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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을 나타내는 원(原)자는 언덕 아래 샘물을 그린 글자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물'이라는 얘기고,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물이 생명의 시초라는 말이다. 이 글자에 머리 혈(頁)자를 보탠 글자가 바란다는 의미를 표현하는 원(願)자이다.

 

머리를 나타내는 혈(頁)자는 사람의 신체 기관에서 다른 부분을 생략하고 눈을 강조해서 표현한 글자이다. 즉 바랄 원(願)자는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고 기초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 샘물을 찾고 응시한다는 의미를 갖는 글자이다. 사람이 삶을 유지하기 위해 샘물을 찾고 그것을 구하는 것이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바람'이라는 것이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①] 굴뚝 위의 노동자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소의 해인 기축년의 첫 날이다. 그러나 내겐 영하 10도를 넘는 잔인한 날씨가 원망스럽게 느껴지는 날이다. 냉장고에서 꺼내먹는 물 한 잔과, 보일러가 쉼없이 돌아가는 안방이 무척이나 사치스러운 하루다.

 

세계 7대 경제 대국을 만들고 4만 달러가 넘는 국민소득을 안겨주겠다며 입만 열면 '글로벌'을 외쳐대는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의 한 복판에서 두 명의 노동자가 '노동탄압 중단과 기본적인 일자리를 보장하라'며 100미터가 넘는 굴뚝 꼭대기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쳐다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그 굴뚝 꼭대기에서, 제대로 된 침낭 하나 없이 어떤 음식물도 먹지 못한 채 목숨을 담보로 걸고 싸우고 있다. 단지, 법이 인정한 것을 지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사법부가 '옳다고' 판단한 것도 지키지 않는 자본,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이것을 지키라고 굴뚝 꼭대기에 올라가야 하는 노동자, 그리고 누가 범죄자인지 구분조차 못하는 민중의 몽둥이… 이게 대한민국에선 글로벌한 것인가?

 

그렇게 물 한 잔과 침낭 하나도 '허락'되지 못한 채 100미터가 넘는 굴뚝 끝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있을 그들을 생각하면 너무도 죄스럽다. 그들이 거기 있는데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우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터질 것 같다.

 

['대단한 나라'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 ②] 거리의 교사

 

또 있다. 단지 '그건 아니오, 그건 그렇지 않소, 내 소신은 이렇소'라는 행동을 했다고 생계를 박탈당한 7명의 교사가 거리에 있다. 그 교사들은 전국의 학생들에게 똑같은 시험 문제를 풀게 하고 성적에 따라 한 줄로 세우는 것이 교육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이다. 그 '거리의 교사'들은 단지 그런 교육 당국의 처사에 대해 '교육수요자'인 학부모 학생들에게 '그 시험을 치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편지를 보냈을 뿐이다.

 

단지 '그랬을 뿐인' 그 여린 선생들에게 '공'권력은(서울교육감은 공정택씨이다) 학생들을 빼앗고 학교를 빼앗고 생계를 빼앗았다. 교사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파면이라는 칼날을 휘둘렀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4월 15일 소위 학교자율화 조치라는 것을 발표했다. 정부 당국과 교육청이 단위 학교를 지나치게 간섭하고 통제함으로써 학교가 활력을 잃고 경쟁력을 잃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자율화' 조치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부 당국이 주장했던 자율이라는 낱말이 최소한 낯부끄러워서야 되겠는가?

 

개별 교사가 자기가 맡고 있는 학급의 학부모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넘어서 기본적인 생계를 박탈 정도로 중죄란 말인가? 그렇게 하는 것이 학교자율화인가? '이 교과서를 써라 저 교과서는 안 된다'며 웃지 못할 '생쇼'를 하는 것이 이명박식 자율인가?

 

진짜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일찍이 맹자는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은 사악해지고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여 온갖 나쁜 짓을 다하게 되며, 이때 이를 빌미삼아 백성들을 처벌하는 것은 백성을 그물 짓 하는 것과 같으며, 이렇게 하는 것은 군왕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했다.

 

즉 군왕은, 백성들이 먹고 살 수 있게 해주지 못하면 잘못을 저지른 백성들을 처벌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그렇게 처벌하는 것은 일부러 '걸려들기'를 기다리며 덫을 놓고 기다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끈질긴 법정 투쟁 끝에 쟁취한 복직 판결을 다시 이행하라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노동자와, 그런 일 따위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자본, 그리고 그런 그들의 사병이 되어 버린 공권력이 공존하는 나라. 경찰병력을 불러 교문을 잠그고 그 어린 초등학생과 선생을 강제로 떼어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나라. 고무 풍선이 불법 시위 용품이 되는 위대한 삽질 나라!

 

과연 이 나라에 희망이 있기는 한 것일까?

 

원(願)한다는 것은 샘물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생존 그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 물을 찾는 것을 말한다. 높은 지위나 더 많은 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생존을 향한 몸부림은 그래서 절박하다. 어디쯤인지를 알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는 것은 하나의 공포다. 그러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바닥을 본다는 것은 공포로부터의 해방이다. 희망이다.

 

'백성을 그물짓'하고 있는 삽자루 정권을 선택한 우리들의 원죄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버렸다는 것이 희망이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성어가 우리의 소원이 되어 버렸다. 무엇보다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금언이, 백성이 하늘이라는 성현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이다.

 

2009년, 소의 우직함으로 나라를 좀먹는 쥐떼를 쫓아내기를 희망해본다.


태그:#파면교사, #희망, #기축년, #굴뚝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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