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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백 연작소설집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고맙고도 반가운 소설이다. 농촌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요즘 소설 중에서 농촌을 그리고 농촌의 목소리를 담은 소설이 있었던가? 찾기 힘들다. 그렇기에 이시백의 소설을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충정도 음정면의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소설집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나온다. 하는 일도 제각각이고 저마다 가슴 속에 품은 꿍꿍이도 제각각이다.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평생을 농사지으며 살아온 재규네 가족이다. 재규는 속상하다. 울화통이 터진다. 아내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홈쇼핑을 보면서 뭔가를 주문하고 아들은 농사지으면 굶어죽는다고 설치니 그 마음 답답한 것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날도 그랬다. 너무 답답한지라 아내를 찾아오는 택배 기사를 만나 물건을 반품시킨다. 고작 속옷을 구입하는 것이지만 재규는 아내의 처사가 못마땅했다.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들을 만큼 집안싸움이 나는 건 당연한 일. 아내는 사라지고 재규는 문득 제초제 먹고 죽은 어느 집의 아낙네 이야기를 떠올린다.

 

혹시 아내도 그러면 어쩌지? 재규는 황급히 아내를 찾아 나선다. 뭐든 해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동네방네를 헤집고 다니는데, 이게 웬걸? 어느 집에 들어가서 홈쇼핑을 보고 있다. 안심해야 할까, 화내야 할까?

 

장가를 가지 못해서 베트남 여자 수안을 데려온 총각도 있다. 충국은 그녀를 데려오자마자 결혼하려 했으나 몇 가지 거짓말로 인해 결혼식을 미루게 됐다. 또한 그녀의 오빠까지 데려오게 됐다. 그래도 충국은 좋기만 했다. 베트남의 처녀가 제법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수안은 손 한번 못 잡게 하고, 저녁 먹으면 오빠 얼굴 보러 간다고 가버린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속사정은 뻔하다. 어수룩한 충국만 진실을 모른다.

 

박정희와 새마을 운동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다른 대통령들은 욕해도 박정희만은 칭찬, 아니 칭송한다. 박정희가 암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가서 곡을 하고 온 사람이 있을 정도다.

 

입으로는 고향 타령하면서 돈을 벌면 읍내로 나갈 궁리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을 향해 고향사랑을 운운하지만 속내는 참 얄밉다. 미군 부대 이전을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가 오는 것이 이익이라는 말을 듣고 말을 싹 바꾼 사람들은 어떨까? 그들 또한 얄밉기 그지없다.

 

그런데 이상하다. 얄밉지만 한편으로는 정이 간다. 그들을 두고 욕할 수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이상하리만치 이해를 해주고 싶어진다. 아내의 홈쇼핑 구매를 타박하는 재규나 그럼에도 구매하려는 아내, 이제 농사는 끝났다고 말하는 아들은 물론이고 돈 주고 여자 사온 충국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모난 행동도 이해가 되고 이익을 쫓는 행동도 이해가 된다. 왜 그런 것인가. 그 동안 받았던 그들의 설움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농촌에 사는 그들은 이제껏 여러 번 당했다. 나라의 말 믿고 농사 지었다가 망했고 서울 사는 전문가들의 말이나 언론의 전망 믿고 했다가 망했다. 빚쟁이되기 일쑤였다. 그래서일까. <누가 말을 죽였을까>의 그들은 작은 이익에 연연하며 추태를 보이기도 하지만 속사정을 알기에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오히려 안쓰러워할 뿐이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에서는 많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비통하면서도 서러운 울음이다. 하지만 이시백은 능청스러운 문장과 유머를 섞어 웃음도 만들어낸다. 일방적으로 농촌을 아프게만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숨 쉬는 인간의 다른 모습까지 포착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낸 것이다.

 

소설을 보면서 어느 마을을 상상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농촌을? <누가 말을 죽였을까>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많은 문제의식을 담았으면서도 농촌 소설로 녹록지 않은 힘을 발휘해 소설 읽는 즐거움을 톡톡히 누릴 수 있게 해준다. 구수한 사투리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한 인물들이 등장하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터, 그렇기에 오랜만에 농촌소설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말을 죽였을까 - 이시백 연작소설집

이시백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08)


#농촌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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