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벨이 울린 것은 거품 가득한 머리를 헹구어 낸 순간이었다. 수건으로 엉성하게 감싼 머리에서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받은 수화기 저편의 목소리는 친구였다. 그것도 아주 오래 된 친구 말이다.
좀 어색하고 일상적인 안부를 던졌고 무슨 사연인 듯 머금은 목소리가 전선을 타고 돌아 왔다.
"나 이혼 했어."
쉽지 않게 꺼내 놓은 말끝에서 애써 담담함의 여운이 남았다. 10년을 사귄 남자와 결혼을 한 친구는 10년에 반의 반도 함께 살지 못한 채 혼자가 되었다. 며칠 뒤 만난 친구에게서 들은 이혼 사유는 전 남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현실은 그랬다. 지금 시대에 이혼은 예전과는 다르다는 말을 했고 실제로 돌아온 싱글이 되어 사는 사람을 볼 기회는 많았음에도 난 마음이 좋지 않았다. 10년을 넘게 함께 보아 온 친구의 전남편과의 인연에서 적지 않은 아쉬움 같은 것도 생겼다.
결혼은 무엇일까. 그리고 결혼한 사람과의 관계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
결혼은 연애의 연장이라는 환상?
작년 3월 가상 결혼이라는 이색적이고 기발한 기획력을 발휘한 문화방송의 '우리결혼했어요'(우결)는 버라이어티계에 꽃으로 떠올랐다. 서먹한 연예인들끼리의 가상결혼 생활은 시작부터 흥미를 끌어 모았다.
우결은 사람들에게 예쁘고 잘생긴 연예인 부부처럼 달콤하게 살고 싶다는 기대와 환상을 가지게 했다. 그런 바람은 신혼을 사는 부부에겐 유대감을, 10년 차 이상의 부부에겐 대리만족을, 아직 미혼의 연인에겐 환상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결혼이 곧 연애의 연장이라는 환상을 심어 주고 싶다'는 작가는 역시나 아직 미혼이었다. 그렇다. 아직 외박을 했다는 이유로 며칠 말을 안 하거가 돈 때문에 싸움을 하는 커플은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어떻게 보면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였던 정형돈은 사오리와의 성격차이를 이유로 2개월을 살다가 이별을 하게 된다.
얼마 전 새 살림을 차린 강인-이윤지 커플의 등장은 조금 더 현실적인 접근을 시도한 것으로 보였다. 텅 비고 지저분한 신혼집에서 빗자루를 들어야 하는 순간부터 신혼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샐러리맨이 그러하듯 일정한 돈으로 한 달을 버텨야만 하는 것이다. 대학생 커플부부라는 콘셉트일지라도 말이다. 강인-이윤지 부부의 시작이 가장 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것이다.
수많은 안티를 지녔던 정형돈, 그는 어떻게 변할까
그럼에도 낚이지 않을 수 없다. 권위적이고 시큰둥한 남편이고자 하는 환희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 실없지만 귀여운 말들로 새 신부를 웃게 하는 강인이 어떻게 신접살림을 하게 될지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그가 돌아왔다. 수많은 안티를 지녔던 남편 정형돈이 사오리와의 결별 후 다시 커플이 되어 돌아 온 것이다. 그것도 11살이나 어린 소녀시대의 태연을 아내로 맞는단다.
크라운 제이 서인영 커플의 집에서 온갖 설움을 받으며 더부살이로 살아온 그가 어떤 모습으로 달라질지 어떻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말이다.
사실 내게 초미의 관심사는 판타지의 원조를 확인케 한 알렉스도, 한정판을 운운하며 신발과 모자에 집착하는 크라운 제이도, 친구 같고 오빠 같았던 앤디도 아니었다. 촬영 시간의 대부분을 소파에 눕기만 하며 "집은 이렇게 쉬라고 있는 거야"라는 말을 내뱉던 정형돈-사오리 부부가 어떻게 생활을 이어나갈지가 가장 궁금했다.
가상과 현실 사이를 묘하게 오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러다 진짜 사귀면 좋겠다싶은 생각도 들지만 사실 그들이 방송이 끝난 후 실제로 연인이 되건 아니건 그리 상관하지 않는다. 사귄다고 해도 헤어질 수 있고 결혼을 한다 해도 헤어질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니까 말이다.
사전에 제작진이 출연자들과의 개인 면담을 통해 이상형에 가까운 배우자를 정했다는 우결은 어차피 판타지다. 누군가 얻어 놓은 폼나는 집엔 숟가락까지 완벽하게 세팅을 마쳤으며 그들은 설정만을 안고 연애 기분 내며 살기만 하는 되는 거였다.
눈치 봐야 할 시댁 식구도 2세의 탄생과 함께 완벽하게 달라지는 부부생활의 패턴도 없이 말이다.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 있을까. 밀고 당기는 연애의 시작부터 그렇게 살아가기로 한다면 말이다.
감정이 변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달콤한 것이 진짜 판타지 아닐까
그럼에도 사람들의 감정은 관계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고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서로에게 흥미를 잃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우결 커플들 사이에서 그런 권태를 느낄 만큼 살아간 부부는 없었지만 결국 더 이상 그런 감정을 느낄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새로운 커플을 선보이는 것이다.
아무리 정해진 설정이나 캐릭터가 있다고 해도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얼굴을 마주보며 생활하다 보면 감정은 변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결혼 생활의 판타지는 어쩌면 그 변하는 감정이 시작할 때부터 펼쳐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신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부부는 많지 않을 것이며 결혼 10년 차 이상의 부부가 신혼 때와 같이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실적인 부부는 이혼을 생각할 만큼 심각한 문제 앞에서 때로는 길을 잃게 된다. 그러니 말이다. 처음 해보는 결혼생활,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관계의 발전을 위해 때로는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결혼상담 전문가의 조언을 듣고자 하는 얘기가 아니다. 어차피 시청자들은 그들의 놀음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들로 인해 잠시나마 더 행복해 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그래도 말이다.
정형돈 사오리 부부와 같이 성격차이를 느끼는 부부가 이별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떤 식의 방법이 가능할지를 현실적인 방법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배우자와 대화 없이 살아가는 하루 하루에 염증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우결이 만들어 내는 판타지와 실제 부부들이 살아가는 모습, 그 먼 거리의 사이에서 오늘 난 씁쓸하게 웃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