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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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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는 미군은 안 오고 있던 중국 자본은 떠난다는데, 여기서 입에 풀칠이나 하겠어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대추리 황새울 들녘으로 향하는 길. "평택 요즘 어떠냐"는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택시 기사의 한숨이 이어진다. 기자 신분을 확인하더니 '뽕짝'이 나오던 라디오 소리를 낮추고 본격적으로 푸념을 늘어놓는다.

"2008년에 온다더니 안 오고, 2012년 이야기 나오더니, 이젠 뭐 2016년에나 온다고? 이젠 그것도 안 믿어, 와야 오는 거지! 우리 다 굶어 '디져' 불면 그 때 올 모양이여. 아이고, 지들 맘대로 하라고 혀!"

말 마디 마디에서 가시가 팍팍 느껴진다. 대추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택시 기사는 천천히 운전하며 턱으로 건성건성 길옆을 가리킨다. 그의 턱이 향하는 곳에는 공사가 중단된 주택이나 빈집이 서 있다.

"요거 보이지? 공사 중단된 지 1년 넘었어. 저~기 벽돌집 예쁘게 지었지? 그럼 뭘 혀, 저 집 주인 박 사장 은행 대출 이자 때문에 죽을 맛이랴. 계속 빈집으로 있으니 뭐, 별 도리가 있겄어?"

"여기는 공사 중단, 저기는 빈집... 평택시민 다 죽는다고 써 줘!"

택시 기사의 '프리젠테이션'을 받으며 황새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에 도착한다. 서쪽으로 가라앉는 해가 텅 빈 겨울 들녘을 붉게 적신다. 분위기 파악 못하고, 택시 기사에게 한 마디 던진다.

"아저씨, 동요 <노을> 있잖아요. 그거 여기 대추리 황새울 노을 보고 만든 거래요. 몰라요? 그거 있잖아요. '바~람이 머~물다간 들판에…' 아저씨 이 노래 몰라요?"

아차, 실수다. 백미러로 나를 바라보는 아저씨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이윽고 한 마디 던진다.

"지금 노래가 나와? 내 말 벌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겨? 여기 평택 기사 잘 써야줘야 돼. 정말이여. 우리 평택 시민 다 죽겠다고, 미군 빨리 와야 한다고 써. 잉? 약속 하는 겨!"

황새울 노을을 뒤로하고 택시는 떠났다. 노을은 더욱 붉어졌고, 들판은 텅 비었다. 미2사단과 용산 미군기지가 옮겨올 자리에는 덤프트럭이 오가고, 포클레인이 바쁘게 흙을 퍼 나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덤프트럭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저 멀리 타워 크레인 몇 개만 보일 뿐이다. 

해질녘의 평택 팽성읍 대추리 황새울 들판.
 해질녘의 평택 팽성읍 대추리 황새울 들판.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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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미 양국은 오는 2016년 상반기까지 용산기지와 미2사단을 평택으로 이전을 완료한다고 합의했다. 애초 2008년 이전에서 2012년 이전으로 연기됐고, 이후 계속 뒤로 밀렸다. 일각에서는 2016년도 장담할 수 없다고 예측하고 있다. 

미군 이전이 계속 늦춰지고 있는 평택을 지난 7일 찾았다. 미군의 평택 이전이 계속 늦춰지면서 팽성읍 일대는 지금 그야말로 '올스톱' 상태다. 미군들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려는 주택 신축은 중단됐고, 그나마 있는 집은 내국인들이 입주해 임대업자들은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미군기지 햄프 험프리 바로 옆에 있는 팽성읍 안정리에는 2004년부터 들어선 다가구주택 760채가 있다. 개별적으로 따지면 2500여 가구가 넘는다. 거의 대부분 '2008년 미군 이전'을 철석 같이 믿고 임대사업을 위해 지어진 것들이다. 그러나 미군 이전이 연기되면서, 임대사업은 꽁꽁 얼어붙었다.

미군 없는 주택 임대업 "차라리 서울에서 투기를 했으면..."

그 때문에 안정리에서 나고 자란 황영우(54·가명)씨는 요즘 "피가 마를 지경"이라고 했다. 황씨는 지난 2004년 자기 돈 7억원과 은행대출금 2억원을 합쳐 32평짜리 여섯 집인 다세대 주택을 지었다. 미군 상대로 임대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보통 미군에게 32평 집 한 채 임대하면 월 120만원 정도를 받는다. 황씨는 "최소 월 700만원, 연 8000만원 이상 수입을 예상하고 투자했는데, 지금은 한달에 고작 200만원 벌고 있다"고 밝혔다.

