합에 낄 자리는 사라지게 된다.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 및 야당의 대연합에 끼지 못하면 민주당은 길 잃은 양 신세로 전락할 것이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여 자멸할 우려마저 있다.
일각에서는 '보수 정당인 한나라당과 진보연합의 중간에 있으니 민주당이야말로 합리적 중도정당이 된 것'이라며 정신나간 소리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은 민주당을 합리적인 중도 정당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멍청한 한나라당'으로 만들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진보적인 성향을 지니는데 가족문제에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거나, 경제정책에서는 보수적인 성향을 지니는데 사회정책에서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인다든가 하는 식이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한때는 진보 정당을 지지하다가 다른 때는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때로는 지지정당을 아예 포기하거나).
이러한 양면적인 모습을 일부에서는 '중도적 가치'로 착각하고 있다. '합리적인 중도' 운운하며 매사에 물에 물탄 듯한 모습을 보이면 진보와 보수 양쪽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게 된다.
낯간지럽다고 한미FTA 비준 양보할 건가
진보적 가치와 보수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그 사람의 내면에 잠재된 진보적 성향을 효과적으로 끄집어내야 한다. 예를 들면, 보수적 언어로 진보적 가치를 설명한다든가, 진보적인 논리를 보수적인 감성으로 포장한다거나 하는 식이다. 물론, 진보의 깊이와 보수의 깊이는 당시의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수위 조절을 해야 할 것이다.
결국, 무당파를 끌어들이려면 진보의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합리적 진보의 가치를 굳건히 지켜야 한다. 그래야, 무당파의 양면성 중 진보적 성향을 계속 자극하여 자신들의 지지자로 만들 수 있다. 정치에서 진보와 보수는 전쟁터의 진지와 같다. 전쟁에서는 자기 진지를 굳건히 지키는 자가 최후에 승리하는 법이다. 정치에서 중도는 진지 없는 낙오자일 뿐이다.
한편, 한미FTA에 대하여 민주당이 원죄가 있기 때문에 선명한 투쟁을 하는 데 있어서 낯간지러운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달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한미FTA 재협상론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투쟁할 명분이 어느 정도는 생긴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상황변화에 의한 재협상론' 정도가 아니라, '너무 서두른 감이 있다'는 정도로 사실상 사과하는 발언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분 성격상 이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이니 아쉽더라도 이 정도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부족한 투쟁 명분은 여당 시절 한미FTA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전·현직 의원들을 전면 배치함으로써 메우면 된다.
이번 한미FTA 정국에서 민주당은 몇 명의 '싸움꾼 스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2004년 탄핵정국에서 보여준 '처절한 감동'을 재현해야 한다. 배부른 여당 시절의 경험 때문에 이게 무슨 소리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노동당을 모방하면 된다.
한나라당은 이재오·홍준표·김문수·정형근 등 걸출한 '싸움꾼 스타'를 계속 재생산하여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 톡톡히 효과를 보았다. 또한 '깡패'라는 비난에 대하여 '강도 잡는 깡패가 되겠다'는 민주노동당의 업어치기 전술을 배워야 한다.
민주당은 '싸움만 하는 야당'이라는 보수언론의 비난을 걱정하기 전에 '싸움도 못하는 야당'이라는 내부 비난을 더 걱정해야 할 처지에 있다. 보수언론이야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어차피 욕하게 되어 있지 않은가?
지금 상황에서 '책임 야당' 운운하는 것은 고양이가 배고플까봐 자기 목숨을 내놓는 멍청한 쥐가 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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