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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에 있는 한 제약회사 연구소 앞마당에 들어선 관광버스들과 노인들
 천안에 있는 한 제약회사 연구소 앞마당에 들어선 관광버스들과 노인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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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들 하십니다, 저쪽 차에서는 열다섯개나 샀는데 우린 겨우 한개라니 말이 됩니까?  이런 곳에 들를 때 물건 사려고 할 때만 관광 오세요. 물건 안 사려면 오지 마세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물건 사지 않으려면 오지 말라니. 그러려면 관광객 모집할 때부터 그런 단서를 붙여서 모집하던가 했어야지, 이건 아예 죄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지 않는 건데 오늘은 꼭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 같네요."

옆자리 60대 초반 아주머니가 혼잣말처럼 넋두리를 한다. 물건을 사는 것도 한두 푼이어야 살 것 아닌가? 최하 단위가 30만원이 넘으니 주머니 가벼운 노인들이 선뜻 살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엉겁결에 따라 나선 쇠고기 구입 관광, 그런데

지난 12월 16일 아침에 떠난 관광길에서였다. 전날 오후에 아내가 갑자기 지방 관광을 같이 가잖다.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관광안내문을 받아보고 며칠 전에 친구와 함께 가기로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갑자기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못 가게 되었으니 나랑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관광회사에는 두 사람을 예약했으니 숫자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당일 특별한 약속이 없던 터라 아내를 따라나섰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나가니 마침 관광버스가 도착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북 지역을 빙 둘러가는 다음 코스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미아역에서도 두 사람이 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한 사람만 탔다. 수유역에서는 다섯 사람이 타기로 예약되어 있었는데 한 사람도 오지 않는다고, 안내를 맡은 아주머니가 투덜거린다.

이렇게 노원구를 거쳐 고속도로로 나가는 동안 예약했다는 서른 명 중에 열다섯 사람만 태운 버스는 천안을 향해 달렸다.

예약 손님 중에 50%, 열다섯 사람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열다섯 사람은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한 사람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60대 이상 70대 노인들이었다.

"2만원 이하는 쇼핑 두 곳 들르는 거, 잘 아시죠?"

관광요금은 1인당 1만 5천원씩이었다. 더구나 점심을 대접하고 지방 한우단지에 들러 쇠고기를 사오는 특별한 관광 상품이었다.

"소문은 들어보셨죠? 이미 다녀오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 우리들이 가는 이 곳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소문난 한우 쇠고기 단지입니다. 값도 싸고 100% 믿을 수 있는 우리 쇠고기니까 가셔서 직접 사서 잡수기도 하시고 넉넉하게 사다가 가족들이랑 나눠 잡수시면 좋을 거예요."

안내원 아주머니의 말처럼 목적지는 지방 한우 쇠고기 단지였다. 그런데 우선 비용이 저렴해서 돈 없는 노인들이 많이 참여한 것 같았다. 더구나 유명한 지방 한우단지가 목적지니 그 곳에서 우리 한우 쇠고기를 구입하면 되리라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한 가지 양해해주셔야 할 것은 다름 아니고 가다가 두 군데를 더 들러 가겠습니다. 천안에서 한 곳, 금산에서 한 곳, 아시죠? 이런 관광은 반드시 쇼핑이 곁들여진다는 것 말예요. 2만원 이하 가격대는 두 곳, 3만원 이하 가격대는 한 곳을 들른다는 것은 상식이거든요."

"오늘 잘못 온 것 같은데…. 한우단지에 가니까 그 곳에서 쇠고기만 사오면 될 줄 알았는데, 두 군데나 들러 가면 여간 난처한 일이 아닐 텐데…."

안내원의 말을 듣고 아내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전에 한두번 비슷한 관광을 경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이미 버스는 달리고 있었으며 도중에서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필요없는 약이나 건강식품은 안 사고 버티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잠깐 눈을 붙였다.

점심 먹은 식당 앞마당에서 바라본 금산 서대산
 점심 먹은 식당 앞마당에서 바라본 금산 서대산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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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노인들의 구매력도 강남-강북 차이 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천안에 있는 모 제약회사 연구소였다.

