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으뜸 명절인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걱정부터 앞선다. 해마다 명절을 맞을 때마다 한 차례 홍역처럼 치러야 하는 '명절증후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해부터 한반도 곳곳에 거미줄처럼 펼쳐진 '불황전선'이 사람들 지갑에 가뭄까지 들게 해 설날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겁나다 못해 무서울 정도다.
그래도 서울에서 올 설을 쇠는 사람들은 좀 낫다. 한반도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경남 창원이 고향인 글쓴이는 올 설을 쇠기 위해서는 고속도로와 한판 '정체전쟁'을 치러야 한다. 이는 글쓴이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제법 먼 곳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 명절 때마다 입에 단내가 풀풀 나도록 겪었고, 앞으로도 겪어야 하는 기막힌 현실이다.
글쓴이에게 다가오는 이번 설은 특히 돈가뭄에 많이 시달려야 할 것만 같다. 지난 해 11월부터 갑자기 일거리가 끊긴 데다, 겨울방학을 맞은 두 딸이 서울에서 학원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두 딸이 서울에 온 지 이제 겨우 열흘 남짓 지났는데도 딸들 주머니로 들어가는 용돈도 꽤 든다.
여기에 설을 맞아 고향인 창원으로 가는 고속버스비도 만만치 않다. 서울에서 창원까지 버스비가 2만8200원이니, 3명을 합치면 8만4600원이나 된다.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김밥이나 음료수를 사 먹는다고 보면 10만 원 정도가 든다. 근데, 왜 고속버스비는 중고생에게 할인을 해주지 않는 것일까.
22일(목) 점심 때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 전화를 걸었다. 관계자는 "고속버스는 약관 상 애국지사와 상이 1급~5급, 5.18부상자 1급~7급은 50% 할인되며, 상이 1급과 5.18부상자 1급에 한해서는 보조자 1인도 할인된다"며 "상이 6급~7급과 5.18부상자 8급~14급은 30% 할인되며, 우등 고속버스는 제외된다"고 설명했다.
"중고생은 시내버스에서도 할인 혜택을 주는데, 고속버스는 왜 그러냐?"고 되묻자 "약관에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짤막하게 답했다. '고속버스 약관을 만든 사람들은 다 부자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입 안이 쓰다. 이 글을 빌어 국토해양부 장관에게 묻고 싶다. 왜 고속버스는 학생들에게 할인을 해주지 않느냐고.
서럽다. 그렇잖아도 빠듯하게 살고 있는 글쓴이에게 다가온 이번 설은 그 어느 해 명절보다 더욱 어렵고 힘겹다. 글쓴이가 이번 설을 쇠기 위해서는 왕복 고속버스비 20만원과 조카들(10명) 절값 각 1만원씩 10만원, 여러 어르신들 용돈 20만원을 합치면 50만 원 이상은 써야만 할 것 같다. 사정이 이러하니 즐거워야 할 설이 무서워질 수밖에.
1년에 이력서 30통 이상 쓰고도 일자리 구하지 못해 이번 설을 맞아 돈가뭄에 시달려 한숨을 푹푹 쉬는 사람은 글쓴이뿐만이 아니다. 노숙자와 쪽방촌, 철거민, 소년소녀가장, 가출 청소년, 노인복지시설, 아동보호소 등도 설을 맞아 도움의 손길이 많이 줄어들어 서럽다고 한다. 하지만 더 서러운 것은 실직을 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금도 정보지를 열심히 뒤지며 일자리를 찾고 있지만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지난 해 11월, 잘 다니던 회사에서 갑자기 쫓겨난 김아무개(47) 씨는 "요즈음은 쫓아내는 것도 아주 지능적"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사장이나 간부 눈에 거슬리는 사람을 미리 점 찍어 두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러 '회사가 몹시 어려워 그러니 이해해 달라'며 월급을 50%나 깎자는데, 누가 동의하겠느냐"며 실직한 까닭을 설명했다.
김씨는 "회사에 다닐 때 재미 삼아 대형 운전면허를 따 두었던 덕택에 지금은 학원에서 아이들을 태우는 버스를 몰며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월급이 얼마냐?"고 묻자, 김씨는 "학원을 시작할 때와 마칠 때 잠깐 잠깐 아이들을 태워주고 80만 원 조금 넘게 받는다. 틈틈이 자장면 배달 아르바이트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 해 3월, 정리해고로 직장을 잃은 박아무개(50)씨는 "지금까지 이력서를 30통 이상은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박씨는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면접을 볼 때마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더욱 얄미운 것은 면접을 본다는 사람이 '그 정도 나이면 시골로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서 사는 게 어떻겠느냐?'며 실실 비꼴 때"라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10여 년 전부터 여행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아무개(38)씨는 "예전에는 여러 잡지와 사보에서 원고 청탁도 많이 들어오고, 사진을 사려는 회사도 꽤 있어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지난해 1년 동안에는 원고청탁이 딱 3건밖에 없었고, 책을 내자는 출판사도 없었다"며, "자칫 가정파탄이 날 것 같아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마포 상수동에서 자그마한 밥집을 차리고 있는 서아무개(71·여) 할머니는 "손님이 없다 없다 해도 이렇게 없는 때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무, 배추 등 채소 값은 자꾸만 오르는데 우리 집 매상은 자꾸만 머리를 처박고 지하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몇 개월 더 해보고 그래도 안 될 것 같으면 가게를 내놓고 집에서 쉴 생각"이라며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홍익대 가까운 곳에 있는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 이아무개(21·여)씨는 "겨울방학을 맞아 고향인 대구로 내려가 친구들도 만나고 싶지만 비싼 방세(2평짜리 원룸,보증금 500만원에 월 35만 원)와 용돈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다"며 "이번 설 연휴에도 아르바이트 때문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미리 부모님께 말씀드렸다"고 말했다.
