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김부겸 민주당 의원이 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하면서 쓴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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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들고만 있지 제대로 정독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에릭 홉스봄의 3부작과 최신간 한 권을 갖고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는 국회 본회의장입니다. 저는 지금 농성 중입니다.
홉스봄의 3부작은 각각 자본, 혁명, 제국의 시대라는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10년 전인 1998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번역되었습니다. 3부작은 읽던 책입니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친구가 권해서 재작년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는데 대통령과 한나라당 덕분에 이번엔 완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그런데 3부작과 함께 따라 들어온 신간의 제목은 <폭력의 시대>입니다. 목차를 얼핏 보니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비판과 21세기 민주주의의 방향을 다룬 책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목이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특히 이 안에서 느끼는 현실감은 대단합니다. '폭력의 시대'라….
점진 주장하는 한나라, 힘으로 밀어붙이는 보수?
저는 오늘 아침 본회의장을 점거하러 들어왔습니다. 언론에선 전광석화같은 기습작전이었다고 평가하더군요. 대개 이럴 땐 왠지 비장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편안했습니다. 지금 민주당 의원들은 80여 명입니다. 170여 명의 한나라당 의원에 최근 한참 위용을 자랑하는 국회 경위들까지 하면 저희는 3:1의 절대 소수입니다. 양팔이 붙잡힌 채 허리춤을 뒤에서 잡고 치켜들면 이상하게 힘을 쓸 수 없어집니다. 2004년 탄핵 때가 바로 그랬습니다. 아마 이번에도 저희는 그렇게 끌려 나갈 것입니다. 자, 그래서 제 기분이 홀가분한 것일까요? 탄핵 때처럼 역풍이 불어 한나라당엔 쪽박이 나고, 민주당엔 대박이 날 테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제가 홉스봄이었으면, 아직 읽어보지도 않은 책이지만 이렇게 썼을 겁니다. '부시 같은 근본주의자가 현실정치를 주도하게 되면 세상은 선 아니면 악, 우리 편 아니면 적, 좋은 편 아니면 나쁜 편, 이 두 가지 밖에 없게 된다. 즉 부시가 빈 라덴을 만든다. 부시는 군대를 동원해 폭격을 하고 빈 라덴은 자살특공대를 시켜 폭탄을 터뜨리는 것 밖에 차이는 없다. 그러나 현실 정치는 전쟁이나 그에 맞서는 지하드가 아니다. 군사를 정치에 끌어들인 죄, 그것이 부시의 가장 큰 죄악일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지금 이명박 대통령이 또 정치를 군사화하고 있습니다. 정치를 선악의 아마겟돈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나라당은 아예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 386 운동권과 진보 세력에 대해 그렇게 줄기차게 비판하고 맞서는 모습을 보면서 진짜 뭐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 뭣도 없습니다. 보수는 점진을 좋아합니다. 국회가 무슨 바겐세일하는 백화점입니까? 120여개의 법률을 한꺼번에 몰아서 그것도 연말 시한을 정해놓고 밀어붙이는 게 점진입니까? 대한민국의 어떤 급진파도 이렇게는 안합니다.
보수는 균형을 좋아합니다. 과격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어긋난 것이고, 아름다움은 비례미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에드먼드 버크는 주장했습니다. 172석 가진 여당이 82석의 야당을 원천 봉쇄하는 게 보수의 균형 감각입니까? '전쟁'이니, '속도전'이니 '전국토의 건설현장화'라느니 무슨 북한 따라 배우기라도 하는 겁니까?
이쯤 되면 한국 보수는 한나라당을 부끄러워 해야 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정신세계에 들어있는 대단히 반보수적인 사고방식을 단호히 제지해야 합니다.
민주당 반사이익? 결국은 한국 정치의 후퇴
저는 지금 사태가 지난 번 탄핵 때처럼 전개되는 것이 대단히 안타깝습니다. 설사 역풍이 불어 민주당의 인기가 치솟고 한나라당이 곤두박질친다 하더라도 저는 희희낙락할 수 없습니다. 아니 솔직히 당장은 좋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 정치의 또 다른 질곡입니다. 사회적 역관계에 기반하지 않은 의석수의 급격한 변화는 한 편에는 지갑 줍기에 따른 오만과 방심으로, 한 편으론 절치부심의 증오심과 복수심으로 귀결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자꾸 되다 보면 정치가 자꾸 전쟁이 됩니다. 군사작전 하듯 교란하고 기만하고 제압하고 붕괴시켜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하게 됩니다. 정치발전은 결국 정상정치로 가는 것이고 정치가 제도화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돌하고 전쟁을 치를 때마다 한국 정치는 이상한 정치가 되고 모든 제도는 일순간 무력해집니다. 오로지 복수의 정치만이 굳어져 갈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지금 홀가분한 이유는 뭘까요? 욕먹을 각오하고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한국 보수가 집권하고 나서 진짜 정치를 잘 하고 경제를 살려버리면 어떡하나 내심 겁냈던 사람입니다. 평소 자기들 주장대로 정치는 국민통합적으로 하고 경제는 경험과 능력에 바탕해 능숙하게 다루어 버리면 진보나 민주화진영은 말 그대로 아프리카 사막이 됐을 겁니다. 국민들에겐 대단히 죄송스런 말씀이나 이명박 보수정권, 이제 본색 다 드러났고 앞으로 남은 4년이 걱정 될 뿐입니다.
그러니 저희 민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아서 우리가 잘하면 되는 것 아닐까하는 약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제대로 못했나하는 회환과 반성, 우리 정치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하는 자괴감, 그리고 정말 우리당이나 저는 언젠가는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때문입니다.
이제 점령군이 며칠 안 있어 본회의장 문을 따고 들어올 것입니다. 저는 물론 이를 악물고 저항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눈물을 흘리면서 호통을 치겠습니다. ‘고작 그것 밖에 안 됐던 거냐?’고 실컷 혼내 줄 것입니다.
한국 정치사가 또 다시 벼랑에 섰습니다. 안도감이 약간 들기는 하였으나, 진정 가슴이 한강물처럼 시커멓게 멍드는 하루였습니다.
2008년 12월 26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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