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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지만 겨울 날씨가 아닌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겨울 모습 담기는 사진을 예전처럼 찍을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틀림없이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라는 낱말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는 봄이고 여름이고 가을이고 겨울이고를 뚜렷이 느끼기 어려워요.

사진장비는 몰라보게 나아졌고 퍽 싼값으로도 넉넉히 장만할 수 있지만, 좋은 장비를 든 손이 부끄러울 만큼 우리 터전이 망가지고 일그러졌습니다. 눈덮인 골목길을, 눈발 흩날리는 들판을, 눈길이 고즈넉한 마을을 사진에 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다니다 보면 눈길을 담을 때도 있고, 오래도록 기다리다 보면 눈오는 날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해서 찍는 겨울 사진이, 또 눈 사진이, 우리 가슴을 얼마나 아름다이 적셔 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겨울이 겨울다움을 잃었을 때에는, 겨울다움을 잃은 모습을 찍어야 겨울 사진이라 이름붙일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사진책에 붙은 띠종이에는, "일본의 미" 이름으로 나온 열두 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두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사진작가인데, 이들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 내로라할 만한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 "일본의 미" 12권 사진책에 붙은 띠종이에는, "일본의 미" 이름으로 나온 열두 권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모두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사진작가인데, 이들은 일본에서뿐 아니라 세계에서 내로라할 만한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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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날씨 푸념을 하던 어느 날, 갑작스레 0℃ 밑으로 10℃씩 떨어지는 강추위가 밀어닥칩니다. 자전거를 타면 손이 꽁꽁 얼다 못해 빨갛게 되면서 아립니다. 자전거를 집에 놓고 주머니에 두 손 푹 쑤셔넣어도 손가락이 녹지 않아 사진기를 쥐기 힘듭니다.

이런 날, 마침 서울에 볼일이 생겨서 <艶>(集英社,1980)이라는 두툼한 사진책 하나 들고 나들이를 나섭니다. 저로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일본 사진쟁이 작품모음인데, 제가 좋아하는 사진이 아니라 해도 '나쁜 사진이야'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뿐더러 '훌륭한 사진입니다'하고 말할밖에 없는 책 <艶>입니다.

'곱다'를 뜻하는 한자 '艶'입니다. 고움을 가리키는 한자는 꽤 많을 텐데 굳이 '艶'을 고른 까닭은, 우리가 '아름다움'을 말할 때에도 '아름다움'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곱다'나 '아리땁다'나 '빛접다'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하는 마음과 마찬가지가 아니랴 싶습니다. 똑같은
'고움'이라고 해도 '싱그러움'이나 '싱싱함'이나 '부드러움'이나 '맛깔스러움'이나 '산뜻함'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건넬 수 있습니다. '곱디고움'이라 할 수 있고 '아리땁디아리따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 춥던 겨울날 맨손으로 들고 다니던 사진책 <艶>을 알아본 사람은, 이 사진책을 낸 '토몬 켄'을 알아본 사람은 오로지 한 분. 마침 서울에서 치러야 할 볼일은 사진 찍는 사람과 사진 다루는 사람하고 어울리는 자리였는데, 오직 한 사람만 이 사진책에 눈길을 두었고 펼쳐 보아 주었습니다.

볼일을 보는 자리에 있는 내내 속이 무겁습니다. 어쩌면 너무 앞서가는 생각인지 모르고, 다른 이들은 일찌감치 구경해 본 사진책인지 모릅니다. 토몬 켄을 몰라도 사진은 얼마든지 찍을 수 있고, 토몬 켄을 보지 못하고도 얼마든지 사진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켕기는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밥자리에서 소주 한 병 반을 쉴 새 없이 들이키면서도 얼키고설킨 마음이 풀리지 않습니다.

늦은 밤, 전철을 타고 선 채로 인천으로 돌아갑니다. 골목을 거닐며 지친 몸으로 집에 닿습니다. 가방도 사진기도 사진책도 한쪽 구석에 내려놓습니다. 집에 왔다고 하여 느긋하게 자리에 두 다리 쭉 뻗지 못하고, 그사이 밀린 기저귀 빨래를 합니다. 애 엄마는 하루 내내 홀로 애 보느라 진땀을 뺐을 듯합니다. 나들이 갈 때 싸갔던 도시락은 다 먹지 못한 채 내어놓으니 애 엄마가 먹어 줍니다. 잠자리에 들기 앞서 잠깐 토몬 켄 사진책 <艶>을 어루만지고 아기 얼굴을 쓰다듬습니다.

