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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롄화츠(蓮花池) 38호, 회색빛 담장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건물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롄화츠(蓮花池) 38호, 회색빛 담장에 둘러싸인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건물 ⓒ 김대오

 

가이드와 여행사 총경리의 말을 엿들으니 밤 9시에 창장(長江)유람선을 타기 전까지 충칭(重慶)에서의 시간이 넉넉한 모양이다. 90km 정도 떨어진 다쭈(大足) 석각을 보면 좋을 텐데 그냥 충칭에 머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와 충칭중국싼샤(三峽)박물관, 홍야똥(洪涯洞)을 보는 것으로 오후 일정이 잡혔다.

 

가이드는 "부인은 남의 것이 좋고 애들은 자기 아이들이 좋다(太太是人家的好,孩子是自己的好)"는 농담으로 면적이 스위스의 2배나 된다는 세계 최대도시 충칭 가이드에 나선다. 먼저 도착한 곳은 롄화츠(蓮花池) 38호,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였다.

 

뼈아픈 역사의 흉터에 궂은 비 내리고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이정표 한글 이정표가 반갑기는 한데 아픈 역사의 상처여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이정표한글 이정표가 반갑기는 한데 아픈 역사의 상처여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 김대오

 

대로에서 진입로가 길게 연결되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잘 확인할 수 있는 산비탈에 계단식으로 임정청사는 자리잡고 있다. 중국에서 조우하는 한글 이정표가 반갑기는 한데 그곳이 하필 우리의 아픈 역사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라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비교적 잘 정비된 청사에 들어서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이 없는 연수단은 비를 비해 청사 안에 갇혔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上海), 항저우(杭州), 쩐장(鎭江), 자싱(嘉興),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리우저우(柳州), 치장(綦江), 충칭으로 세찬 빗줄기 같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임시정부가 몸을 피했던 상황과 비슷하게 느껴진다.

 

입구 왼쪽에 있는 건물 1층에는 김구 흉상과 태극기 등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 낯익은 얼굴들의 사진과 함께 임시정부의 활동과 업적 등이 동영상자료와 함께 잘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독립투사들이 태극기에 적어 놓은 글귀를 읽던 박현미 선생님께서 조국의 아픈 과거사에 목이 멨는지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정부청사 처마 밑으로 내리는 비를 보니 일본의 추격과 폭격을 피해 중국 전역을 전전했을 임정요원들과 풍전등화 같았던 조국의 현실에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신라가 당나라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한(668년) 이후 1200여년 동안 우리는 중국의 연호를 쓰고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에 빠져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 1896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조선이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자주국임을 인정받지만 이는 곧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함을 의미했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10년 경술국치를 맞이해야 했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로 시작된다. 임시정부가 정부의 존속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이뤄내고 좌우사상의 통합을 이룩하는 등의 청사에 빛나는 업적을 갖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라를 잃고 망명정부가 될 수밖에 없었고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내야 하는 처지에서 윤봉길, 이봉창 등의 희생이 불가피했던 이 뼈아픈 역사를 우리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임시정부청사에 태극기 물결 태극기가 물결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그러나 중국인들은 어떤 시선으로 이곳을 바라볼까?
임시정부청사에 태극기 물결태극기가 물결치는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그러나 중국인들은 어떤 시선으로 이곳을 바라볼까? ⓒ 김대오

 

비가 그쳤다. 밖으로 나갔더니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이 태극기를 들고 중앙 계단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주석실, 내무부, 재무부 등의 건물들이 잘 정비되어 있는데 임시정부가 당시 체제 정비를 마치고 무장투쟁을 위한 광복군을 창설하는 등 의미 있는 활동을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임시정부청사를 뒤로 하고 걸어 나오는데 자꾸만 역사의 패배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임시정부를 찾은 태극기를 든 등 뒤의 젊은이들도, 또 대부수의 한국인도 중국을 못살고 더러운 나라쯤으로 무시한다. 어쩌면 유사 이래 이렇게 중국을 무시할 수 있는 건 우리 세대가 유일할 것이다.

