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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고흥 소록도에서.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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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반도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1km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소록도(小鹿島,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섬의 형상이 어린 사슴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이청준의 장편소설인 <당신들의 천국>의 무대이면서 '전라도 길-소록도로 가는 길에'를 읊은 보리피리 시인 한하운의 눈물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 한하운의 '전라도 길- 소록도로 가는 길에' 전문)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8시 10분께, 나는 직장 동료들과 마산을 출발하여 소록도로 향했다. 우리 일행은 11시 20분에 괭이갈매기들이 울어 대는 녹동항에 도착하여 이내 소록도로 가는 배를 탈 수 있었다. 거기서 불과 5분 정도만 가면 소록도이다.

괭이갈매기들이 울어 대던 녹동항.  아직 개통되지 않은 소록대교가 보인다. 
 괭이갈매기들이 울어 대던 녹동항. 아직 개통되지 않은 소록대교가 보인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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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뭇사람들에게 철저한 외면을 당한 한센병 환자들이 그들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하게 그저 모여 살 수밖에 없었던 섬으로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소록도를 방문하고 돌아온 가톨릭 신자에게서 그들이 손수 만들었다는 묵주를 선물 받고 코끝이 찡해 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바쁜 일상으로 곧 잊어 버렸다.

그러나 이번 여행길에서 그들이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자유를 박탈 당하고 인권이 짓밟힌 채 살아왔는지 알게 되면서 여태까지 그들 삶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했던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소록도 군데군데에는 마치 유형의 길을 나서듯 소록도로 들어왔을 그들의 탄식이 배어 있고, 한센병에 대한 우리들의 무지와 편견으로 늘 혐오와 경계의 대상이 되어 부당한 처우에도 어찌할 도리 없이 당하고 있어야 했던 그들의 통곡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센인의 인권이 짓밟힌 참혹한 현장서 고개를 떨어뜨리다

한센병 환자인 부모와 미감아 자녀들이 양편으로 갈라서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던 곳이다.
▲ 수탄장(愁嘆場). 한센병 환자인 부모와 미감아 자녀들이 양편으로 갈라서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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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바람이 그렇게 칼바람인 줄 몰랐다. 차갑고 매서운 바람에 얼굴이 얼얼하고 자꾸 코가 홀짝거려지는 것이 한겨울 높은 산 정상에 올라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새 우리는 수탄장(愁嘆場)에 이르렀다. 그곳은 한센병 환자인 부모와 생이별하고 직원 지대 미감아 보육소에서 격리되어 생활하던 자녀들과 병사(病舍) 지대에서 생활하던 부모가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던 장소였다.

물론 서로 얼싸안으며 상봉의 기쁨을 나눌 수도 없었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길 양편으로 갈라서서 그저 눈으로만 만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고 하니 참 가슴 아픈 이야기다. 자신이 생각해도 신세가 하도 처량해서 그저 퀭한 눈으로 아이를 바라본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눈물이 앞을 가려 오매불망하며 보고 싶어 하던 아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으리라.

 
▲ 애한의 추모비 앞에서.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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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탄장을 지나자 2002년 8월 22일에 세운 애한의 추모비가 우리들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해방된 직후 한센인 84명이 처참하게 학살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을 추모하는 비로 한센인의 인권 회복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기념비이기도 하다. 끔찍한 그 사건이 벌어진 지 57년이 지나서야 그나마 그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비를 학살 현장에 세우게 되었다.

사람들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소록도갱생원 검시실(등록문화재 제66호)과 감금실(등록문화재 제67호)을 보면서 사람의 잔인성에 무서워 몸이 떨렸다. 두 곳 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검시실(檢屍室)은 두 칸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앞방은 사망 환자의 검시를 위한 해부실로 주로 사용되고, 뒷방은 한센인의 정관 절제를 집행했던 곳이다.

한센인들의 정관 절제를 집행했던 검시실(檢屍室). 
 한센인들의 정관 절제를 집행했던 검시실(檢屍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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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금실을 둘러보는 직장 동료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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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방 벽에는 제4대 수호(周防正季) 원장 시절에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벌로 감금실에 갇혔다 풀려나면서 스물다섯 나이로 단종수술(斷種手術)을 받은, 이동(李東)이란 환자의 시, '단종대'가 걸려 있어 그 당시 한센인들의 한 맺힌 삶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수호 원장은 1933년 9월 1일부터 1942년 6월 20일까지 원장을 지낸 일본인으로 온갖 강압적 수단으로 환자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켰는데, 급기야 자신의 동상을 세워 매달 20일을 '보은감사일'로 정해 놓고 환자들로 하여금 참배하게 하는 어처구니없는 짓까지 했다. 결국 그는 환자 이춘상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동상은 태평양전쟁 물자로 징발되었다 한다.

감금실(監禁室) 또한 일제강점기의 참혹한 인권 탄압을 말해 주고 있는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원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수용 환자들은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그곳에 감금되는 부당한 징벌을 받았고 출감 시에는 예외 없이 정관 절제를 받아야 했다.

그래도 세마 공적비 앞에서 푸른 희망을 읽다

 
▲ 소록도 중앙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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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중앙공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과 대만 등지에서 가져와서 심은 관상수들이 많아 보기에 아름답다. 그런데 그저 감탄의 눈으로 바라보기에는 마음이 몹시 아프다. 3년 4개월이란 기나긴 공사 끝에 1940년 4월 1일에 공원이 조성되기까지 강제로 동원되었던 수많은 한센인들의 피눈물이 고여 있기 때문이다.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과 짓뭉개인 손발로 고생스레 일구었지만 그들의 쉼터가 될 수 없던 곳이었다.

 
▲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누워 있는 돌)를 보고 있는 직장 동료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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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들을 진정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자신의 편한 삶을 버리면서까지 헌신했던 사람들의 공적비 앞에서 나는 희망을 보았다. 무엇보다 오스트리아 수녀인 마리안느, 마가렛, 마리아의 헌신적인 봉사를 기리는 세마(3M) 공적비는 감동 그 자체였다. 젊은 나이에 소록도로 들어와 40년 넘게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살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가 몇 년 전에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할 수 없어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겠다는 편지 한 장만 남기고 남몰래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 세마 공적비 앞에서 희망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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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옛날부터/사람이 지은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을 받게 했다.// 그러나 나를/ 아무도 없는 이 하늘 밖에 내세워놓고//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 ( 한하운의 '벌(罰)' 전문 )

소록도는 아름다운 경관이 알려지면서 이제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고 한다. 눈물의 섬, 아픔의 섬, 절망의 섬에서 희망의 섬으로 아름답게 변해갈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녹동항으로 나가는 배를 타고 나는 멀어지는 섬을 바라보면서 한하운의 '벌(罰)'을 마음속으로 읊었다.

 
▲ 멀어지는 소록도를 바라보며...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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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주암 I.C(27번 국도), 또는 순천 I.C(17, 2번 국도) →벌교→고흥(27번 국도) →녹동항

* 배편 안내
- 녹동항에서 07:00〜17:30(하절기에는 07:00〜18:00)에 15분 간격으로 운항.
※ 도양해운 운항시간표 안내:061)844-2086
- 요금(왕복) : 승객 1,000원(1인), 승용차 10,000원, 봉고차 12,000원



태그:#소록도, #시인한하운, #한센인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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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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