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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이래 주권을 빼앗긴 조선은 일본의 조선총독부 통치하에 놓였다. 그 억울함 속에서 한민족은 일제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일으켰고, 항일독립투쟁과 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해 민족독립운동을 모진 탄압속에서 이어갔다.

 

이를 일제는 헌병경찰제도로 항일독립운동 투사들을 학살·투옥하고 일체의 결사와 언론활동까지 금지시켰다. 교육문화 정책으로 조선 민족의 정체성과 혼을 왜곡·변질시키고 민족자주의식의 성장을 억눌렀다.

 

일제의 이런 무단정치는 조선과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역사, 언어까지 말살할뿐만 아니라, 토지·광산·철도·금융 등 모든 분야의 이권과 자원을 독점 약탈했고, 한민족의 경제발전마저 극도로 제한했다 한다. 그 가운데 일제에 빌붙은 파렴치한 친일파들이 득세하여 같은 조선민들을 앞장서 악랄하게 착취·탄압했다.

 

그 일제와 그 앞잡이들의 폭압은 지식인·학생·종교인뿐만 아니라 농민·노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항일감정을 불러일으켰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끝난 뒤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자결의 원칙에 제국주의에 핍박 받아온 세계 여러 민족에게 자극제가 되었다. 만주·상해 등에서 항일독립투쟁을 계속 해오던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도 이는 큰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 커다른 흐름 속에서 1919년 1월 21일 고종황제가 갑자기 승하하게 되자 일본인들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어, 일본에 대한 증오는 극도에 달했다 한다. 이에 민족대표 33인은 모여 3월 1일을 기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에 항거하고 조선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리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독립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졌고, 일제 군경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는 조선인들을 총칼로 탄압·감시했다.

 

인천 최초의 보통학교 창영초등학교에서 '21세기 독립운동'을 꿈꾸다!

 

'기미독립운동'이라 불리는 3·1운동에 대해서는 위와 같이 다들 알고 있을 듯싶다. 관련해 3·1운동 당시 인천 만세운동의 진원지를 자전거를 타고 찾아갔다. 1년 사이 너무도 많이 뒤바뀐 세상이 하도 수상하고 무섭고, 과거 일제식민시대와 다름없이 민초들이 감시·탄압받고 있어 민족독립운동의 새로운 기운을 받기 위해서였다.

 

인천 독립만세운동의 진원지는, 인천 동구 창영동에 자리한 창영초등학교다. 1992년 12월 시도유형문화제 제16호로 지정된 창영초등학교(구) 교사는, 대한제국 시대인 1907년도에 세워졌다고 한다. 100살이 훌쩍넘은 만큼 질곡의 역사와 민중들의 고된 삶과 함께해 왔다는 말이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로 처음 이름은 '인천공립보통학교' 였고, 1933년에는 '인천제일공립보통학교', 1938년에는 '인천창영공립심상소학교', 1941년에는 '창영공립국민학교', 광복 후에는 '창영국민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왔다 한다.

 

서쪽 하늘로 넘어가는 저녁해에 붉게 빛나는 적벽돌의 학교 건물은 1924년 세운 것으로, 일(ㅡ)자 형의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벽체 윗부분은 화강암으로 아치형을 이루고 있고, 현관은 근세풍 양식을 띤 무지개 모양으로 꾸며져 있다. 큼지막한 창들도 좌우 대칭으로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현관·복도·난간·기둥들의 보존상태 또한 100년이 넘었음에도 비교적 좋은 편이다.

 

건물 앞 화단에는 세종대왕상과 이순신상 그리고 육군소령 강재구 흉상이 자리하고 있다. 육군소령 강재구 흉상은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현충시설로, 인천창영초등학교 제40회로 졸업한 그가 1965년 10월 4일 월남 파병을 앞두고 수류탄 투척 훈련 중 부하의 실수로 많은 부하들의 생명이 위태롭자 폭탄에 자신의 몸을 던져 희생한 것을 기리고 있다.

 


 

 

우리들의 촛불은 범죄가 아니다! 정의다!

 

그리고 운동장이 굽어보이는 화단에는,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 발상지 기념비가 우뚝 솟아있다. 소령강재구상과 마찬가지로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인 기념비는, 1919년 3월 1일 거국적으로 확산된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인천에서 유일한 공립보통학교인 창영초등학교에서 고학년 학생들이 항일동맹휴학을 일으키고, 일부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만세를 외친 만세운동이 광복 후에도 역사속에 묻혀가던 것을 학교 선배들이 후학들에게 그 정신을 전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라 한다.

 

당시 학교와 인천경찰서의 연락을 차단할 목적으로 야간에 교무실과 경찰서간의 전화선을 절단한 주동학생들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다.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에 바탕한 의사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라고 일본 법관 앞에서 당당히 말한 만세운동 주동 학생의 글귀가 새겨진 기념비를 보고 있자니, 지난해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 신고를 냈다는 이유로 한 고등학생을 경찰이 수업중 불러내 수사해 비판받은 것과 학생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하지 못하게 교사들까지 동원해 감시케 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리고 암울한 현실에서 고통받고 사육되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없는 학생, 청소년 신분으로, 당당하게 촛불을 밝혀 폭압적인 공권력과 기만적인 국가권력에 맞선 이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그들에게 '21세기 독립운동'의 희망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창영초등학교#삼일운동#독립운동#인천#보통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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