 

그렇게 더럽고 못사는 나라를 우리 조상은 1200년 동안이나 세상의 중심으로 떠받들고 조공까지 바치며 살았다. 과거 중국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지나친 무시와 폄하가 문제다. 나라를 잃고 중국에 의지해 가까스로 정부의 존속을 이어가야 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를 중국인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물에서 건진 유물들의 무덤, 충칭중국싼샤박물관

 

충칭중국싼샤박물관 푸른색 유리지붕은 싼샤의 물을, 뒤에 돌성벽은 산을 상징한다.
충칭중국싼샤박물관푸른색 유리지붕은 싼샤의 물을, 뒤에 돌성벽은 산을 상징한다. ⓒ 김대오

 

연수단을 실은 버스는 다시 아침에 들렀던 충칭인민광장 맞은편에 있는 충칭중국싼샤박물관에 도착했다. 왔던 곳을 또 온 것 같아 기분이 좀 별로였지만 싼샤여행을 앞두고 미리 박물관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봤다.

 

충칭중국싼샤박물관은 베이징 이외 지역에 '중국'이라는 두 글자가 붙은 유일한 국가급 박물관이다. 2005년 6월 18일, 충칭의 직할시 승격 8주년 기념일에 문을 열었다고 하는데 박물관의 주된 전시물은 싼샤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1087건의 유물 중 미리 발굴 출토한 것들이다.

 

밖에서 보면 박물관은 크게 푸른빛을 띠는 돔형 유리지붕과 돌로 된 성벽으로 이뤄져 있는데 싼샤의 산수(山水)를 상징하고 있다. 전시관은 크게 1층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싼샤(壮丽三峡)', 2층의 '아득한 빠위(远古巴渝)',  3층의 '충칭·도시로의 길(重庆·城市之路)', 3층의 '항전의 세월(抗战岁月)'로 구성되어 있다.

 

수몰되기 전 채취한 취탕샤(瞿塘峽), 우샤(巫峽), 시링샤(西陵峽) 등 협곡의 암석들은 박물관의 한편에 우두커니 앉아 이렇게나마 사람들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기원전 4500년 전 황허(黃河)유역의 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더 빠른 기원전 5000년 전, 창장(長江)유역에서 하모도문화(河姆渡文化)를 이룩한 고대인들의 유적들은 거대한 창장의 생명력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3층의 전시물들은 아픈 역사를 딛고 새롭게 발전하는 세계 최대도시 충칭의 면모를 잘 재현해내고 있다. 일본의 폭격으로 처참하게 희생된 기록사진들은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을 재교육하기에 충분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모자우산 모자에 쓰는 우산을 판매하는 중국 아저씨
모자우산모자에 쓰는 우산을 판매하는 중국 아저씨 ⓒ 김대오

 

박물관을 빠져나오자 또 가는 비가 내리는데 모자처럼 머리에 쓰는 우산을 파는 사람이 있어 선생님들이 앞 다투어 사진을 찍고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잔머리라고 해야 할지 창의적인 아이디어라고 해야 할지 어쨌든 다양한 면모를 가진 중국의 일면을 새삼 느끼게 된다.

 

"이 도시 정말 재미있네!"

 

연수단을 실은 버스는 자링장(嘉陵江)을 끼고 달린다. 무수하게 많은 교량들이 눈에 띄는데 가이드말로는 충칭에 총 6000여개의 교량이 있다고 한다. 강변으로 대형 간판들도 많이 걸려 있는데 바람이 별로 거세지 않아서 대형 간판 부착이 다른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용이하다고도 한다.

 

홍야똥 입구 전통적인 멋과 현대적인 멋이 어우러진 홍야똥
홍야똥 입구전통적인 멋과 현대적인 멋이 어우러진 홍야똥 ⓒ 김대오

도착한 곳은 자링장 강가에 위치한 홍야똥이다. 2300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홍야똥은 빠위(巴渝)12경 중 홍야낙수(洪崖滴翠), 자링석양(嘉陵夕照), 창장과 자링장의 두 물줄기의 합류(兩江匯流) 등 3가지의 멋진 풍경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입구에는 치수에 성공한 우왕(禹王)의 석상이 있고 그 위에서 시원하게 물줄기가 떨어지며 관광객들을 맞이해 준다.

