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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으쌰!”

침대에 누운 장애아들을 휠체어로 옮기는 백발 어머니의 손놀림이 능숙해 보인다. 군포시 당동의 야트막한 담장 너머, 아담한 주택에서 지체장애1급인 이창순(34세)씨는 서울 갈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활짝 웃는 주인공
▲ 이창순 활짝 웃는 주인공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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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짬을 내서 강원래 꿍따리 유령단에서 이야기도 듣고 놀다오는 것을 즐긴다고. 어머니는 “건강한 사람이라면 삭신을 움직이니까 괜찮지만, 걸어 댕기는 사람이 아니라 찰틴디...”라며 휠체어에 탄 아들의 허벅지를 자꾸만 어루만진다.

곁에서 옷을 입혀주며 “난 금옷도 부자도 안 부러워, 하나님이 우리 아들을 살린 걸 그저 감사해요. 다치고 나서 느끼지만 장애란 생각이 안 들어요” 라며 아들을 살갑게 보살핀다.

이창순씨는 탤런트 같은 훤칠한 외모에 서글서글한 인상, 호수처럼 맑은 눈망울이 인상적이었다. 왠지 함께 있으면 영혼까지 맑아지며, 기쁜 일이 생길 것만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수영선수에서 장애인으로

그는 군포중학교 재학 중 우연히 시도 대항 수영부문에서 수상의 영광을 거머쥐며, 교사의 추천으로 대전체육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때인 1991년, 학교수영장 공사로 인해 대전 공설운동으로 갔다.

물이 부족한 상태에서 스타트 연습 중 그만, 바닥에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를 당했다. 가정 형편까지 넉넉지 못했던 그는 경추 4, 5번 손상으로 어깨 위를 제외한 온몸이 마비됐다. 그의 몸에서 살아있는 근육이라곤 10%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행히 머리에 이상은 없었다.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 후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재활병동에 입원, 기본 동작을 익혔지만 손을 쓸 수 없으니 모든 활동이 제한되었다.

과일 깎는 어머니 옆에서 보조기구에 의지한 이창순씨가 과일을 먹고 있다.
 과일 깎는 어머니 옆에서 보조기구에 의지한 이창순씨가 과일을 먹고 있다.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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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만 해도 머리를 다치지 않았으니 걸을 수는 있겠지,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그의 곁에서 밥을 떠먹이며 그림자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도왔지만, 이 세상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지인이 이름까지 새겨서 수저와 포크를 만들어 왔다. 손바닥에 그 보조 기구를 끼운 채 라면 먹는 연습을 부단히 한 결과, 이제는 과일도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회사에서 조경 일을 하는 이석수(67)씨와 김영화(61)씨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이며 위 아래로 누이가 있다.

러브하우스 주인공 그리고 도전

그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수리고등학교 교사와 만났다. 수리고 교사는 “자신의 사연이 방송에 당첨이 잘 된다”며 그의 사연을 담아 러브하우스에 편지를 보냈다.

그의 집은 새마을동네처럼 낙후된 상태로, 좁아서 휠체어조차 맘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러브하우스에서는 낡은 담장을 헐어내고 길을 넓혀 휠체어 통로를 확보했고, 재래식 화장실과 부엌을 개조, 아담하고 예쁘게 꾸며 주었다.

그가 누워있던 침대에는 컴퓨터며 잡다한 도구들이 오밀조밀하다. 누워서도 리모컨으로 TV나 커튼, 조명이며 창문까지 열고 닫을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런 최신 시설은 2001년도 러브하우스에서 설계해 준 것이라고.

방송이 나간 후 집구경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고, 그는 붕 뜬 기분에 펜 카페 사람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직장을 구하려고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외출하는 아들에게 옷입히는 어머니
▲ 이창순씨 외출하는 아들에게 옷입히는 어머니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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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전화예약일을 시도해 보았지만, 고졸 이상이라는 학력의 문턱에 그만 걸리고 말았다. 검정고시에 도전해 보았지만, 공부보단 운동에 집착했던 터라 감히 부모님께 책을 사달고 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지인들이 과목을 나눠서 공부를 도와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자신과의 싸움이란 걸 느끼며, 인터넷에서 기출문제를 공부한 결과 영어를 제외하고는 모두 통과되었다.

영어는 카페회원이 도와주었지만, 두 번 시험 끝에 2004년 97점으로 합격하며 수능을 보게 되었다. 그의 공부 방법은 인터넷교육방송 자막을 보고, 무조건 외워나가는 거였다.

시험을 치를 때만 해도 교육평가원에 중증장애인임을 밝혔지만 특별한 장소를 제공해 주지는 않았다. 시험 장소문제로 옥신각신한 결과 흥진고등학교 양호실에서 시험을 치를 수가 있었다.

오로지 재택근무가 목적이었지, 대학은 꿈조차 꾸지 못했을 때 장애인권익문제연구회에서 휠체어를 기증받게 되었다.

한쪽 눈이 망가질 정도로 아픈 것을 참으며 열심히 한 결과 수능에서 언어와 영어는 3등급, 사탐은 1등급을 받았다.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목표로 했지만, 취업을 생각하고 숭실대 사회복지학과에 지원했다.

장애인의 희망이 되고 싶어

그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자신과 비슷한 환자들을 위한 상담을 하며, 재활의 의지가 필요한 사람들의 희망이 되고 있다. 한 때는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신동엽과 사회를 보며, 최초 장애인 MC로 활약도 했었다고.

가끔은 대학특강으로 장애인의 인권과 삶, 에티켓 등을 강의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큰 호응을 받고 있다고. 숭실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반인 그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심도 있게 더 많이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되고 싶은 게 꿈이다.

외출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이창순씨
 외출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이창순씨
ⓒ 김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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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도 실업대란의 파고를 넘기 힘들다는데 그는 모 뉴스24에서 국회인터뷰전문 인턴기자로 이미 자리를 확보한 상태라고. 장애인 극단에서 극작 수업을 받고 희곡을 쓰고 있다는 그는, 숙제로 써보는 글과 함께 너무 할 일이 많다며 즐거워한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집을 나서는 아들을 따라 나온 어머니는 “예전에는 아들의 안전을 위해 군포역까지 눈을 싹싹 쓸어 길을 냈다”며 “눈길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다.

곁에 있던 장황기씨는 “아마 사고를 당하지 않았다면 마린보이 박태완을 능가하는 국가대표 수영선수가 됐을 거”라며 멀어지는 휠체어를 바라보았다.

덧붙이는 글 | 주간현대에도 송부했습니다.



태그:#이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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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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