좋은 사진책 하나 만나는 헌책방 책시렁 한켠으로 빛살이 밝게 스며듭니다.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해 주는 고마운 햇살을 받으면서, 좋은 사진책을 비롯해 수많은 묻혀 있는 책을 알아보고 찾아봅니다.
▲ 헌책방으로 빛살이 좋은 사진책 하나 만나는 헌책방 책시렁 한켠으로 빛살이 밝게 스며듭니다. 추운 겨울도 따뜻하게 해 주는 고마운 햇살을 받으면서, 좋은 사진책을 비롯해 수많은 묻혀 있는 책을 알아보고 찾아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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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몬 켄
 토몬 켄은 1901년에 태어나 1990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사진기를 손에서 놓지 않으면서 살았습니다. 일본뿐 아니라 세계에서 손꼽히는 사진가로 이름을 날린 토몬 켄이 지켜 온 사진은 ‘마음에 찰 때까지 다시 찾아가서 찍기’와 ‘찍히는 쪽이 사진기를 느끼지 않을 때까지 기다리되, 자기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소 사진기를 든다’입니다. 《艶》은 토몬 켄 고향나라인 일본이 어떻게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를 토몬 켄 삶결대로 녹아들면서 담아낸 사진책입니다.
문득, 이 사진책을 처음 보던 날이 떠오르고, 이 사진책을 헌책방에서 살 때 헌책방 아주머니와 주고받던 말이 떠오릅니다. 토몬 켄 작품모음 <艶>은 인천 배다리 헌책방골목에서 터줏대감이 되고 있는 아벨서점(1973년부터 자리잡았으니 터줏대감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에서 여러 해 동안 책시렁에 얌전하게 꽂혀 있었습니다.

헌책방 아벨서점은 책밑에 연필로 책값을 숫자로 적어 놓습니다. <艶>은 2만 원, <艶>과 같은 묶음으로 나란히 꽂힌 '日本の心'과 '日本の美' 묶음(저마다 12권씩이 한 묶음) 가운데 하나인 다른 사진책들, 이를테면 <이와미와 타케시(岩宮武二)-京いろとかたち>(1978)는 1만 5천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일본책 값은 4300엔. 이 녀석들을 보면서 주머니가 가벼워 늘 군침만 흘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돈이 없다고 책을 못 사냐. 살림이 버겁다며 책을 안 사냐.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저 좋은 사진책이 더 먼지를 먹지 않도록 사 버리자!'하고 다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진책들은 하나같이 1만 5천원인데 토몬 켄 작품만 2만원이라서 몹시 궁금했습니다. 책값을 셈하며 아벨서점 아주머니한테 여쭈었습니다.

"다른 책들은 1만 5천 원인데, 이 책만 2만 원인 까닭이 있어요?"
"그래요? 이게 꽂혀 있은 지 꽤 오래되어서 잘 모르겠는데. 어디 봐요. 그렇게 매겼으면 그만한 까닭이 있을 거야 …… 음, 내가 이 책들을 처음 사올 때, 이 사람(토몬 켄) 이름을 어떻게 읽나 모르겠는데, 사진이 참 좋았어요. 그래서 이 사진책은 그만한 대우를 해 주어야겠다 싶어서 5천 원을 더 붙였어요."
"이 사진책 낸 분, 토몬 켄 님은 일본 사진밭에서 아주 손꼽히는 분이에요."
"그래요? 나는 그 '토몬 켄'이 누군지 몰라도 이 사람 책은 달라요. 그랬어요."

저로서는 토몬 켄 사진책보다 이 사진책이 좀더 마음에 들었지만, 저 개인이 토몬 켄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분 사진은 훌륭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진 갈래를 걸어간다고 하여도 이와 같이 가슴을 적셔 줄 수 있게끔 애써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 일본사진책 저로서는 토몬 켄 사진책보다 이 사진책이 좀더 마음에 들었지만, 저 개인이 토몬 켄 사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더라도 그분 사진은 훌륭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사진 갈래를 걸어간다고 하여도 이와 같이 가슴을 적셔 줄 수 있게끔 애써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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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이 글은 사진잡지 <포토넷> 2009년 1월호에 함께 싣습니다.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032) 766-9523



태그:#사진책, #사진, #헌책방, #아벨서점, #토몬 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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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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