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의 마지막 날. 평소 같으면 따뜻한 집안 아랫목에서 각 방송사 시상식을 보다가 12시 정각에 울리는 보신각 종소리에 맞춰 식구들과 새해 인사를 나누었을 나였지만 올해만은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집을 나섰다.
비교적 따뜻했던 요 근래와 달리 유독 추웠던 2008년 마지막 날의 날씨. 두툼한 등산 양말을 신고 두꺼운 목티에 오리털 파커까지 입었지만, 매서운 겨울 칼바람은 화풀이라도 하듯 양 볼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간다.
이 추운 마지막 겨울 밤, 무엇이 나를 밖으로 이끌었을까? 계속되는 구조조정으로 인해 종무식을 하고 나서도 저녁 9시까지 회사를 지켜야 겨우 하루 일과를 끝낼 수 있었던 한 해의 마지막 밤, 난 무엇 때문에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굳이 보신각종을 직접 보겠다고 집을 나섰을까?
그것은 아마도 절박함이었을 게다. 이대로 그냥 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무심한 세상.
23시경 대학로 학전 그린에서 '지하철 1호선'의 4000회 공연을 본 여자 친구와 만나 늦은 저녁을 먹었다. 2008년 마지막으로 기울이는 소주 한 잔. 곧이어 TV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나운서와 광장의 시민들이 2009년을 맞아 카운트를 세고 있었다. 3, 2, 1. Happy New Year!
전 국민이 모두 보는 보신각 타종식을 맞아 촛불집회가 있을 것 같다더니 TV 속 광장은 생각보다 평화로워보였다. 미디어법 개정 반대 집회의 본진이 여의도에 있기 때문일까? 물론 저 멀리 사람들이 빨간 팸플릿을 들고 있고 카메라가 시민 근처에 얼씬도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사람들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듯 했지만 소주 한 잔 기울이며 힐끗힐끗 TV를 쳐다보는 나로서는 지금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저녁을 먹고 보신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미 2009년이 시작되었고 타종식도 끝났었지만 어차피 그곳에 가려했던 목적이 따로 있는 바, 고개를 숙인 채 매서운 칼바람을 맞아가며 꿋꿋이 걸었다.
성대와 창경궁을 지나 종로통에 접어드니 저 멀리 폭죽이 터지고 있었고 삼삼오오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목마태운 채 지나가는 아버지와 요란 법석한 모자를 걸친 뒤 왁자지껄 떠들면서 지나가는 젊은 행인들. 그들 손에는 지난여름 숱하게 보았던 그 낯익은 팸플릿이 들려 있었다.
탑골공원을 지나자 역시 교통순경들이 자동차를 통제하는 낯익은 풍경이 펼쳐졌다. 자동차가 사라진 종로통. 그곳에는 광장이 열려 있었다. 지난여름 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던 바로 그 광장이었다.
보신각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었을까? 몇 겹으로 줄을 선 채 종로통을 막아서고 있는 전경들이 보였다. 2009년을 맞이하기 위한 축제의 날, 그들은 딱딱한 표정으로 행인 한 명 한 명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날에 부동자세로 새해를 맞는 그들도 그들이었지만, 흥겨운 날 싸늘한 공권력의 시선을 느껴야 하는 시민들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경찰 벽을 뚫고 드디어 도착한 보신각. 그곳에는 아직까지 축제의 분위기를 포기하지 못한 채 배회하는 이들이 있었다. 연신 폭죽을 쏘아 올리며 보신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
그러나 역시 눈에 띄는 건 그 인파들을 둘러싸고 있는 전경들이었다. 외국인이 찍는 사진의 배경이 되어 V자를 그리며 활짝 웃는 영락없는 20대의 전경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뚝뚝한 표정에 탐탁지 않은 시선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너희들 때문에 여기서 고생을 하고 있다는 원망의 표정. 그것은 결국 개인의 사적 이익을 볼모로 한 공권력의 위협이었다.
새해를 맞이하는 사람들과 노란 풍선 혹은 빨간 팸플릿을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 사이로 보이는 것은 환경미화원들이었다. 타종식을 끝낸 지 1시간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열심히 쓰레질을 하며 파장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들 손에 쥐여진 대부분의 쓰레기는 빨간 팸플릿과 언제 뿌렸는지 모를 반 이명박 정부 삐라. 물론 일상적인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그들에 대한 나의 삐딱한 시선은 편견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들은 그렇게 서둘러 2009년 1월 1일 0시에 대한 기억을 지워나가고 있었다.
더 이상의 집회는 없을 거란 생각에 친구와 함께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저쪽에서 뭔가 시끄러운 구호가 연신 들려왔다. 전경들이 시민들을 밀치고 한 발자국씩 전진하면서 내지르는 기합소리였다. 무고한 사람들을 괜히 주눅 들게 만드는 공권력의 괴함.
하지만 그 얼토당토않은 위협을 그냥 무력하게 바라볼 수만은 없는 법. 한 악단이 그 전경들 바로 앞에서 장중하게 '임을 위한 행진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전경들의 기합소리에 움찔하던 시민들은 그들의 선율에 맞추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공권력의 공포를 이겨내고 있었으며,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된 목적을 되새김하고 있었다.
역시 총칼을 앞세우는 공권력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음악과 같은 문화의 힘이던가. 어쩌면 그래서 정부가 최근 문화영역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관변문화만이 전부인 냥 그것만을 제외하고서는 모든 예산을 삽질에 털어 넣는 정부. 아마도 그들은 젊은이들이 문화영역보다 건설현장에서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란 경찰 방송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종로경찰서장의 목소리.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로 시작하여 어서어서 집에 가서 발 닦고 자라는 바로 그 방송이었다.
방송차가 있으면 혹시? 역시였다. 그곳에는 지난여름 방송차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물대포차가 함께 그 위용도 늠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그 현장에만 7대 자리하고 있었다는 물대포차.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 엄동설한에 여차하면 시민들을 얼려 죽이려고 작정했던가. 정녕?
현 정부가 촛불에 데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님을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작년 한해 얼마나 놀랐으면 이 엄동설한에 촛불을 잡겠다고 물대포차를 7대나 준비했을까. 아마도 정부에게는 광장 그 자체가 하나의 공포일 것이다. 사람들이 좀 많이 모여 무슨 말 한다는 것 자체가 불순하게만 느껴질 그들.
기다란 사다리를 고이 접은 채 시민들을 주시하고 있는 물대포차를 보고 있자니 착잡해질 뿐이었다. 정부는 무엇이 두려워 저리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을까? 결국 정부의 과잉 대응은 그들에게 뭔가 구린 구석이 있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정부가 광장을 무서워하고 대규모의 군중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 퇴보의 대표적인 징후가 아닐까?
처연하게 서 있는 물대포차를 뒤로 하고 청계광장을 지난다. 역시나 불 꺼진 동아일보 사옥 앞에는 적지 않은 수의 전경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다. 사그라지지 않는 08년 촛불의 기억. 우리는 올해에도 역사가 반복된다는 명언을 또다시 되새기게 될 것인가. 제발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난히 추웠던 09년 1월 1일 새벽녘 서울. 10년 전에 즐겨 불렀던 ‘바위처럼’을 혼자 흥얼거려본다.
바위처럼
바위처럼 살아가 보자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바람에 흔들리는 건
뿌리가 얕은 갈대일 뿐
대지에 깊이 박힌 저 바위는
굳세게도 서 있으리
우리 모두 절망에 굴하지 않고
시련 속에 자신을 깨우쳐 가며
마침내 올 해방세상 주춧돌이 될
바위처럼 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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