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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로 도성과 뱍성을 버리고 인조의 어가행렬이 지나갔을 것이다.
▲ 잠실사거리를 지나 성남의 남한산성으로 향하는 길. 멀리 왼쪽호수 옆이 삼전도(송파나루)이다 이길로 도성과 뱍성을 버리고 인조의 어가행렬이 지나갔을 것이다.
ⓒ 정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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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양군은 반정을 주도하여 성공한 후 선조의 교지가 없자 인목대비의 언문교지를 가까스로 받아 왕위에 올라 인조가 되었다. 왕위에 올라서도 불안정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임해군을 비롯하여 영창대군, 능창군 등 친족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남인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많은 인명을 살상했다. 또한 중국정세를 오판하여 명과의 친분만 과시하고 신진세력의 부상에 무지했던 결과로 병자호란을 자초하는 역사상 가장 굴욕적이고 능력 없는 왕으로 기록되는 수모를 면할 수 없었다.

나의 서재는 석촌호수와 남한산성이 바라보이는 잠실 사거리 부근에 있다. 모처럼 신년을 맞아 일출을 기다리던 어제 새벽 나는 컴컴한 사거리에 홀연히 나타난 인조의 어가를 만나는 환영을 상상하게 되었다. 폭설을 뚫고 광나루를 도강한 어가행렬은 지금의 롯데호텔을 지나 삼전도(현 송파나루)에서 배를 내려 대오를 정비한 후 남한산성을 향했을 것이다. 이미 왕자 일행을 강화도로 보냈고 조정도 강화도로 피하려 했으나 예상보다 빠른 적의 습격으로 위험했고 더구나 폭설로 인해 길이 만만치 않자 인조는 이 길을 택했던 것이었다.

병자년 12월 1일 청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보름 만에 한양에 당도하게 되는데 내가 상상 속에서 보게 된 환영은 12월 14일의 광경이었다. 당시 외교와 조세제도는 물론이고 여러 가지 정책들이 실패를 거듭하는 지경에 이르러 조선은 난국에 처해 있었다. 청태종의 군대에 제대로 된 항전도 없이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조정은 강추위와 눈을 뚫고 남한산성으로 도망가는 비루한 행렬이었을 것이다. 백성의 도탄을 뒤로하고 퇴각하는 인조의 어가를 그려보다가 마침 원고마감일에 쫒기고 있던 터라 짧은 시 한 편을 완성하게 되었다.

  내가 도망가는 어가행렬의 모습에서 여러 가지 정책에 실패하고 늘 변명을 들이대기에 급급한 이명박 정부의 모습을 보았다면 너무 지나친 상상력일까? 우선 어제 새벽에 쓴 시조 한 편을 보자.

           인조실록
                   -병자년 12월 14일 인터넷본-

시구문(屍軀門) 지나 강을 건넌
비루한 어가(御駕)행렬이*

폭설을 추스르며
롯데월드 건너고 있다

효수(梟首)할
미네르바를
공덕비(功德碑)처럼 모시고.

도망가는 어가는 흥인지문도 아닌 시체나 드나드는 광희문으로 나왔을 것이라는 내 상상은 고약했을지 모르지만 광나루에서 본 내 환상은 비겁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는 행렬임에 틀림없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들이 행장 속에 귀하게 모시고 가는 사람 중에 인터넷 정객 미네르바가 모셔져 있을 거라는 상상이었다.

얼마나 유사한가? 이명박 정부가 자신들의 실정을 구속된 미네르바의 탓으로 돌리려는 얄팍한 계산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인조의 도망행차 뒷모습에서 미네르바를 무슨 공덕비처럼 모시고 전세를 호도하려는 현 정부의 모습을 보았다. 며칠 후 인조는 미네르바의 목을 롯데월드 자이로드롭 위에 효수하여 백성들에게 엄포를 칠 것이다.

늘 역사는 우리에게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인조는 45일 후 삼전도에 나와 청태종에게 엎드려 군신의 예를 맺고 항복하는 굴욕을 당했다. 청태종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삼전도 한비(三田渡 汗碑)를 세워두었는데 지금도 이비는 몽고어와 만주어 그리고 한문이 혼용된 역사상 희귀한 비로 석촌역 한 귀퉁이에 남아 있다.

바라건대 이명박 정부가 작년 교수협회가 선정한 사자성어인 호질기의(護疾忌醫 -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기대할 뿐이다.


태그:#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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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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