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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마지막 순간, 나는 가족과 함께 안방에서 KBS 연기대상을 보고 있었다. 일련의 수상들이 너무도 신속하게 처리되어 왜 이리 급한 것인가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럼에도 2009년 1월 전파를 탄다는 사극 <천추태후>팀에 상당한 시간 할애를 하는 걸 보고서는 역시 홍보는 여전하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던 차였다. 채시라, 김석훈을 비롯한 주요 출연진들이 인터뷰를 할 때, 세 진행자는 안절부절 주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불과 몇 분 후면 2009년 새해가 시작될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색한 웃음과 박자가 맞지 않는 카운트다운 소리와 더불어 새해가 밝아왔고, 진행자는 안심하듯 웃으며 참가자와 시청자에게 새해 인사를 보냈다. 시청하고 있던 나 역시도 쑥스럽게 가족에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새해 인사를 대신했다.

 

출연진을 뒤로 한 영상에는 보신각에 모여 타종하는 오세훈 서울 시장과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용대 선수 등의 모습이 보였다. 우린 '어, 이용대 보인다'라거나 '출세했다, 저 녀석' 같은 잡담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주변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예년 같았으면 사람들의 생생한 소리를 담아낼 만한 순간이었음에도. 폭죽이 피어오르는 시꺼먼 하늘, 밝게 새해를 맞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따금 보였을 뿐이다.

 

그러던 차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흥미를 가졌을 법한 교양 프로그램 KBS 1TV의 <TV 책을 말하다>(이하 책말)가 갑자기 폐지되었다는 것. 그들은 불과 몇 주 전에 외부 진행자 왕상한(서강대 법학과 교수)을 내부 아나운서로 교체했었다. 그 때만 해도 시청자들이 걱정한 건 폐지가 아닌 굳이 좋은 평가를 받던 진행자를 교체한 이유였다.

 

그에 대해 몇몇 사람은 의사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힘쓴 왕 교수가 국감에서 압박당한 것이 이유가 아니겠느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논란도, 걱정도 많았지만 그건 다들 프로그램이 존속한다는 믿음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예고도 없이 프로그램 폐지라니. 그것도 우리나라의 유일무이한 도서 교양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서 말이다.

 

스승이자 영혼의 동반자였던 '책말'

 

진행자 교체의 충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애청자였던 나는 망치로 여러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관심 없던 이는 그게 뭐 대수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애청자들에게 '책말'은 지리멸렬한 세상 속 유쾌한 발견과도 같았다. 능숙하게 사람들을 웃기지도, 치열하게 싸워가며 이슈를 만들지도 않았지만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은 언제나 내게 큰 위안거리였다.

 

'책말'은 인문학, 문학, 자연과학, 철학, 동화에 이르기까지 편식하는 법이 없었고, 어느 한 쪽 의견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도 드물었다. 다양한 장르와 시각을 보여주면서 언제나 책 읽는 자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던 방송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진지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오롯이 '책'만을 위한 버라이어티 교양 쇼이기도 했다.

 

넘쳐나는 책의 홍수, 그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이들에게 나름대로 썩 나쁘지 않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그들. 그런 그들이 있었기에 시꺼먼 어둠 속에서 스탠드 불 켜 놓고 책 읽는 시간이 외롭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나 제자리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난 '책말'과 소통하고, 책과 함께 또 다른 세상을 꿈꾸었다.

 

'책말'에 나왔던 패널들도 잊을 수 없다. 첫 회와 마지막 회를 장식한 진중권 교수, 최근 들어 책에 대한 무한애정을 보이며 열변을 토하던 변영주 영화감독, 귀여운 외모로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하던 정재승 교수, 왠지 고지식한 인상이지만 책과 사람에 대한 애정을 너그럽게 보여주던 김갑수 시인에 이르기까지.

 

그 외 많은 패널이 '책말'에 나와 보여주었던 날카로운 현실 인식과 냉철한 사고, 그리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애정은 내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은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는 스승이자 영혼의 동반자와도 같았다. 대화가 아니더라도 소통이 가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 건 바로 편협하게 사고하지 않고, 다양한 시각을 아우를 줄 아는 그들의 깊이와 여유 때문이었다.

 

이제는 그들을 볼 수 없다. 한두 권의 책을 놓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쾌하게 담론을 나누던 그 모습들은 이제 과거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동안 내 안의 일부였던 것들을 떠나보내려고 하니 그 슬픔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고 아리다. 한 번 결정된 것은 다시 되돌리기 어렵다. 이미 떠난 시간의 뒤꽁무니를 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재갈 물려도, 책은 여전히 노래하네

 

이런 '책말' 폐지를 타종 조작 방송과 연관시킨다면 그건 무리일까. KBS는 현장 소리는 모두 소거한 채, 박소 소리를 인위적으로 조작해 방송에 내보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도대체 그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진행자를 교체하더니 이제는 아무런 사전예고 없이 대뜸 방송을 없애버렸다. 진행자는 다음 주에 보자는 말도 안했지만,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과거 영상과 자막만이 초라하게 '책말'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쓸쓸하고, 씁쓸한 결말이었다.

 

KBS는 언제나 '공영성 확립'을 강조해왔다. '책말'의 폐지는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그동안 경제위기와 관련해 진행자와 패널들은 끊임없이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경제위기 그리고 우리나라의 구조적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왔다. 그러다보니 패널 중에 아무래도 칭찬보다는 비판하는 인사가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분석한 것에 불과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니었고, 기존 사실을 과장해서 부풀리는 법도 없었다. 그들은 예리하게 쏟아져 나오는 반대편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한 프로그램 종영을 이끌어 낼 수 있었을까.

 

'책말'은 소신을 가지고 할 말은 하던 프로그램이었다. <시사투나잇>에 이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육체를 잃어버린 진실은 이제 이승의 구석구석을 부유할 것이다. 강제로 몸을 빼앗겼다고 해서, 진실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책은 여전히 말하고 노래한다. 아니,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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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책을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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