버스에서 내려 들어간 연구소에서는 이 제약회사에서 생산한 비전문 약품을 소개하고 있었다. '연구소 팀장'이라는 사람도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사람이었는데 관광 나온 노인들을 상대로 하는 홍보 판매에 아주 능숙했다.

연구소에 들어설 때부터 부담감 때문에 풀이 죽고 무표정하게 굳어있는 노인들을 적당히 웃기기도 하고, 나이 든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 해당될 것 같은 증상을 강조하며 약에 대한 호기심과 구매욕을 유감없이 자극했다.

즉석에서 몇 사람에게 직접 먹어보도록 하는 연출까지 하는 동안 노인들은 어느새 긴장이 풀어져 있었다. 뒤이어 시중에서 구입했을 때보다 30%나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는 것과 덤으로 주는 약과 보완 영양제까지 탁자에 올려놓자 노인들이 너도 나도 손을 들었다.

우리 일행들과 같은 방에 들었던 다른 40여 명의 노인들 호응은 더욱 좋았다. 어느 지역에서 왔느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구 일대에서 온 노인들이었다. 판매원들은 노인들을 이곳 저곳 찾아다니며 약 구입을 강권했다.

내게도 몇몇 판매원들과 관광안내원의 권유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들의 권유는 매우 집요해서 뿌리치기가 매우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렇게 30여분이 지나 연구실에서 풀려난 노인들이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우리 일행들 중에서 약을 구입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아니 세상에 이게 뭐야? 겨우 한 사람이라니? 저 쪽은 열다섯 개나 샀는데 우린 겨우 한 개가 뭐람, 나 참 기가 차서…."

곧 뒤따라 올라와 푸념을 늘어놓는 안내 아주머니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안내 아주머니의 푸념은 푸념으로 끝나지 않았다.

죄인처럼 구박 받으며 다녀온 관광길

"아니, 그럼 할 일 없는 노인들이 자주 이렇게 나오는데 어떻게 올 때마다 물건을 산단 말이요? 몇십만원씩이나 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참지 못한 노인 한 분이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1만5천원씩 받아가지고 장사가 되겠어요? 솔직히 버스비도 안 되잖아요? 이런데 오면 당연히 물건을 사야지, 다음부턴 물건 살 때만 오세요."

이번에는 아예 톡 쏘아 붙인다. 노인은 "쇠고기 사러 가는 관광이니까 쇠고기만 사면 될 줄 알았지, 누가 이런 것까지 사야 되는 줄 알았나, 내 참"하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다음 코스인 금산에 도착하여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들른 홍삼제품 판매장에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 곳에서의 홍보 방법은 비슷했지만 구입 권유는 한층 더 집요했다. 덤으로 하나씩 더 얹어주는 구매욕 자극은 그야말로 주머니 사정만 허락했다면 나도 아내도 몇십만원짜리 제품을 한 개씩 사들고 나왔을 것이다.

이번에도 단 한 사람만 60여만 원짜리 제품 한 개를 사들고 나왔다. 뒤따라 차에 오른 안내원 아주머니의 푸념이 한층 더 심했던 것은 물론이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바라본 전주천의 철새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바라본 전주천의 철새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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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삼캔디라도 팔아달라"는 아주머니의 말에 모두들 만원짜리 지폐 한두 장씩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시중에서 한 봉지에 2000~3000원씩 하는 캔디는 1봉지도 만원, 2봉지도 만원이었다.

"세상에 이런 관광이 어디 있어? 다시는 이런 관광 못하겠구먼. 기분 나쁘고 죄인 취급 받고."

노인들 몇이 불만을 터뜨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날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요즘 보기드문 '버스기사 봉사료'라는 이름의 거출까지 행해졌다. 기분 나빠하는 노인들 몇은 천원 지폐 한두 장씩을 내놓았지만 대부분 5천원씩을 내놓고 있었다.

"괜히 나 때문에 구박 받으며 지방 나들이 하게 해서 미안해요."

어두운 밤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죄 없는 아내가 공연스레 미안해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관광 나들이, #구박, #상품강매, #노인들, #시인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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