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우리 식으로
.. 이미 우리가 골뱅이의 위대한 역사를 세운 것처럼,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우리 식으로 좀 만들어 써 보자는 의견이다 .. 《정재환-대한민국은 받아쓰기 중》(김영사,2005) 60쪽
“골뱅이의 위대(偉大)한 역사”는 “골뱅이라는 훌륭한 역사”나 “골뱅이와 같은 엄청난 역사”로 다듬고, “세운 것처럼”은 “세웠듯이”로 다듬습니다. “어느 정도(程度)는”은 “어느 만큼은”으로 손보고, “써 보자는 의견(意見)이다”는 “써 보자는 말이다”나 “써 보면 좋겠다”나 “써 보면 좋으리라 생각한다”로 손봅니다.
┌ 식(式)
│ (1) 일정한 전례, 표준 또는 규정
│ (2) = 의식
│ - 식이 거행되다
│ (3) [수학] 숫자, 문자, 기호를 써서 이들 사이의 수학적 관계를 나타낸 것
│ (4) ‘수법’, ‘수식’을 나타내는 말
│ - 곱셈식 / 덧셈식 / 나눗셈식 / 뺄셈식
│ (5) 일정하게 굳어진 말투나 본새, 방식
│ - 그렇게 농담 식으로 말하면 / 그런 식으로나마 그를 상대해 주고 있는
│
├ 우리 식으로
│→ 우리 나름대로
│→ 우리 깜냥껏
│→ 우리 힘으로
│→ 우리 손으로
│→ 우리 스스로
│→ 우리 머리를 짜내어
└ …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가는 전철길에서 1970년대에 나온 수필모음을 한 권 가방에서 꺼내어 읽습니다. 글쓴이는 버스를 타고 자리를 얻으면, 중고등학교 아이들 가방을 받아 주면서 무릎에 올려놓기를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애써 가방을 받아 주며 학생들 고단함을 덜어 주고자 하는 뜻은, 학생들이 버스에서 내릴 때까지 ‘씨부렁거리는 온갖 욕’ 때문에 쪼그라든다고 붙입니다. 한창 싱그럽고 풋풋해야 할 푸른 아이들(1970년대 중고등학생)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말투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참 큰소리로 지껄이는 모습을 보면서, 이 아이들이 조금만 더 자라면 대학생이 될 테고, 거기에서 더 크면 사회인이 될 텐데, 이 아이들이 지금뿐 아니라 앞으로 쓸 말이 어찌 될까 싶어서 한숨이 푹푹 나온다고 글 마무리를 짓습니다.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생각합니다. 1970년대에 고등학교 2학년쯤이라고 헤아린다면, 1950년대에 태어났을 테고, 요즈음 햇수를 돌아보면 쉰을 넘기고 예순이 좀 못 된 나이입니다. 그무렵 아이들 거친 말투는 그 뒤로 그리 나아졌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며, 그무렵 아이들은 오늘날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에 앞선 1960년대 중고등학교 아이들 말씨는 어떠했을까요. 1980년대 중고등학교 아이들 말씨는 또 어떠했을까요. 1990년대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2000년대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다가올 2010년대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앞사람한테 살가운 말씨를 물려받지 못하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대학생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뒷사람한테 아름다운 말씨를 물려주지 못하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대학생 아이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회살이를 한다는 우리 어른은 어떠한가요.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우리 어른은 어떠하나요. 쉰 예순 일흔을 넘긴 어른들은, 마흔 서른을 넘긴 어른들은, 스물을 넘긴 젊은이들은 어떠하지요?
┌ 농담 식으로 말하면 → 농담처럼 말하면 / 우스갯소리처럼 말하면
└ 그런 식으로나마 → 그렇게나마 / 그런 투로나마
우리가 살아가는 대로 우리 말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생각하거나 꿈꾸는 대로 우리 삶이 흘러갑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길에 따라서, 우리가 걸어가려는 길에 따라서 삶이 달라지고 말이 달라지고 생각과 꿈뿐 아니라, 매무새와 겉모습까지 달라집니다.
우리 손으로 키우거나 보듬는 우리 문화인가요? 우리 스스로 일으키거나 보살피는 우리 터전인가요? 우리 슬기로 갈고닦는 우리 말이 된 적이 얼마나 있었으며, 우리 깜냥으로 다스리는 우리 글이 된 적은 얼마만큼 있었는가요?
늘 그렇듯이, 우리 말은 깎아내리면서 바깥말은 추어올리는 우리들이 아니었는가 곱씹어 봅니다. 언제나 다름없이, 우리 글은 내팽개치면서 한자와 알파벳은 하늘처럼 섬기는 우리들이 아니었는가 돌아봅니다.
ㄴ. 그런 식의 평가
..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식의 평가를 받으면 마음의 바늘이 크게는 아니더라도 움찔 흔들리고 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 《기류 유미코/송태욱 옮김-나는 아들에게서 세상을 배웠다》(샨티,2005) 159쪽
‘평가(評價)’는 ‘말’이나 ‘소리’나 ‘대접’으로 다듬어 봅니다. “마음의 바늘”은 “마음 바늘”이나 “마음에 달린 바늘”로 손보고, “흔들리고 마는 것을 부정(否定)할 수는 없다”는 “흔들리고 맘을 어쩔 수 없다”나 “흔들리고 마는 내 모습을 어찌할 수 없다”나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만다”로 손봅니다.
┌ 그런 식의 평가를 받으면
│
│→ 그런 식으로 평가를 받으면
│→ 그런 평가를 받으면
│→ 그렇게 평가를 받으면
└ …
말이란 얼마든지 걸러내어 쓸 수 있습니다. 저마다 제 마음그릇에 따라서 어떻게든 가다듬으면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부터 해 오던 대로 곧이곧대로 쓸 수 있고, 남이야 무어라 하건 말건 얄궂은 대로 쓰기도 합니다.
외마디 한자말 ‘式’이건, 여느 한자말 ‘評價’이건, 쓰고 싶으면 써야 합니다. 쓰고 싶다는데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다만, 이러한 한자말 들을 쓰고 싶다면, 적어도 말투라도 알맞게 추슬러서 “그런 식으로 평가를 받으면”이나 “그런 평가를 받으면”쯤으로는 적어 주어야 합니다.
┌ 그런 소리를 들으면
├ 그런 말을 들으면
├ 그런 대접을 받으면
└ …
우리가 우리 말에 찬찬히 마음을 기울여 볼 수 있다면, ‘식’과 ‘평가’ 모두 다듬어 내면서, “그런 소리를 들으면”이나 “그런 대접을 받으면”으로 고쳐쓸 수 있습니다.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고쳐쓸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살갗으로 깊이있게 느끼면, 몸소 움직여서 제 말과 글을 다시 태어나도록 애쓰게 됩니다. 마음먹지 않고, 살갗으로 느끼지 않으니, 얄궂거나 뒤틀린 낱말과 말씨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 한 마디와 글 한 줄이 얄궂거나 뒤틀리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삶터와 세상이 얄궂거나 뒤틀리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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