"재래시장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싸게 팔 수밖에 없다"지난해부터 이어진 불황이 올해 들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란 경제전문가들이 내뱉은 말들이 떠돌고 있기 때문일까. 설을 앞두고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들 발길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설빔과 차례상을 마련하기 위해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들 지갑이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어 재래시장 상인들도 울상이다.
설 연휴를 사흘 앞두고 21일(수) 오후 4시에 찾은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동원시장. 면목동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손꼽히는 이 시장에서 과일가게를 하고 있는 30대 중반 남짓한 아주머니는 "과일값이 꽤 올랐지만 예전 가격 그대로 팔고 있다"며 "손님들이 이것저것 만져만 보다가 그냥 간다. 하루 10만원 어치 팔기도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이 집에서 파는 국산 과일 가격은 다음과 같다. 키위 한 봉지(6개)에 2천~3천원, 나주 신고배 1개 1천~2천원(3개 5천원), 사과 3개 1천~3천원, 단감 10개 4천~5천원, 제주 감귤 13개 2천~5천원, 곶감 3개 1천원, 대추 1되 4천~5천원, 딸기 한 봉지(30개) 5천~6천원, 바나나 2천~3천원, 수박 7천~1만원.
길거리에서 공주 햇밤을 '1되 3천원', '2되 5천원'에 팔고 있는 천아무개(43)씨는 "이렇게 싼값에 밤을 다 팔아도 공주에서 밤을 싣고 오기 위해 쓴 기름값, 식대, 인건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다. 그나마 설을 맞아서 그런지 하루에 30~40되씩 팔리고 있어 불행 중 다행"이라며 피식 웃는다.
길거리에서 남녀 구두를 '무조건 9900원', 부츠는 '골라서 8900원', 운동화는 '골라서 5000원'에 팔고 있는 김아무개(54)씨는 "신발을 공장에서 직거래하기 때문에 싸게 팔고 있는데, 손님들은 신발에 무슨 문제가 있는 줄 알고 그냥 지나치기 일쑤"라며, "그래도 싼 맛에 신발을 여러 켤레 사는 손님들도 더러 있어 설은 쇨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시장 안 3평 남짓한 옷가게에서 '겨울바지 한 벌 5천~1만5천원', '윗도리 한 벌 5천원', '겨울점퍼 한 벌 2만~3만원'에 팔고 있는 이아무개(33)씨는 "예전에는 설 특수라는 게 있었는데, 요즈음에는 설빔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부쩍 줄어들었다. 재래시장에서 파는 값싼 옷이라고 해서 메이커 있는 옷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며 옷 한 벌 사라고 잡아끈다.
시장 안 2평 남짓한 생선가게를 꾸리고 있는 김아무개(49)씨는 "그나마 설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지 예전보다는 장사가 제법 잘 된다"고 말한다. 김씨는 "이곳은 재래시장이라는 특수성이 있기 때문에 백화점이나 대형마트보다 생선을 훨씬 싸게 팔 수밖에 없다"며, "이른 새벽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에 나가 경매로 나온 생선을 바로 산다"고 귀띔했다.
이 집에서 파는 국산 생선 가격은 다음과 같다. 참조기 한 바구니(10마리) 5천~6천원, 고등어 1마리 1천~3천원, 대구 한 마리 8천~1만원. 오징어 2마리 2천~3천원, 병어 한 마리 4천~5천원, 대하 20마리 5천~7천원. 꼬막 3천~5천원, 홍합 2천~3천원, 굴 한 봉지 2천~3천원. 하지만 말만 잘하면 조금 깎을 수도 있다.
올 설에는 가까운 재래시장에서 설빔과 차례상을동원시장에 가면 요즈음 값이 오르고 있는 국산 채소도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보다 훨씬 싸다. 제주 무 1천원, 배추 한 포기 1천~3천원, 냉이 1봉지 1천원, 제주산 콜라비 1개 1천원, 깐 쪽파 1봉지 1천원, 대파 1단 1천원, 미나리 한 묶음 1천원, 당근 1개 1천원, 콩나물 1봉지 1천원, 애호박 2천원 등.
이 시장에 가면 국산 채소가 대부분 1천원대이며 비싸야 3천원이다. 밤고구마와 감자, 오이, 가지, 산나물, 상추, 풋고추, 깻잎, 마늘 등 밑반찬거리도 거의 다 있다. 게다가 국산 쇠고기(1만~3만원), 국산 돼지고기(1만~2만원), 국산 닭고기(1마리 2천~5천원) 등 육고기 대부분을 부위별로 필요한 만큼 값싸게 살 수 있다.
농수산물유통공사(aT)가 최근 발표한 올해 설 차례상(4인 가족 기준)에 드는 비용은 22만2495원. 한국물가협회는 17만3천원, 서울시 농수산물공사는 17만1210원이 들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가까운 재래시장에 가면 설빔과 차례상을 훨씬 적은 비용으로 마련할 수 있다. 재래시장 올 설 차례상 비용(동원시장 기준)은 6만원~10만원 정도.
올 설은 그 어느 해보다 주머니 사정이 어렵다. 실직자들과 가난한 서민들은 하루하루 버텨내기에도 벅차다. 이런 때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나가 상인들과 물건 값 흥정도 하고,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도 살갑게 나누어보자. 그곳에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고, 살가운 정까지 느끼다 보면 올 설 선물이 따로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