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작가가 만든 그림책
처음에는 '책읽는곰' 출판사 단행본이 아닌줄 알았다. '책읽는곰'하면 수채화나 연필화, 선이 굵은 그림이 생각나는데, <시끌벅적 그림 친구들>(책읽는곰)은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은이 크리스 투가스는 월트디즈니 사를 비롯해 몇몇 영화사에서 애니메이션 일을 했다. 어릴 적 그림을 많이 그려본 아이는 감수성이 풍부해지고 친화력도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다채로운 그림도구를 사용하면서 그 특징들을 고르게 익히고, 그 도구들이 표현하는 방식을 습득하기 때문인 것 같다.
<시끌벅적 그림 친구들>에 나오는 주인공 '그림이'는 그림도구라면 닥치는 대로 꺼내서 마음껏 색칠을 한다. 밑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는 과정에서 각 도구들의 특징을 알게 되고, 어떤 도구가 어떤 도구랑 잘 어울리는지 조금씩 알아간다.
크리스 투가스는 애니메이션 작가답게 그림도구들에게 감정과 생명력을 부여해 자신들의 특징을 마음껏 뽐낼 수 있도록 했다. 수많은 캐릭터가 나오지만, 캐릭터 하나하나에 생명의 손길을 불어넣은 흔적이 보인다. 캐릭터들은 불평을 하기도 하고, 훼방을 놓기도 하고, 놀리기도 하고,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과 한 편의 그림을 동시에 보는 기분이다.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
이 책의 이야기는 그림이보다 더 넓직한 도화지가 그림도구들을 초대하는 잔치를 열면서 시작한다. 그림이는 도화지 잔치의 가장 중요한 손님이다. 그림도구들이 잔치에서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뽐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림이가 각각의 그림도구들을 쓸모를 알고 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림이는 그림도구를 하나씩 도화지에 표현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우개로 지워버리기도 한다. 몽당연필과 지우개가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참 신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 나를 지우다니. 실수하는 거야."
몽당연필은 자신도 쓸모가 있는데 지우개가 자신을 지운 것은 너무 경솔한 행동이었다고 탓하는 것이다. 연필은 HB, 2B, B 등 미술용품 가게나 문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도구들인데 각 도구들은 도화지에 자신이 가장 잘 그릴 수 있는 것을 하나씩 그리며 자신의 능력을 자랑한다.
그 다음에는 당연히 크레용이 출동한다. 역시 크레용 아래쪽에는 도화지에 직접 크레용을 한 자국이 남아 있다. 크레용의 특징인 빼곡히 하얀 점들까지 그대로 표현해 사실감을 높여 주고 있다.
그 외에도 굵은 선의 매직팬, 설사쟁이 물감, 말리면서 특이한 흔적이 남은 매직팬, 김밥처럼 옆으로 굴러다니는 파스텔이 도화지에 놀러왔다. 여기까지가 그림의 마지막 단계이겠지만, 그림이가 하는 것은 그림그리기라기보다는 일종의 행위예술이기 때문에 먹물투성이 잉크도 도화지 잔치에 초대되었다. 잉크와 잘 어울리는 펜들이 잉크와 함께 또 놀러 왔다. 그리고 또 가위와 풀이 도화지를 오렸다 붙였다 한다.
행위예술가 그림이의 잔칫날을 다채롭게 표현한 <시끌벅적 그림친구들>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모든 그림도구와 공작도구들의 특징들을 사실적이고 흥미롭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정규 과정에서 그림을 배운다면 그림이는 선생님께 야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림이가 그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그리는 '행위예술'에서는 야단칠 선생님도 없고, 방청소를 하지 않았다고 야단칠 부모님은 애교 하나로 끌어안을 수 있으니 걱정없다.
'그림을 잘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 이것만큼 커다란 메시지가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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