미군이 없어 내국인에게 보증금 500만원에 월 50만원으로 네 집을 임대했기 때문이다. 황씨는 "이 동네는 미군을 위해 지어졌는데도, 입주자 70%가 내국인이다"며 "교통이 안 좋아 내국인들에게는 월세로 50만원 이상 받기도 어렵고, 그나마도 빈집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안정리에는 'Room for rent(세 놓습니다)'라 적힌 간판과 현수막이 곳곳에 설치돼 있다. '마을'이나 '동네'라는 이름 대신 골목 입구에는 "Village"가 적혀 있다. 부동산 업체에도 "Best Service, Highest Value" 등의 영어가 적혀 있다.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주변에는 주택임대를 알리는 표지판과 주택 건설이 중단된 곳이 많다.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주변에는 주택임대를 알리는 표지판과 주택 건설이 중단된 곳이 많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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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마을에서 미군은 물론이고 사람 자체를 보기가 어렵다. 주택 임대업자 김영임(여·56)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2005년 미군 하나 바라보고 모든 재산 약 20억 원을 투자해 집을 지었는데, 신용불량자 되게 생겼다"며 "차리라 그 돈으로 남들처럼 강남에서 부동산 투기를 했으면 20억 원이 40억 원이 됐을 텐데, 이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울먹였다.

김씨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서울 아파트 값이 얼마나 많이 올랐냐"며 "남편과 투자 실패를 이야기할 때면 거의 이혼 직전까지 갈 정도로 싸움을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이곳 임대업자의 8할 이상은 서울 사람들인데, 모두 투자를 후회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을씨년스러운 이런저런 '빌리지'를 뒤로 하고 평택시가 2004년 100억원을 들여 개발한 안정리 '로데오 거리'로 향했다.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이곳 역시 썰렁했다. 저녁 7시께였지만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적막했다. 로데오 거리에서 미군은 딱 두 명 만났다. 

대추리·도두리 이주민 "왜 우리만 비난하나"

안정리 일대에서 10년 넘게 식당을 했다는 김철행씨는 "이젠 미군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고, 온다는 말도 안 믿는다"며 "와야 오는 거지 뭐, 괜히 또 믿었다가 실망만 하게 된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평택 시민들에게 "와야 오는 거지"는 유행어가 된 듯했다.

다시 택시를 타고 대추리·도두리 이주민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는 팽성읍 송화리로 향했다. 택시 기사 강씨는 "그 사람들이 안 나간다고 오래 버티면서부터 평택이 망해 버렸다"며 대추리·도두리 이주민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강씨는 "미군이 이렇게 늦게 오는데, 그들도 너무 일찍 쫓겨난 측면이 있다"며 "없는 사람들만 계속 고생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주변 안정리에 있는 '베스트 빌리지'. 미군들을 상대로 주택임대업을 준비한 주민들은 미군기지 이전 연기로 된서리를 맞았다.
 평택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 주변 안정리에 있는 '베스트 빌리지'. 미군들을 상대로 주택임대업을 준비한 주민들은 미군기지 이전 연기로 된서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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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도두리 이주민들의 마을도 흉흉했다. 주민들은 "정부한테 두들겨 맞으며 쫓겨났는데, 이젠 평택 시민들에게는 이기주의자들이라고 욕먹고 있다"며 "뭔 말을 해도 비난부터 해대니 입을 열고 싶지 않다"고 입을 닫았다.

60이 넘었다는 한 노인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할 일도 없어 병든 닭 마냥 앓고 있는 노인들이 많다"며 "미군들 금방 올 것처럼 우리 몰아내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왜 우리한테만 손가락질을 하느냐"고 따지듯 말했다.

대추리·도두리 이주민 40여명은 지난해 11월 24일 평택시청으로 몰려가 시장 면담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군기지 이전에 따른 '평택지원특별법'에 따라 18세부터 75세까지 이주민들에게 2007년부터 제공된 특별 공공근로사업이 지난 11월 28일로 끝났기 때문이다.

쌍용차마저 법정관리 신청... "평택은 어찌 살라고"

올해부터 2014년까지는 공공근로사업을 할 수 있는 대상자가 65~75세이거나, 가구당 재산세 3만원 이하를 내는 이들로 제한돼 이주민들이 일할 기회는 확 줄어들었다. 

평택에서는 미군 이전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난 사람도, 미군을 기다리는 사람도 모두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게다가 상하이차가 사실상 쌍용자동차 경영을 포기하면서 평택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평택시에 따르면 법정관리를 신청한 쌍용차 전체 직원 7100여명 중, 73%인 5200명이 평택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들 직원 가족과 협력업체 관계자들까지 따지면 40만 평택 인구 중 약 5만여명(12%)이 쌍용차 가동 중단에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평택시는 내다보고 있다.

이쯤되면 "지금 노래가 나오냐"며 "평택 시민 다 죽는다고 기사 잘 써달라"는 택시 기사의 말은 빈말이 아니다.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의 야간 모습.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의 야간 모습.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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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평택, #미군, #상하이차, #대추리, #황새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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