 

강가에서 생활하기 쉽게 지어진 수상건축물들이 산비탈에 운집해 있는데 나무 재질의 고풍스러운 멋과 그 곁의 현대적인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풍취를 자아낸다. 고문화거리에는 다양한 전통 먹을거리들이 진열되어 있고 각종 음식점과 상가들이 몰려 있어 여가, 쇼핑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고 있다.

 

홍야똥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산비탈에 밀집된 고풍스런 건축물에 있는데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내리면 바로 앞이 도로이고 다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도 역시 도로변을 벗어날 수 없다. 버뮤다삼각지대에 빠져든 것 같은 어리둥절함에 정원순선생님은 "이 도시 정말 재미있네!"를 연발한다.

 

홍야똥 위에서 바라보는 자링강변 버뮤다삼각지대에 빠져든 것 같은 어리둥절함을 거쳐 오게 되는 홍야똥의 제일 높은 곳
홍야똥 위에서 바라보는 자링강변버뮤다삼각지대에 빠져든 것 같은 어리둥절함을 거쳐 오게 되는 홍야똥의 제일 높은 곳 ⓒ 김대오

 

홍야똥의 제일 높은 곳에 서서 고건축물들과 함께 자링강을 내려다보는 것은 멋진 풍경화를 마주대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데 그 풍경화 속을 오가는 것이 있으니 바로 강을 이어주는 케이블카이다. 저 케이블카는 중국영화 <저우위의 기차(周漁的火車)> <미친 돌(疯狂的石頭)> 등에 등장하는 충칭의 명물이기도 하다.

 

내려오는 길에 아들에게 줄, 돌면 음악이 나오면서 불이 반짝이는 팽이(陀螺) 하나를 30위엔(5000원 정도)에 샀는데 버스에 탔더니 더 좋은 팽이를 김동호 선생님은 20위엔에 샀다는 말에 그저 허탈할 뿐이다. 이런 낭패감은 중국에서 수없이 겪는 일이고 나는 역시 물건 싸게 사는 데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홍야똥에서 바라보는 충칭의 명물 케이블카 자링장을 오가는 충칭의 명물로 자리잡은 케이블카는 중국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홍야똥에서 바라보는 충칭의 명물 케이블카자링장을 오가는 충칭의 명물로 자리잡은 케이블카는 중국영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 김대오

드디어 창장유람선에 오르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저녁을 먹는데 박태환 선수가 베이징올림픽 수영400m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소식을 듣고 연수단 전체가 환호했다. 이제 창장유람선에 타는 일만 남았다. 유람선 안에서 판매되는 물건값이 비싸다고 하여 마트에 들러서 물, 술, 라면, 과일 등을 잔뜩 사 부두로 향했다. 연수단이 구입한 물건이 너무 많아 짐꾼을 불러 유람선까지 운반비를 물었더니 20위엔이라고 한다. 그래서 짐을 맡기고 매표소에 들어섰는데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매표소 창밖으로 화려한 야경이 펼쳐져 있었으나 많은 인파에 떠밀려 풍경을 감상할 여유도 없고 맡긴 짐을 가지고 짐꾼들이 달아난 것은 아닐까 걱정도 앞섰다. 매표소에서 배까지 내려가는 대형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갔더니 짐꾼들은 어떻게 왔는지 유람선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20위엔을 주려니까 항구에 내려오는데 10위엔을 내야하고 또 짐이 많으니 돈을 더 달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순순히 20위엔일 리가 없지!' 속으로 생각하며 얼마냐고 하자 50위엔을 달라고 한다. 짐을 가지고 달아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돈을 쥐어 주며 실랑이를 마쳐야 했다.

 

유람선 입구에선 연주단이 승선을 환영하는 기악 악주로 흥을 돋웠다. 5성급 호텔 수준이라는 유람선 빅토리아호는 충칭 밤거리의 화려한 불빛을 받으며 3박 4일의 먼 항해를 준비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2008년 8월 5일~14일까지 중국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충칭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충칭중국싼샤박물관#홍야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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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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